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33. 귀찮다 (3)
강혁이 힘겹게 입을 뗐다.
“…거기서 얼마나 지낸 거냐?”
도현이 선뜻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뷔페 룸이 고요해졌다.
모두가 도현의 대답을 기다리는 가운데 차도식이 피식 웃으며 빈정댔다.
“뭐, 보나 마나 5년 아닙니까.”
행방불명의 5년을 언급했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는 강혁과 하지현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도현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500년.”
세 사람의 부릅뜬 눈이 도현에게 꽂혔다. 레이저라도 나올 기세였다.
“500년?”
강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지만 도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음과 함께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정말 그 시간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강혁은 그 시간 동안 도현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말이 500년이지, 대부분은 미쳐 버려 목숨을 끊을 만큼 억겁의 시간일 테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위로? 격려? 공감?
어쭙잖은 건 안 한 것보다 못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강혁이 입을 열려 하자 차도식이 날카롭게 반박했다.
“개소리…….”
억눌린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
도현의 무심한 시선이 차도식에게 향하자,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살기를 쏟아 냈다.
“도식 씨!”
하지현이 그를 불렀지만 안중에도 없었다.
벌떡 일어난 차도식이 도현을 노려봤다.
“그런 차원이 있다고? 그래. 있다 쳐. 그런데 거기서 500년을 살아? 네가 몬스터야?”
“도식 씨, 왜 그래?!”
하지현이 그의 팔을 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이라도 차도식을 끌고 나가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도현에게 다가갔다.
“아, 행방불명되기 전에 게임 폐인이랬지? 각성한 힘이 망상 아냐? 게임인지 현실인지 구분 못 하고 낄 데 안 낄 데 다 들어와서 사람을 쓰레기로 만들고!”
“차도식! 말이 심하다!”
강혁이 제지했지만, 차도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열등감!’
강혁이 이를 악물었다.
강한 헌터를 뛰어넘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동경하는 그 잘난 맛에 사는 사내, 차도식.
좋지 못한 유년기를 보낸 탓에 각성하면서 성격이 삐뚤어졌지만,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모난 성격도 그저 하나의 개성으로 보일 만큼.
문제는 도현이 돌아오고서다.
차도식이 무엇으로든 넘어설 수 없는 사람.
마주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지 않았을 테지만, 부딪칠 접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내의 사촌이자 소속사 사장 부부의 아들.
‘그리고 이젠 헌터이기까지.’
그것도 차도식과 하지현만 습득한 3급에 도현이 추가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1, 2주기를 맞은 워프들도 등급이 높아 3급인 차도식의 한계를 넘어서 버렸다.
결국 함께 들어간 워프 대부분을 도현이 정리해 버렸고, 그로 인해 차도식의 모난 성격이 튀어나왔을 거다.
그 와중에 차도식은 도현에게 목숨까지 빚졌다.
‘정식 보고는 한 번이지만, 분명 그 이상일 테지.’
그게 차도식의 열등감을 건드려 버렸다.
‘애초 처음부터 둘을 갈라놓았어야 했다.’
친우의 요청이라서 넘겨 버리긴 했지만…….
물과 기름 같은 극과 극의 성격도 한몫했다.
자신이 나서려 했지만, 이미 5년 동안 해 온 잔소리에도 안 바뀐 성격이다.
‘차라리 박살 나 버린다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강혁이 그런 바람을 담아 도현을 봤을 때, 도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고해 성사는 교회 가서 하시고.”
강혁은 속으로 쾌재를, 하지현은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차도식은 붉어진 얼굴을 푸들푸들 떨며 씹듯이 내뱉었다.
“이… 새끼가!”
냅다 오러를 끌어 올렸다. 붉게 물든 주먹을 도현을 향해 뻗었다.
놀란 모르달이 소리를 빽 질렀다.
“도련님!”
“꺄아아악!”
토토까지 꼬리와 털을 세우며 차도식을 공격하려 했지만, 도현은 빠르게 토토를 잡아채 모르달에게 던졌다.
“정신 사납다.”
그리고 얼굴 앞까지 온 차도식의 주먹을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잡아 버렸다.
‘오러가 깃든 주먹을 잡아?!’
웬만한 격차가 아니고선 주먹을 잡은 팔이 터져 나갈 정도로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차도식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도현은 무심하게 말아 쥔 주먹으로 굳어 버린 차도식의 배를 가볍게 툭 쳤다.
콰앙!
“커헉!”
쏘아진 포탄처럼 벽에 처박힌 차도식은 새우처럼 굽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웩!”
도현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창 구역질 중인 그에게 한마디 했다.
“고작, 이게 끝?”
“씨…발!”
벌떡 일어난 차도식이 인벤토리에서 대검을 꺼내 들었다.
“오빠!”
“차도식, 무기는 안 돼!”
놀란 강혁이 차도식을 막으려 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경악한 눈동자가 도현을 향했다.
차도식의 몸에서 무겁고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진심으로 끌어 올린 오러에 눈 전체가 진한 핏빛으로 번들거렸다.
보기만 해도 날카로운 살기에 찢길 것 같았던 강혁과 하지현은 자신들을 감싸는 투명한 막에 움찔했다. 불안함과 달리 갑자기 몸이 편안해졌다.
누군지 뻔했다. 도현이다.
두 사람은 멍하니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1.7미터의 날렵한 대검이 붉게 울어 대며 도현의 허리를 베었다.
“주우욱어어어엇!”
“아, 안 돼!”
하지현의 허망한 목소리가 룸을 울렸을 때.
쩡! 퍼억!
도현의 허리에 박힌 대검이 터져 버리며 허공에 흩날렸다.
도현이 조롱했다.
“유리가 더 강하겠네.”
“내… 내 검이… 이 새끼야!”
손잡이만 남은 검을 보며 현실을 부정하던 차도식은 검을 내던지고 도현에게 달려들었다.
형식도, 체계도 없는 주먹질이 도현에게 꽂혔다.
얼굴, 가슴, 다리.
죽일 기세로 급소도 노렸지만 그저 허공에는 붉은 궤적만이 생겨났다, 덧없이 사라졌다.
‘왜… 왜 맞질 않는 건데!’
차도식은 이 상황이 너무도 억울했다.
자신은 강하다. 누구도 넘을 수 없다던 1급 헌터 놈이 사라지고 모든 게 제 세상이었다.
동급의 헌터도 5분이면 백기를 드는 힘.
압도적인 강함.
그 타이틀은 언제나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나를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데!”
지금은 사라진 1급, 노아 이선. 그놈과 똑같은 눈빛을 한 우도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제일 강하다고오오!”
콰과광!
조각난 집기들이 붉은 기운에 따라 거칠게 날아다녔다.
차도식의 몸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몬스터처럼 바뀐 모습은 강혁이라도 쉽게 이길 수 없을 정도였다.
“크아아악!”
차도식의 눈동자가 사라진 붉은 눈이 번뜩이며 도현에게 꽂혔다.
“크허어어엉!”
차도식의 벌어진 주둥이가 도현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던 찰나.
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온몸이 뒤틀리며 튕겨 나갔다.
차도식은 희미하게 남은 정신으로 흐느끼듯 뱉었다.
“괴물… 새끼…….”
그리고 맥없이 쓰러졌다.
“오, 오빠!”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하지현은 몸을 가뒀던 투명한 막이 사라지자마자 뛰어와 쓰러진 차도식을 보고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기형적으로 꺾인 팔다리와 흐물거리는 몸. 정신을 잃었음에도 울컥, 울컥 넘어오는 핏물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안색이 파랗다 못해 하얗게 물들어 갔다.
덜덜 떨던 그녀의 눈이 도현을 향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뭔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두려웠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자신의 남편인 차도식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눈을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염치없는 거 아는데… 부탁이야, 도식 씨를 살려 줘…….”
도현은 말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심드렁한 얼굴이라 생각했던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차갑게 보였다.
숨 막힐 듯한 정적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녀는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작은 생물이 자신의 검지를 잡는 게 느껴졌다.
붉은 털 뭉치, 토토였다.
“토토?”
“끼낏! 낏낏낏!”
토토가 하지현의 손을 잡고 도현을 향해 화를 내었다.
도현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던 모르달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쌩쌩한 모습으로 말했다.
“예쁜 여자를 울리는 건 죄를 짓는 거라고 하심다요.”
“너 토토 말도 알아들어?”
도현이 떨떠름하게 묻자 모르달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내밀었다.
“당연함니다요. 신의 심부름꾼인 제가 못 할 일은 없슴니다요!”
‘퍽이나.’
도현은 모르달의 자랑을 한 귀로 흘리며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진심으로 붙은 건 아니지만 조금 놀랐다. 일정 수준이 아니면 드러나지 않는 힘이 차도식을 밀어내 버렸다.
받은 대미지를 두 배로 되돌려 주는 힘.
소드마스터에게도 웬만해선 발동하지 않는 힘이라 생각도 안 했었는데.
잠깐이었지만 그만큼 위험할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중급 실력에 그만한 위험이라…….’
어쩌면 관심 종자의 성격만이 아니라 정말 실력 있는 사람일지도.
“낏낏낏낏!”
“빨리 안 하냐고 보채심다요.”
도현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레이트 리커버리.”
그라드를 완치시켰던 마법을 다시 읊었다.
녹색의 빛에 따라 차도식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꺾인 팔다리가 돌아오며 자잘한 찰과상과 진창이 된 몸속도 순식간에 나았다.
허공에서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차도식의 몸을 하지현이 안아 들었다.
그사이 엉망 된 뷔페 룸도 물감이 퍼지듯 제 모습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룸.
할 말을 잃은 강혁이 해탈한 듯 중얼거렸다.
“차라리 까놓고 말해라, 신이라고…….”
모르달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사족 붙였다.
“도련님은 신을 뛰어… 우왁! 도, 도련님!”
도현은 재빨리 모르달을 잡아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지고 난 후였다.
“…….”
아까와 달리 껄끄러운 정적이 감돌았다.
“그냥 요리하고 싶은 조카예요.”
변명 아닌 변명을 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강혁이 링 두 개를 도현에게 건넸다.
“이거면 될 거다.”
회색과 초록색을 섞어 가락지처럼 생긴 링은 헌터 협회에 등록한 테이밍 몬스터란 표식이었다.
“이건 튼튼해요?”
불신 섞인 물음에 강혁이 울컥했다.
“조카야, 이게 얼마짜린데… 어후, 국내에도 몇 개 없는 비싼 거라고. 사비를 탈탈 털어 주는 건데 그런 말 하면 어떡하냐.”
다이닝룸 옆, 거실 소파에 앉은 세 사람은 토토와 모르달의 테이밍 몬스터 등록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혁이 직원을 시켜 가져왔던 검은 가죽 띠는 토토의 목에 매자마자 토토의 손에 찢어졌고, 강혁은 어쩔 수 없이 고가의 링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이 링은 테이밍한 몬스터에게 쓰는 게 아니라, 연구용이나 3등급 이상의 몬스터를 포획할 때 사용하는 거다.”
토토와 모르달이 그만큼 강하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