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45화 (45/200)

# 45

45. Peak Time (5)

방문자 때문에 제대로 못 한 식사를 치운 도현은 의자에 걸터앉아 다섯의 햇병아리들을 빤히 보고 있었다.

식탁에 한 팔을 걸치고 턱을 괸 모습은 몹시 귀찮음과 짜증으로 가득했다.

고요하다 못해 숨이 턱 막힐 분위기.

눈치를 살피던 레리아사가 덜덜 떨며 도현을 향해 절을 올렸다.

“소, 소녀 레리아사. 마계에 군림한 자에게 인사 올립니다. 마계의 율법에 따라 신하가 되어 보필하겠사옵니다.”

예의를 넘어 비굴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었지만,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했다.

장난이라 하기에도 우스운 한 대.

그게 세계수 나뭇가지라서, 모르달의 신성력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서 이렇게 간단히 끝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우도현. 마계에 종말을 가져온 자이자 동시에 마계에 군림한 자.

마신들까지 인정하고 달래어 보냈던 그 치욕적인 역사의 시작점.

불과 15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이후 1세대의 마족들에겐 잔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안 그렇겠는가, 제브라드에서 추방당한 인간인데.

게다가 아무리 굵은 생명 줄이라 해도 인간이다. 만 년 이상을 살아가는 마족과 비교할 가치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탄생조차도 쉽지 않은 마족이 그날 이후 30년 만에 태어난 게 이 다섯 마족이었다.

1세대 마족들이 얼마나 애지중지하게 컸을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부모 격인 마신들의 충고를 흘려버렸던 햇병아리들은 후회와 동시에 눈앞의 도현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첫마디가 ‘날개 하나씩 찢자.’였으니까.

그것도 아주 진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그 첫 번째의 제물은 오제아였다.

그녀의 태생은 어둠의 달, 삭.

마계가 시작됨과 동시에 태어난 달인 삭은 마계 하늘에 늘 존재한다지만 그 누구도 삭의 실체를 본 마족은 없었다.

오직 한 세대에 한 명의 마족에게만 허락된 어둠은, 자신의 자식에게만 어둠의 날개를 허락했다.

어둠으로 만들어진 날개는 실체가 없기에 만질 수 없었다.

그런 날개를 도현이 아무렇지 않게 잡고 찢어 버렸으니…….

레리아사는 괜히 등이 저려 오는 것 같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무능력한 자신의 처지에 눈물이 차올랐다.

‘날개가 찢기느니 소멸을 택하겠어.’

힘의 근원이자 자신의 존재 가치인 날개. 저 오제아처럼 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녀에게 다른 마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 주시면 지금까지 모은 마계의 귀한 것들을 드리겠습니다.”

수집에 미친 보바다웠다.

이어서 착실하고 늘 진중한 에스틴이 무릎을 꿇었다.

“마계의 율법에 따라, 군림자의 칼이 되어 앞장서겠습니다.”

“저 역시 마계의 율법을 따르겠소.”

덩달아 탄가트도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레리아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직 자신만이 치욕적인 모습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일그러진 얼굴은 금세 활짝 펴지며 입이 조소를 걸쳤다.

목숨값으로 거래를 요구한 멍청한 보바나 아직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오제아가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저자를 수집품으로 생각했던 오제아는 대체 어떤 기분일까?

어둠의 딸로 늘 떠받들어졌던 오제아에게 남은 건 끝없는 추락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의 존재 이유는 마계를 기록하기 위한 펜과 종이일 뿐.

어둠의 달, 삭의 존재 이유는 마계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데에 있었다.

보고, 듣고, 그 속의 감정을 아주 객관적으로 기록한다.

대단한 어둠의 딸이 고작 기록을 위한 도구라니.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역시 무능한 오제아.’

마계의 몬스터로 왕국을 이룬 자신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레리아사는 곧 펼쳐질 상황에 너무나 흥분되어, 자신도 모르게 쿡쿡 웃어 버렸다.

도현이 들썩이는 레리아사의 몸을 슬쩍 보고 망연자실해 있는 오제아에게 물었다.

“나를 찍었던 거기 햇병아리, 너는?”

그저 평온한 물음이었지만 그녀는 경기 일으키듯 놀라며 두려움에 떨었다.

레리아사는 다시 또 킥 하고 웃었다.

오제아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비척비척 걸어 도현의 한 발 앞에서 양손을 가슴에 모아 머리를 조아렸다.

“어둠의 딸, 오젠타 아르샤. 마계의 군림자께 제…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햇병아리 넷이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어떤 자리인지 망각할 정도로 충격받은 보바가 작게 신음했다.

“미쳤군. 주종의 맹약이라니.”

오제아는 잡음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도현만 보고 있는 것으로도 벅찼다.

그런 오제아와 대비될 정도로 도현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오로지 귀찮음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모습에 비위를 맞춰야 하는 네 마족만 괴로울 뿐이었다.

도현이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 한 말 같진 않고.”

여태 근질거리는 주둥이를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던 모르달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소릴 질렀다.

“도련님! 사특한 것의 꼬임에 넘어가심 안 됨다요!”

“시끄러. 계속 그러면 몽둥이찜질이 무엇인지 친히 알려 주지.”

모르달은 그제야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이 오제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진심이야?”

“예.”

“주종의 맹약을 맺는 즉시 넌 내 소유물이 된다. 그 뜻은 네 고향인 마계조차 내 허락이 없다면 갈 수 없어.”

그 뜻은 그녀가 마족으로서 성장할 기회도, 그녀의 마족 본질인 ‘어둠의 딸’이란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저 껍데기만 마족이 되어 버리는, 가혹함만을 짊어져야 하는 맹약.

구경하듯 지켜보고만 있는 네 마족의 감정이 극과 극으로 교차했다.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에스틴과 이해는 되지만 마족의 자존심을 버린 마족의 최후라 생각하는 나머지 세 마족.

틀렸다고 할 순 없었다. 어차피 날개 한 짝을 잃은 마족은 마계로 돌아가더라도 다른 마족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게 뻔했으니까.

“좋아.”

흔쾌히 수락하는 도현의 모습에 남은 마족들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오제아를 원망했다.

그럼에도 반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직접 입에 담았던 마계의 율법 때문이었다.

힘 있는 강한 자만이 모든 걸 가진다는 강자존.

말은 달랐지만, 다섯 마족의 목숨은 어차피 도현의 기분에 따라 죽고 사는 체스판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맹약으로 묶였다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을까.

‘정말 맹약이 나았을까…….’

에스틴은 미련 섞인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마계의 기둥, 세 마신의 명으로 반마족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다섯이서 제브라드로 넘어온 것이었다.

반마족은 마계의 수치.

그렇기에 혼혈이 성인식을 거쳐 반마족으로 탄생하면 즉시 마족들은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반마족을 없애기 위해 마족이 중간계인 제브라드에 파견된다.

이번처럼 많은 수가 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첫 경험을 겪어 보았으면 하는 마신들의 배려였는데.

이렇게 험난할 줄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입맛이 써진 에스틴은 도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망설임 없이 주종의 맹약을 맺는 오제아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고고하게 일어선 채 가슴에 두 손을 모아 눈을 감고 읊조렸다.

“삭에서 태어난 태초의 어둠. 어둠의 딸 오젠타 아르샤는 그 품과 굴레를 벗어나 주인 우도현을 모시나니. 모든 어둠은 삭의 품으로 돌아가라.”

그녀의 등에 길게 늘어뜨려진 날개 한 짝이 읊는 맹약에 따라 파르르 떨렸다.

쯔아아악!

동시에 발아래 새카만 구멍이 쩍 벌어졌다. 펼쳐진 날개 끝부터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구멍은 한 알도 놓치지 않으려는지 구멍의 크기를 조금씩 확장시켜 갔다.

날개가 모두 사라지자 직경 3미터에 이르렀던 구멍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털썩!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오제아는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모든 게 사라졌어…….’

허탈과 함께 끝없는 탈력감이 몰려왔다.

더는 어둠의 힘도, 힘의 상징이었던 날개도 그녀의 몸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맹약의 낙인이 상처처럼 오른쪽 눈동자에 새겨져 있었다.

이제는 마계 하급 몬스터조차 감당 못 하는, 종족만이 마족인 그녀는 지친 얼굴로 도현을 향해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결국 저질렀슴다요, 저질렀어! 제브라드시여!”

모든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모르달이 짧은 앞발로 가슴을 쾅쾅 쳤다.

도현이 모르달을 무시하며 오제아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있어?”

“맹약으로 군림자께 저질렀던 무례가 용서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그녀는 어째서인지 태어나기 전부터 마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마계의 시작부터 태어나는 수많은 몬스터와 그 안의 선택된 마족의 탄생까지.

마족은 자신의 강한 육체와 힘을 주체하지 못하며 서로를 짓밟고 우위에 서는 것으로 욕구를 풀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마족의 삶이 고여 썩어 날 때쯤, 도현이 나타났다.

그리고 모든 걸 지워 버렸다.

상처이자, 치욕이자, 마계 악습을 마족이 가장 선호하는 강자존의 율법으로 쳐부수었다.

그 모든 걸 본 적 없음에도 볼 수 있었고, 듣지 않았음에도 들을 수 있었다. 겪지 않았음에도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녀가 삭, 마계를 기록하는 자. 어둠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저 문헌으로, 마신들의 이야기로 접한 마족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오제아는 도현에게서 마족에게서 느낄 수 없는 이질적인 강함을 알 수 있었다.

희로애락에 충실한 마족. 그와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의 우도현을 곱씹을수록 커지는 호기심은, 채워지지 않는 깊은 갈증이었다.

하지만 그 갈증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신 제브라드가 도현을 본래의 세상으로 내쫓아 버렸으니 말이다.

이후 그녀의 취미는 강한 인간 수집이었다.

마족과의 계약을 원하는 인간, 제물로 바쳐진 인간 중 제일 강한 것들로.

처음의 의미는 퇴색되고 목적만 남은 수집욕 때문에 자청한 여정에서 도현을 바로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기록에 남은 것과 너무 달라진 분위기에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 못 한 그녀는 지금의 모습에 더 흥분했다.

늘 상처 받은 야수 같았던 그의 무뚝뚝하지만 귀찮음과 평온이 자신의 마음까지 채워 주었다.

오제아는 그 평온함을 음미하며 그만 미소 짓고 말았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호기심이 아닌 흠모였음을.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흐음.”

도현은 자신의 손등에 빛나는 문양과 함께 머릿속에 들어오는 오제아의 생각을 읽고 턱을 긁었다.

이런 맹목적인 감정은 꽤 오랜만인 까닭이다.

당황스럽달까, 얼떨떨하달까.

나쁘지는 않다.

그냥 새롭달까.

그런 긍정과 동시에 거실에 엄청난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제아를 중심으로 거실 바닥, 벽, 천장 할 것 없이 마법진으로 가득해졌다.

우우우웅!

순간 발코니 밖의 밤이 마계의 어둠으로 물든다고 느꼈던 찰나.

더 검고, 더 어두운, 순수한 어둠이 오제아를 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어둠이 맥동하고 그녀의 몸으로 스며든다.

눈 깜빡할 시간 만에 일어난 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실의 오제아는 그대로였다.

아니, 백색으로 변한 해골 티아라 형태의 뿔과 은색으로 빛나는 백색의 긴 생머리에는 춤추듯 일렁이는 어둠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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