# 46
46. 사는 게 그런 거지 뭐 (1)
마계를 기록하는 달. 삭의 주인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이제 그녀가 어디 있든, 마계 모든 곳에 그녀의 눈과 귀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삭의 권능.
마신조차 해낼 수 없는 각성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네 명의 마족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군림자 우도현.
그와의 맹약이 순식간에 오제아의 격을 상승시켜 버린 것이다.
도현은 순간 살짝 감탄했다.
“예쁘네.”
오제아는 우아하고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맹약의 문양이 은은하게 빛나는 도현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갖다 댔다.
“삭의 오젠타 아르샤의 주인께 경배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마족들이 탄식했다. 분노에 찬 레리아사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건 있을 수 없어! 있을 수 없다고!”
“시끄러.”
도현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더 분개하려던 레리아사는 갑자기 영혼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가 잘 사용하지 않는 정신 지배 능력 중 하나였다.
방문했을 때부터 쨍쨍거리는 목소리가 유독 거슬렸던 햇병아리. 그래도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목소리에 담긴 악의와 질투가 오제아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맹약이란 건 그런 것이었으니까.
종이 주인의 마음을 엿듣지 못하지만, 주인은 종이 된 자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예전 성격이었으면 거두고 봐주고 할 것도 없었지.’
집에 돌아오기 전이었다면 그러고도 남았을 성격이었다.
‘저번 주까지는 밥에 카운슬링이더니.’
이번 주는 애 보긴가?
괜스레 이가 갈렸다.
제브라드도, 지구에 이변을 일으킨 신들도.
‘도를 넘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고.’
제브라드에서 깽판 쳤던 몸. 지구라고 못 할 건 없었다.
그런 불편한 도현의 심기를 알아챈 걸까, 레리아사를 제외한 햇병아리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무릎을 꿇으며 합창했다.
“주종의 맹…….”
“필요 없어.”
딱 잘라 버리자 세상 끝난 표정을 짓는 꼴을 보며 혀를 찼다.
보바를 보며 말했다.
“수집품을 주겠다고?”
“군림자께 실언을 했습니다. 마, 마계의 율법에 따라…….”
“필요 없다니까.”
에스틴과 탄가트는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보바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오히려 휘둘렀으면 휘둘렀지, 이런 경우를 겪어 본 적도, 겪을 거라 생각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일었지만 그저 속으로 억누를 뿐이었다.
모두가 도현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나오기만 숨죽이고 기다리는 가운데, 도현은 오제아에게 별것 아닌 투로 말했다.
“밥 먹을래?”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는 햇병아리 가운데 막 정신이 든 레리아사만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동자를 굴렸다.
도현은 모두가 앉기엔 너무 부족한 식탁을 보다 제브라드에게 뜯어냈던 요구가 생각났다.
오픈과 종료.
드디어 써먹을 시간이 왔다.
“오픈.”
거실이 은빛으로 물들었다.
우우웅!
그리고 나타난 것은 신전이었다.
“미친…….”
이를 가는 도현을 눈치채지 못한 모르달이 눈을 반짝이며 팔딱였다.
“제브라드시여! 신전이라니! 도련님, 이것이야말로 신의 은총 아님까요! 이 때깔 나는 바닥하고 기둥하고, 신앙이 넘쳐… 쿠엑!”
도현의 짜증 넘치는 발길질이 모르달을 향했다.
집이 변했다.
호텔에서나 볼 법한 고급 조리실이 거실을 차지했다.
오픈된 조리실을 넘어 홀이 보였다. 고급 융 카펫이 깔린 바닥과 그릇과 식기가 기본 세팅이 된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의 예술품 같은 실내.
그런 실내를 감싸는 시리도록 하얀 대리석 벽을 지나 뻥 뚫린 창에는 벽과 같은 하얀 기둥 4개가 존재감을 뽐냈다.
그리고 기둥 밖으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숲과 숲을 가르고 떨어지는 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절경이었다.
“…….”
모두가 홀과 홀 밖의 경치에 넋을 잃었지만, 도현만큼은 불쾌감을 숨길 수 없었다.
오직 제브라드의 취향이 가득 담긴 가게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도현의 집의 냉장고가 이 가게에 같이 딸려 왔다는 것 정도. 그래 봤자 마기에 터져 버린 냉장고다.
‘두고 보자, 제브라드…….’
작게 이를 갈던 도현은 햇병아리 마족들을 홀로 내쫓았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아직 시작도 못 한 보쌈을 봉지째 꺼내기 시작했다.
식지 않은 따끈한 열기와 수육 특유의 향기에 들끓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뜨렸다.
수육을 담기 위해 조리실에 비치된 길쭉한 그릇을 헹궈 손에 쥐자 모르달이 벌떡 일어나 앞치마를 건넸다.
네이비 컬러의 앞치마.
가슴께 부분에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르달의 얼굴이 프린팅되어 있었다.
“도련님, 요리의 기본임다요!”
그저 집에서 자신만 먹을 때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지만, 손님 대접 중이다.
앞치마를 해야 한다는 생각과 거부하고 싶어지는 디자인에 다른 앞치마를 찾아보지만, 여분도 다를 바가 없었다.
도현은 벌레 씹은 얼굴로 순순히 앞치마를 걸쳤다.
“압빠! 모자!”
모르달에 이어 토토가 네발로 뛰어와 입에 물고 있던 모자를 도현 앞에 내려놨다.
앞치마와 세트였다.
억지로 앞치마와 모자를 걸친 도현은 그릇에 수육 세팅을 끝내고 쌈 몇 개를 꺼내 수육 옆자리에 깔았다.
무말랭이와 겉절이를 큰 덩이로 올린다. 윤이 반짝이는 붉은 빛깔의 반찬이 눈을 즐겁게 만든다.
‘좋았어.’
이어서 손가락을 튕겼다.
이번만큼은 먹는 동안 식지 않도록 시간 고정 마법을 쓴 것이었다.
다시 접시를 꺼내 헹궜다.
종지처럼 작은 칸이 세 개 붙은 사각 찬그릇이었다.
쌈장과 새우젓, 간장을 채웠다. 그리고 간장 칸 모서리에 고추냉이를 살짝 덜어 묻혔다.
그 외, 쌈무와 여러 채소 쌈, 찍어 먹을 마늘과 청양고추를 한입 크기로 썰어 넉넉하게 준비했다.
‘이걸 내가 했다니.’
도현은 뭔가 모를 뿌듯함에 뭘 모를 19살의 자신으로 돌아간 착각이 들었다.
픽 웃자 옆에서 보조를 맞추던 모르달이 쩝쩝 침을 삼켰다.
“도련님, 저희 것도 있는 검니까요? 설마 저 검둥이들만 챙기는 건 아니심욧?!”
꼴에 족제비라고 부릅뜬 눈을 보니 사생결단이라도 낼 모습이었다.
‘이놈을 저 숲으로 던져 버려?’
눈치 빠른 모르달이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던져 버려야겠다고 손을 뻗는데 토토가 가세했다.
“끼낏, 압빠! 토토, 꼬기!”
잘들 논다, 놀아.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쉰 도현은 손가락을 튕겨 모든 접시를 허공에 띄웠다.
넓은 조리실과 얼굴이 비칠 정도로 깨끗이 윤나는 바닥이 어색했지만, 가게라는 것이, 손님을 대접한다는 생각이 새삼 묘하게 와닿았다.
나쁘지는 않다. 다만 좀 어색했다.
집에서 밥을 내주는 것과 가게에서 음식을 서빙한다는 것이.
의외로 산뜻한 즐거움이 있었다.
‘실내 인테리어랑 앞치마만 아니면 더 괜찮았을 텐데.’
오제아를 제외하고 얼빠진 얼굴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도현이 짧게 휘파람을 불자 둥실둥실 떠 있던 접시들이 미끄러지듯 날아 부드럽게 테이블 위에 착지했다.
다섯 마족은 눈앞에 펼쳐진 음식을 보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음식이란 게 딱히 필요 없는 마족들에게 먹는 행위란 별난 취미로 인식되기 때문이었다.
무려 군림자가 차린 음식이다.
너무나 막막했다.
어떻게 비위를 맞춰야 하나… 아니, 이것은 시험인가?
모두가 그런 심오한 뜻을 이해하는데 오제아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상추를 하나 들었다. 포크로 수육 한 점을 새우젓에 찍어 쌈 위에 얹었다. 무말랭이와 겉절이를 적당히 올리고 쌈을 동그랗게 만든 뒤 와앙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아삭아삭, 으적으적!
‘마치 패배자의 손가락을 씹는 듯한 소리군.’
앞이 보이지 않는 만큼 귀가 예민한 탄가트가 그렇게 비유할 정도로 음식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꿀꺽 삼킨 오제아의 얼굴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됐다.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뜬 눈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약하지만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 맛있어! 이건, 음! 분노의 비명 맛이야! 아니, 그보다 더…….”
그녀는 말을 멈추고 다시 빠르게 포크를 놀렸다. 이번에는 간장에 고추냉이를 섞었다. 수육 세 점을 한 번에 꽂아 간장에 푹 담근 뒤 쌈 위에 얹었다.
욕심내어 마늘과 청양고추까지 쌈장에 찍어 고기 위에 그득 올린 다음 바쁘게 입에 넣었다.
파작파작! 아삭아삭!
‘이번엔 적수의 머리통을 부숴 밟는 소리 같군.’
탄가트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 소리만큼은 자신의 취향에 너무 맞았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더 음미하기 전에 오제아는 급하게 삼킨 뒤 ‘하아, 하아.’거리는 신음을 냈다.
모두가 엄청난 쾌락과 흥분에 찼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너무 매운맛에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주, 주인님. 어째서 이런 설명을…….’
머릿속으로 들어온 도현의 설명을 따랐던 그녀는 너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이 웃음으로 변하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군침을 삼키며 오제아가 먹었던 대로 쌈을 싸 입에 넣었다.
“……!”
레리아사는 아삭거리는 식감과 향긋한 육질이 입 안을 희롱하자 자신도 모르게 홍조 띤 얼굴로 콧소리를 냈다.
‘이런 걸 눈치나 보고 있었다니!’
오제아가 먼저 먹고 이런 즐거움을 먼저 느꼈다는 것에 더 열받은 그녀는 씹는 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향긋한 육질이 다져지듯 씹히며 그윽한 향에 다시 탄성이 나왔다. 그리고 알싸하면서도 매운맛이 모든 맛을 뒤집었다.
마계의 꺼지지 않는 불을 집어삼킨 듯 거대한 불길이 일었다.
“……!”
모두가 뱉고 싶은 마음을 본능적으로 누른다. 때마침 후폭풍으로 콧속을 뚫고 머리를 때리는 극도의 매운맛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자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이… 이게 음식이라고?’
독이 통하지 않는 몸이지만, 괴로움이 목적이라면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거다.
살기가 가득 담긴 시선이 오제아에게 몰렸다. 그녀는 그런 시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웃긴 상황을 뒤로할 정도로 정신을 놓을 것 같은 매운맛에 울상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이, 오제아는 입 안의 고통이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놀라 눈을 깜빡이는데 뒤쪽에서 꽤에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헉! 도련님! 왜 이러심까요! 소인을 죽일 심산이셨슴까욧!”
조리실에서 팔딱대는 모르달은 킥킥 웃어 대는 도현이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 없었다.
맛있는 쌈이라더니 이건 폭탄이나 다름없다.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핏발 선 눈을 부라리던 모르달은 뒤통수에 느껴지는 따끔한 시선에 고개가 돌아갔다.
거기에는 자신과 같은 곤욕을 치르는 마족 다섯이 보였다.
순간 쌤통이다! 생각했던 모르달은 잊었던 매운맛에 진저리 쳤다.
도현이 혀를 차며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냈다.
“콜라 한 잔 마시면 괜찮아.”
머그잔 가득 부어 주는 탄산음료를 다급히 원샷한 모르달은 또다시 ‘꺼흑!’ 비명을 지르며 조리실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탄산과 불난 입 안은 핵폭발이 일어난 듯 더 큰 시너지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모르달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펑펑 울어 댔다.
“아이고, 제브라드 님! 소인을 왜 이곳에 보내셨슴까요, 엉엉! 소인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크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엉엉.”
“모르달, 엄살이 너무 심한데? 탄산 때문에 처음엔 더 매워도 지금은 괜찮잖아?”
“엉엉, 얼마나 매운… 어라?”
매운맛에 혀가 얼얼하긴 했지만, 방금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매운맛이 사라졌다.
그리고 입 안에 남은 달짝지근한 맛에 다시 콜라가 당겼다.
꿀꺽, 꿀꺽, 꿀꺽!
다시 콜라 한 컵을 마신 모르달은 자신도 모르게 캬! 하는 탄성을 지르며 꺼흑, 트림했다.
깔끔해진 입 안이 다시 고기를 불렀다.
“주, 죽임다요!”
기막힌 콜라의 맛에 취한 모르달은 아직 괴로워하는 마족들을 보며 킬킬킬 비웃었다.
‘더 괴로워해라! 이 검둥이들!’
모르달의 염원은 도현의 콜라 배달로 10초도 안 돼 사라졌지만, 나름 통쾌한 맛에 보쌈이 더 입에 착착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