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38. 이게 아닌데 (2)
왜 남자일까. 제브라드에서 하피는 여성체밖에 없었다. 지나가는 인간에게 매혹을 걸어 씨를 받는 몬스터였으니 말이다.
대신 남성체 하피는 도현이 여태 봐 왔던 하피와 큰 차이가 있었다.
굵고 탄탄한 날개와 날렵하고 힘도 세 보였다. 특히, 5미터에 달하는 덩치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저 꽥꽥대는 소란스러운 주둥이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다.
도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하피의 부리를 주먹으로 쳐 버렸다.
“시끄러.”
“키아아아― 켁!”
거대한 몸집이 그 한 방으로 지면에 처박혀 버렸다.
푸루루룩! 끼아아악!
헌터 협회장인 강혁조차도 곧바로 일어나기 힘든 힘이 실린 주먹이었다.
그런데 하피는 머리를 몇 번 털어 대더니 쌩쌩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도현에게 적의 가득한 살기를 내뿌렸다.
도현의 눈은 신기한 것을 본 듯 반짝였다.
“음? 이 정도면 맷집이 좋은데?”
처음으로 들어갔던 무한평야라는 4등급 워프. 거기서 만났던 두 마리의 보스 몬스터보다 맷집이 좋았다.
‘어? 잠깐. 거기 4등급이잖아?’
무한평야 워프는 4등급에서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으니 2등급이 되었을 테고.
4등급과 2등급의 보스 몬스터. 그 차이는 3급 헌터가 3명이냐, 10명이냐의 차이와 같았다.
그런데도 하피가 더 강하다?
‘생산 워프와 몬스터 워프의 차이점인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던 도현은 표독스럽게 변한 하피가 날개를 펄럭이며 바람에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숲을 태우던 불을 한 방에 날려 버린 스킬.
차도식이라도 움직임이 흐트러질 강한 바람이었다.
‘아니, 이젠 2급이니 저항할 수준은 되겠네.’
뜬금없는 생각을 정정하던 도현은 하피가 굉장히 좋은 샌드백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몸 좀 풀 수 있으려나?’
행복한 고민을 할 때쯤 토토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끼끼낏!”
하피가 도현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비주얼만 보면 철근도 비스킷처럼 부숴 버릴 강한 발톱이, 도현의 머리를 채기 위해 쩍 벌어졌다.
“진짜 새대가리 아니랄까 봐.”
여태 숲의 왕으로 군림하던 하피가 자신을 도전자로 인식한 걸 알 리 없는 도현은, 가까워지는 하피의 발톱을 피하며 가볍게 발목을 잡아당겼다.
“끼엑?!”
몸이 다시 지면에 꽂힌다는 걸 깨달은 하피는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덕였다.
지면과 하피 사이에 작은 바람이 일며 떨어지는 하피의 몸을 밀어냈다.
“오, 머리가 있는데?”
감탄하는 도현의 얼굴을 하피의 부리가 빠르게 쪼았다.
“성격도 좀 있고.”
도현은 코앞에서 돌처럼 굳어 버린 하피를 보며 씩 웃었다.
혼란으로 흔들리는 하피의 눈동자가 좌우로 뒤룩뒤룩 굴렀다.
“우선 좀 맞자.”
도현은 가볍게 하이킥을 날렸다.
퍼억!
머리를 정통으로 맞고 튕겨 나가려던 하피의 몸이 제자리에 세워졌다.
“음, 타격감 좋고!”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은 도현은 다시 미들킥을 날렸다.
퍼어엉!
메아리처럼 숲에 울리는 타격음이 이어졌다.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하피는 몸이 터질 것 같은 고통에 공포로 가득 찼다.
“역시 몬스터 가죽은 두들기는 맛이 있단 말이야.”
입맛을 다신 도현의 얼굴에 웃음이 진해졌다.
새파랗게 질린 하피는 본능적으로 굳은 몸을 비틀었다.
꾸, 꿈틀.
“끼엑?”
움직인다!
“끼에에엑! 꺄아아아악!”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하피 앞으로 회오리바람이 나타났다.
주먹을 휘두르려던 도현이 멈칫한 사이 하피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필사적으로 몸을 빼내기 위해 날갯짓을 시작했다.
무서운 도전자! 도망가야 해, 도망가야……!
퍽!
부리 아래에서 머리끝까지 울리는 고통에 하피는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누가 보내 준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하피는 파르르 날개를 떨었다.
무섭다. 무서워, 도전자! 아니, 왕이다!
딱딱 부딪히는 부리를 틀어쥐는 힘을 느낌과 동시에 몸이 거꾸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콰앙!
도현은 반쯤 정신을 놓은 하피의 복부를 한 발로 내리찍었다.
“꾸에에에에엑!”
“시끄러.”
새우처럼 굽어지는 하피의 머리를 반대쪽 무릎으로 차 버렸다.
하피의 머리가 뒤로 확 꺾였지만, 목이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르달이 주먹을 꽉 움켜쥐며 짧은 팔로 허공을 때렸다.
“역시 도련님! 쥑이심다요!”
“키이잇! 키이잇!”
토토도 주먹을 쥐고 만세를 해 댔다.
2차로 모르달을 쥐어 패 볼까 하던 도현은 며칠 사이 바친 요리가 마음에 들었던 탓에 그 생각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도현은 상쾌하게 말했다.
“오랜만의 스트레칭도 나쁘지 않네.”
최근 많은 일로 받은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된 하피.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도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뜬 창에 눈썹을 씰룩거렸다.
[스네일의 안식처의 지배자 스네일 사육사 하피를 굴복시켰습니다!]
[굴복시킨 보스 몬스터는 농장에서 사육할 수 있습니다]
“하… 참.”
도현은 기가 찼다.
이젠 하다 하다 몬스터까지 농장에서 키울 수 있다고?
‘이놈을 키워서 뭐 하게?’
솔직히 하리오카 열매를 심었던 그날 이후로 기억 속에서 잊혔던 농장이 불쑥 튀어나오자 어이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알아챈 걸까?
[지배자, 스네일 사육사 하피를 사육할 경우 특성에 따라 농장에서 스네일 사육이 가능해집니다]
도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나쁘지 않은데?’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예를 누르자 간간이 발작처럼 몸을 부르르 떨던 하피의 몸이 씻은 듯 나았다.
하피는 벌떡 일어나 도현의 품에 부리를 비벼 댔다.
“아니! 어디서 천박한 머리를 내밈까욧!”
발끈한 모르달이 짧은 뒷다리로 하피를 차 버렸다.
퍼억!
“끼엑! 끼에엑! 끼악!”
“콩 한 쪽보다 못한 몬스터가 이를 드러냄까욧!”
바락바락 대들던 하피는 결국 일방적인 모르달과 2차전을 치르고 땅바닥에 떡이 되어 쓰러졌다.
생각 없이 그 모습을 구경하던 도현에게 모르달이 씩씩대고 항의했다.
“도련님! 멍청한 몬스터를 왜 거두신 검니까욧! 도련님의 격에 수치임다욧!”
신의 심부름꾼인 자신과 신에게 선택받은 토토에게 갖다 대지도 못할 최하위종이 몬스터였다.
쓰레기 취급 받는 놈을 도현이 살렸으니 모르달의 불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도현은 덤덤하게 말했다.
“농장에 키우면 스네일 사육이 가능하대서.”
순간 모르달의 얼굴이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변했다.
흠칫한 건 도현이었다.
“뭐야? 너도 다져 줘?”
“역시, 도련님의 혜안은 소인이 따라가지 못함다요.”
“하…….”
도현은 몰랐다. 모르달의 최고의 간식이 스네일이 되었을 줄은.
도현은 고분고분해진 모르달이 찜찜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언제든 밟으면 되니까.
일단은 워프가 우선이었다.
농장으로 이동하겠냐는 시스템 창을 끄자 하피가 사라졌다.
‘농장으로 이동한 건가?’
그럴듯한 예상을 하며 고요해진 숲을 둘러봤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은 없었다.
불탄 자국, 잘린 풀과 나무, 쥐가 파먹은 듯 듬성듬성 움푹 파인 땅까지.
“음, 근데… 저것들은 뭐지?”
도현의 시선이 숲을 지나갈 때마다 한 쌍의 붉은 불빛이 등처럼 켜졌다.
적의 가득한 살기가 느껴졌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몬스터들의 눈이었다.
도망갔던 놈들이 인제 와서?
그런 의문을 가짐과 동시에 메시지창이 알람처럼 정신없이 울어 댔다.
[코렛의 보스 몬스터 땅굴콜코렛이 나타났습니다!]
[호우가의 보스 몬스터 돌진하는 붐호우가가 나타났습니다!]
[푸푸라코의 보스 몬스터 맹독의 푸푸타코가 나타났습니다!]
…….
1초에 30개씩 올라가던 메시지에 도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창을 꺼 버렸다.
“이제야 알겠네.”
생산 워프와 몬스터 워프의 차이점.
생산 워프는 보스 몬스터가 한 마리로 고정이지만.
“몬스터 워프는 종류마다 보스 몬스터가 존재하는구나.”
수백, 수천에 달하는 붉은 눈들이 한 발짝씩 숲에서 걸어 나왔다.
이미 하피가 어떻게 된 건지 지켜봤음에도 살기등등한 모습이다.
쪽수가 많다고 저러는 걸까?
아니면 정말 머리가 없는 놈들이라는 걸까?
‘역시 멍청한 놈들이야.’
뭐, 무슨 생각이든 상관없었다.
도현은 몬스터들을 보며 긴장감 없는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모르달, 토토.”
“예, 도련님.”
“끼낏!”
“불꽃놀이 보고 싶다 했지?”
한창 한국에 대해 공부하던 모르달이 TV에서 보여 주던 불꽃놀이를 물어보던 게 기억났다.
모르달은 제 몸만 한 다람쥐 몬스터를 쳐 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현이 덧붙였다.
“작은 불들이 하늘에 퍼져 나가는 거. TV에서 봤잖아.”
모르달이 눈을 반짝였다.
“아, 예! 도련님! 소인, 너무 보고 싶었슴다요!”
크르르릉.
곰처럼 덩치가 큰 놈들이 먼저 시동을 걸었다.
“끼끼, 끼끼낏!”
“토토 님이 마시멜로를 구워… 토토 님, 그건 모닥불임다요.”
캬아아아.
뱀 모습을 한 몬스터들이 늘였던 몸을 곧추세웠다.
“끼낏? 끼낏낏?”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는 토토를 보며 도현은 킥 웃었다.
“뭐든 어때, 불은 불이지.”
“헤, 그럼 소인, 불에 구운 군고구마? 먹고 싶슴다요!”
“그거 좋네.”
“끼끼끼끼낏!”
“아, 토토 님. 마시멜로가 그렇게 좋슴까요?”
신이나 팔딱대는 둘을 보던 도현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크아아아앙!
주변을 둘러싼 모든 몬스터들이 일순간에 도현과 두 펫을 향해 달려들었다.
도현은 머리 위까지 뒤덮는 몬스터 떼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먹자. 배 터지게.”
그러곤 가볍게 엄지와 중지를 튕겼다.
콰아아아앙!
핵폭탄급 불꽃놀이가 워프 전체를 덮쳤다.
***
도현은 숯 더미에서 쿠킹포일에 싼 고구마와 감자를 꺼내 간이 테이블에 올렸다.
“끼끼낏!”
토토는 심혈을 기울여 구운 마시멜로를 열심히 씹으며 행복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쿠킹포일을 벗기고 군고구마를 한입 깨문 모르달이 달달함에 흠뻑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군고구마란 것임까요? 하아, 어떻게 이렇게 달고 고소한 맛이 날 수 있슴까요?!”
결대로 찢기는 군고구마를 다시 한입, 촵촵촵 먹은 모르달은 감탄을 연발했다.
도현은 숯 더미 한쪽에서 끓고 있는 커다란 솥으로 갔다.
제브라드에서 맛을 찾아 돌아다닐 때 사용했던 초대형 솥.
모르달을 넣어 끓여도 될 만큼 크기가 컸다.
바글바글바글.
뚜껑을 열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솥 안에는 주먹 크기의 스네일들이 가득 익어 가고 있었다.
도현은 50센티미터짜리 사각 쟁반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익은 스네일을 옮겨 담았다.
대접을 꺼내 국자로 국물을 뜨고 모두 테이블에 올렸다.
가짓수는 적어도 양이 많아서인지 4인용 테이블이 비좁을 정도다.
도현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구운 것과 삶은 것은 맛이 어떻게 다를까?
삶은 스네일을 테이블로 가져오기 전부터 냉큼 의자에 앉아 대기한 모르달이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