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34. 귀찮다 (4)
도현이 당연히 형식만 따질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귀한 물건을 내주는 강혁의 모습에 궁금증이 생겼다.
“뭐가 다른데요?”
“강압적이지. 말을 듣지 않으면 고통을 동반한 강한 충격이 가해진다.”
말 그대로 굴복시키는 데 특화된 아이템이란 소리다.
“그리고 몬스터의 수치를 세부적으로 기록할 수 있어.”
그렇기에 상위 등급의 몬스터 포획용 도구이면서 연구용인 것이다.
“그건 싫지? 그게 컨트롤 팔찌니까 그걸로 조절해.”
도현은 강혁이 마지막으로 건넨 은색 실 팔찌를 살폈다.
강혁은 ‘링은 꼬리에, 팔찌는 알아서 껴’라는 말을 덧붙였다.
목줄은 불편해하던 토토는 꼬리에 낀 링은 괜찮은지 연신 꼬리를 흔들어 댔다.
모르달도 꼬리를 격하게 흔들며 말했다.
“어우, 도련님. 무척 시원함다요!”
‘뭐가?’
안마라도 받는 듯 녹는 얼굴을 보고서 강혁이 덧붙였다.
“아, 설정 바꿔야 하는데. 착용시키면 무조건 충격을 받게 되어 있어서…….”
놀라서 설명하는 강혁의 표정은 점점 떨떠름하게 변했다.
1,000V의 전기 충격.
말이 충격이지 수천 개의 바늘이 찌르고 후벼 파는 고통이다. 헌터라도 오러를 운용하지 않으면 혼절해 버릴 정도니까.
게다가 꼬리가 달린 몬스터들은 꼬리가 약점이니 고통은 배가 된다.
3등급의 몬스터도 그 충격에 순순히 말을 들을 정도인데, 저 둘은 뭐란 말인가?
‘고장……? 아니, 그럴 리가…….’
강혁이 그런 착각을 할 때쯤, 토토가 소릴 질렀다.
“끼낏, 끼끼낏.”
조금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소리를 모르달이 해석했다.
“토토 님은 간지럽다 하심다요.”
아, 마음에 든 게 아니라 간지러워서.
떨떠름한 도현과 강혁의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동시에 입을 열었다.
“쟤들 얼마나 강한 거냐?”
“저거 말곤 없어요?”
하지현은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링을 끼냐 마냐, 대련해 주면 안 되냐로 대립하는 대화가 평행선을 긋는다.
대화 내용만 제외한다면 일상적인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도현을 보고 있으면 벽이 생긴 것처럼 생소하고 막막했다.
강혁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보다 말이 많고, 표정이나 말투에 과장이 섞여 있었다.
신을 뛰어넘는 힘…….
모르달의 입을 도현이 막았지만, 똑똑히 들었다.
그 힘을 얻기 위해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난 일을 겪었겠지. 죽을 뻔한 일도 적지 않을 거다.
하지현은 오늘 일어난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도현이 행방불명 되고 세상이 변하면서 충격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예전, 아빠를 잃었던 때 보다 더 가라앉아 버렸다.
그녀는 각성자가 되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워프에 뛰어들었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몬스터를 없애고 워프를 파괴하고.
사신 마녀라는, 이상한 이명이 붙을 만큼 그녀는 잠까지 줄여가며 워프 파괴에 몰두했다.
그러다 겁 없이 3등급 워프에 들어갔고, 거기서 차도식을 만났다.
자신과 국내 최초 3급 헌터인 사내. 처음 만난 자리는 배에 구멍이 뚫려 과다출혈로 시야가 흐려질 때쯤이었다.
‘지현씨! 괘, 괜찮습니까?! 세상에, 이 피가……!’
그날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의 자신은 없었겠지.
차도식은 자상하고 친절했다.
상처로 입원했을 때도 매일매일 찾아와 대화상대가 되어 주었고, 그럴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옛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혼자 워프에 들어가 했던 헌팅도.
또는 아무 팀에 들어가 했던 헌팅도.
그저 덤덤히 이야기했지만, 그는 무척 화난 얼굴로 자신을 나무랐다.
‘지현 씨는 왜 자신을 함부로 대합니까?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유요……?’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모든 건 핑계였다.
그저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자신이 싫었던 거다.
퇴원이 다가왔을 때는 어느새 함께 헌팅하기로 약속해 버렸다.
5명씩 꾸려야 할 팀을 단둘만으로.
그렇게 유일무이한 3급 헌터 페어가 결성되었다.
차도식과의 첫 헌팅은 그녀에게 있어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자신의 키만큼이나 크고 넓은 대검을 능수능란하게 휘두르며 확실하게 몬스터의 숨을 끊는다.
수인을 맺고 몬스터를 모아 다시 대여섯 개의 범위 마법을 연계해야 하는 자신과는 정반대의 헌팅 방법이었다.
말 그대로 헌팅의 정석 같은 모습이랄까.
왜 사람들이 차도식 헌터에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가 부러웠다.
헌팅은 순조로웠다.
혼자였다면 벌써 탈진해 쓰러졌을 법도 한데, 이 페이스대로라면 워프 하나를 더 가도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 이게 팀…….’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팀의 중요성을.
팀이란 건 그저 머릿수만 채우는 게 아닌, 등을 맡기고 믿을 수 있는 동료라는 것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일한 팀원이자 팀장인 차도식의 배려 속에 자신을 향한 다른 감정이 섞여 있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 그렇게 좋은 사람인데. 좋은 동료인데.
그랬던 사람이 왜 이렇게 변한 걸까.
‘어쩌면 이제야 콩깍지가 벗겨진 걸지도.’
하지현은 도현이 오기 전 강혁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제 도현이가 헌터 3급이 되었다. 헌팅 목적은 아니고 학교 출석하기 싫어서란다. 하, 그놈 생각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
허허, 웃는 얼굴에는 한국 헌터 협회장으로서 뿌듯함과 삼촌으로서 조카의 선택을 응원하는 삼촌의 모습이 공존해 있었다.
물론 하지현과 차도식에게 알려준 이유도 공적이든 사적이든 도현과 얽혀 있으므로 가장 먼저 알려준 것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게 차도식에게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차도식의 질투심이 폭발할 줄은.
갑작스러운 3급 헌터 출현도 특급 이슈인데, 지금 이 방에서 일어났던 일이 나돌지 않길 바라는 건 차도식에게 과한 바람이다.
‘그랬다간 오빠의 헌터 생활은 끝이야…….’
처음에야 둘 다 세간의 관심을 받겠지만, 마지막에 남는 건 승자뿐이니까.
거기다 차도식은 헌터들의 정점에 선 인물 아닌가.
얻는 것은 없고 잃을 것만 가득한 미래였다.
‘…최악이야.’
하지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최고의 품절남이 한순간에 핵폭탄급 민폐남이 되다니.
반대로 도현은 자신을 정말 죽이려고 했던 차도식을 흔쾌히 살려주고 말끔하게 치료까지 해주었다.
면목이 없다 못해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정도.
‘깨어나기만 해봐.’
아직 정신을 잃은 차도식의 얼굴을 빤히 보는 하지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강렬한 시선 때문일까, 조용히 잠든 차도식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떠는 듯했다.
눈을 깜빡이던 하지현은 차도식의 얌전한 모습에 잘못 본 거라 착각했다.
“야, 이씨 네 펫이라도 빌려달라니까 왜 안 된다는 건데?!”
강혁이었다. 벌떡 일어나 씩씩대는 게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 같았다.
‘저 싸움 귀신…….’
그럴 만 했다. 매일 쌓이기만 하는 서류와의 싸움으로 스트레스를 풀 곳은 대련밖에 없었으니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당한 헌터들은 죄다 병원 신세를 졌다. 그러다 보니 생계에 문제가 생기는 이들도 많았고 모두가 기피 대상 1호가 된 강혁이었다.
그런 일화 때문에 강혁의 별명은 미친개, 헌터 브레이커가 되긴 했지만.
협회장이 그런 별명을 가진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했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차도식이 가끔 대련 상대가 되어 주긴 했지만, 오늘 도현과의 대련 이야기를 하는 강혁의 표정은 경악스러웠다.
마치 사춘기 소녀가 첫사랑에 빠진 얼굴이랄까.
산적 같은 비주얼로 홍조 띤 얼굴이라니.
꿈에 나올까 두려웠다.
‘하, 이럴 때가 아니라 곧 있으면 주 팀장님 오실 시간인데.’
하지현과 차도식이 협회에 들른 건 다음 워프 헌팅 조율을 위한 미팅이었다.
요즘 2주기 워프가 대거 나오기 시작하며 사고가 잦아지는 탓에 강혁이 급하게 미팅 요청을 한 거다.
쌓여만 가는 헌팅 일정을 상상하다 고개를 흔들던 하지현의 귀에 솔깃한 말이 들렸다.
“어……? 주기에 들어선 워프? 거긴 왜?”
강혁은 방금 들은 말에 눈을 끔뻑였다.
주기에 들어선 워프에 가겠다고? 저 게으른 조카 놈이?
환청을 들은 거겠지, 하기엔 너무 의욕에 찬 모습이다.
의심 가득한 눈으로 도현을 위아래로 훑자 도현은 토토를 가리키며 말했다.
“토토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죠? 만약 얘를 그냥 뒀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야…….”
보스몬스터가 됐겠지.
정론이긴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강혁은 찜찜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적지근한 태도 때문일까, 도현이 말을 덧붙였다.
“출석 면제 때문에 간다고 해도 그러네.”
그래서 더 의심스럽단다 조카야.
머리를 벅벅 긁던 강혁은 테이블 위에 대자로 뻗어 잠든 토토를 봤다. 배는 제 몸의 두 배쯤 불룩 튀어나와 산처럼 봉긋하다.
채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원숭이인데, 먹는 건 웬만한 성인 남자의 5배는 먹어 대니…….
‘어? 먹을 거… 요리?’
강혁이 눈을 번쩍였다.
“너 혹시 워프에서 식재료 구하려고 그러지?! 아, 새끼. 워프에서 고급 재료 나오는 거 어떻게 알고?!”
도현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짜증이 날 때마다 하는 습관이었다.
“뭐… 일손 부족하다면서요.”
워프는 되도록 안 가고 싶었는데, 대화하는 사이 새롭게 뜬 시스템 창에 계획에도 없는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돌발 퀘스트 발생!
식재료를 수급하라!
폭발적으로 늘어난 방문자에 당황하셨어요?
걱정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는 당신을 위한 특별 퀘☆스☆트!
식재료 수급 0/1,000
식재료 도감 완성(초급) 0/30
보상: 방문자 패스권x1
*도감을 완성할 때마다 추가로 방문자 패스권을 지급합니다!
모든 상황을 보고 있다는 듯 툭 떨어진 퀘스트.
감시당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솟았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었다.
‘젠장.’
어차피 요리는 하려 했다지만, 재료를 마트나 음식 배달만을 생각했던 차에 깨달음이 왔다.
간단한 시스템을 잊고 있었다니.
며칠 전에 만들었던 바비큐 꼬치만 해도 얼마나 감탄했던가.
간단명료하면서도 맛까지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자동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너무 나를 잘 안단 말이야.’
시스템 창의 퀘스트만 봐도 알겠다!
특히 모르달에게 강림한 뒤 확실하게 된 한글 패치는 신경을 긁었다.
소파 한쪽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자는 모르달을 잘근잘근 밟자니 장소가 좋지 못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낮게 한숨을 내뱉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난 차도식이 도현을 보고 발작처럼 외쳤다.
“우도혀어어언!”
차도식의 몸에서 기운이 폭발적으로 끓어올랐다.
그 힘을 도현을 향해 쏘려 했을 때, 하지현이 음산하게 차도식을 불렀다.
“오빠.”
흠칫, 차도식이 뒤를 돌아봤다. 이를 까득 간 하지현이 말아 쥔 주먹을 차도식의 얼굴에 힘껏 날렸다.
빠각! 콰―앙!
묵직하고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차도식은 바닥에 꽂혔다.
“커헉!”
하지현은 짧게 숨을 후, 내뱉으며 주먹을 회수했고 그 아래 넋이 나간 채 쌍코피를 흘리는 차도식은 하지현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도… 결국 저 새끼 편이야……?”
억울함과 원망, 그리고 배신의 상처로 가득한 목소리.
하지현은 다시 일그러지는 차도식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쫘악――!
“씨발, 열폭 관종 새끼! 언제 철들래?!”
맞은 차도식도 보고 있던 강혁도 입이 쩍 벌어졌다.
도현만 휘파람을 불며 손뼉 쳤다.
“하찌롱, 걸크 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