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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의 자취방-32화 (32/200)

# 32

32. 귀찮다 (2)

도현은 분풀이하듯 입에 넣은 씨앗을 씹었다.

와드득!

씹자마자 입 안 가득 확 퍼지는 향에 정신이 들었다.

마치 아몬드를 씹는 것처럼 고소하고 기름진 향이 입과 콧속을 채웠다.

그 강한 여운에 잘게 으깨어져 진득해질 때까지 씹은 도현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꿀떡 삼켰다.

‘정말 뭐가 바뀐 건지.’

입맛만 다시던 도현은 뭔가 더 먹어 봐야겠단 생각에 벌떡 일어났을 때였다.

“도련님, 미각은 돌아왔슴까요?”

아, 저 말투. 생긴 건… 어쨌든 다 마음에 안 든다.

도현은 말없이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익숙하게 먹던 것들을 제외하자 눈에 들어온 것은 생강이었다.

기본 식재료 중 하나인 생강.

초생강을 제외하면 생으로 먹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식자재였다.

‘굵고 짧은 게 낫겠지.’

잠깐 망설였지만, 작은 덩어리 하나를 꺼내 씻어 견과류처럼 씹었다.

“……!”

매운맛이 퍼지며 혀가 아렸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질긴 뿌리를 씹는 것처럼 퍽퍽했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느끼지 못했던 단맛이 뒤에 느껴졌다.

맵고, 아리고, 달고.

거기에 생강 특유의 향이 코를 뚫고 머리를 찔렀다.

결국 삼키지 못하고 뱉어 버렸지만 도현의 얼굴은 밝았다.

맛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매운맛만 느꼈던 입이 이젠 맛을 하나씩 뜯어보듯 전부 느꼈다.

갑자기 의욕이 솟구쳤다.

무엇이든 다 먹어 보고 싶어졌다.

선명한 맛에 즐겨 먹던 음식에서도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도현은 빠르게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도련니이임! 어디 가심까요!”

당연한 것처럼 펫 두 마리가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밥 먹으러.”

혼자 가려니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토토가 눈에 밟혔다.

그렇다고 토토만 데려가자니…….

모르달을 탈탈 털 때 말리던 토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두 놈을 데려가도 괜찮은 곳. 그리고 많은 음식이 있는 곳.

헌터 협회의 뷔페가 떠올랐다.

‘괜찮겠는데?’

거기까지 생각했던 도현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올 강혁 삼촌이 생각나서였다.

다른 곳을 생각하고 있을 때 모르달이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소인도 가고 싶슴다욧!”

“안 돼.”

소환 해제가 가능한 토토는 몰라도 이 녀석은 안 된다.

“변신! 함니다욧!”

“변신?”

모르달이 짧은 양팔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변! 시이이이인!”

모르달의 몸이 은빛으로 물들며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빛이 사라지자 나타난 건 은빛 머리를 한,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사내였다.

“어떻습니까, 도련님!”

키 190센티미터의 사내는 상큼하게 웃으며 도현에게 가슴을 내밀었다.

군더더기 없이 잘빠진 몸과 연예인도 울고 갈 광채 피부.

그리고 크고 우람한 꼬리가 엉덩이 뒤에서 살랑거렸다.

거대한 덩치의 전라.

족제비 꼬리.

멍하니 보던 도현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모르달을 발로 까 버렸다.

“내 눈 썩는다, 새꺄!”

***

“호오, 호오, 도련님. 드론 택시라 하셨습니까? 이거 정말 대단한 문물이군요!”

2인승 드론 택시를 타고 헌터 협회로 향하는 도현의 얼굴은 몹시 피곤했다.

옆에 앉은 모르달은 투명 유리 형태의 뚜껑에 달라붙어 세상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현재 모르달이 입은 옷은 도현의 추리닝으로 흰색 반팔 티에 흰색 두 줄이 달린 검은 팬츠의 차림이었다.

사이즈는 비슷했지만, 모르달이 좀 더 큰 키에 팬츠 끝이 복숭아뼈에서 달랑거렸다.

“낏, 끼끼낏!”

모르달처럼 반대편 유리창에 달라붙어 세상 구경 중인 토토는 붉은 털의 원숭이 모습이었지만, 소형견만큼이나 몸집이 커졌다. 이젠 목줄이라도 채워야 할 것 같았다.

“가는 김에… 하, 결국 삼촌을 봐야겠네.”

마트에 갔을 때는 작아서 검문 대상이 아니었지만, 몸길이가 30센티미터 이상이면 보호구 착용이 의무화란다.

등록도 안 된 상황이니 이래저래 헌터 협회에 용무가 있지만, 삼촌을 보는 건 내키지 않았다.

‘아, 협회장이니 몬스터 등록이랑 상관없지.’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진 도현은 모르달을 불렀다.

“모르달.”

“예, 도련님!”

그림 같은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쳐다보자 도현은 기분이 나빠졌다.

‘뭐, 이상한 말투는 안 들어도 되니까.’

그렇게 위안하며 드론 택시를 타기 전에도 했던 말을 다시 언급했다.

“도착하면 아무 말 하지 마. 입은 먹기 위해서만 여는 거다. 알겠지?”

“물론입니다, 도련님!”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더 찝찝했지만 토토도 첫 외출이니 참기로 했다. 다시 떠들기 시작한 두 수인의 수다를 배경 삼아 택시 드론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10분.

‘조용히 밥만 먹고 오자.’

그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어서 와라, 조카야! 나랑 대련해 주러 온 거냐?!”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도현을 단박에 알아본 경비원들은 당연하게 강혁의 앞으로 도현을 배달했다.

다행이라면 그의 목적에 맞게 조용히 먹고 갈 수 있는 뷔페 룸이었다는 것이지만.

스위트룸만 한 크기에 도현이 호텔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할 때쯤이었다.

“안녕…….”

인사하자마자 시선을 피하는 하지현과.

“…….”

접시에 얼굴을 박고 투명 인간 취급하는 차도식이 함께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변함없이 해맑게 도현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강혁뿐이었다.

‘그러니까 셋이 식사 중인 걸 내가 방해했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삼촌 앞에 바로 배달시켜 버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차라리 이게 낫겠지.’

도현은 모르달이 조용히 있기를 빌며 말했다.

“대련은 아니고, 키우게 된 몬스터 등록 때문에요.”

“몬스터……? 아, 그러고 보니 하리오카 과수원에서 원숭이? 뭐 그런 거 주웠다더니… 그게 이 몬스터냐?”

웨어울프 특성이라 그런 걸까, 삼촌은 테이블 위의 음식을 보자마자 자리를 잡고 먹어 대는 토토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리지 못했다.

차도식은 잠깐 토토를 보고 입술을 비틀며 다시 먹는 데 열중했고, 하지현은 조용히 토토를 보며 천천히 음식을 먹어 댔다.

어색함이 감도는 적막한 분위기.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곳에 갈 걸 그랬나.’

다른 사람은 상관없었지만, 하지현과 서먹해진 게 불편했다.

그래서 용건만 보고 자리를 옮기려고 했는데.

“안녕하십니까!”

흥분 최고조인 모르달이 도현의 경고도 상큼하게 씹어 버리고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불쑥 튀어나온 모르달의 덩치와 외모에 강혁이 흠칫했다.

혹시나 몰라 도현이 모르달의 기척을 숨겼었는데. 보기 좋게 드러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어… 이건 또 뭐야? 도현아, 이 사람은 누구… 아니, 인간이 아니잖아? 몬스터…보다 동물에 가까운데?”

킁킁, 냄새를 맡는 강혁을 보고 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긁어서 부스럼 만든 짝이다.

“물론입니다! 전 거대 흰족… 웁!”

도현은 힘차게 자기소개를 하는 모르달을 뒤로 던져 버렸다.

“악! 도련님! 이런 험한 손길은…….”

펑!

“변신이 풀린다고 하지 않았슴까요!”

족제비로 돌아간 모르달이 옷 속에서 빠져나와 도현에게 항의했다.

강혁의 눈이 모르달에게 꽂혔다 도현에게 갔다.

“그냥 몬스터예요. 등록할 몬스터 두 마리.”

정확히는 코 꿰인 한 마리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한 마리가 맞지만, 변명 같은 설명을 해야 하는 게 더 귀찮았다.

강혁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도현을 흘겼다.

“너… 직업이 테이머냐?”

직업?

“상태창 몰라?”

“음.”

도현은 방문자에 관련된 창들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시스템 창을 열어 본 적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서일까, 강혁은 기가 찼다.

저 나이에 이렇게 관심 없기도 힘든데.

이제 스물여섯. 하지현보다 겨우 반년 생일이 빠른 것뿐인데, 하는 짓은 해탈한 80대 노인네 같지 않은가.

“하… 그래, 사고 이후 이제 1년이니 뭐,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강혁을 보고 모르달이 반색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슴다요! 도련님은 제브라드에서 사셨다가 최근에 본 세계로 귀환하셔서 많이 피곤하신 상태이심다요!”

“……?!”

4명의 황당한 시선이 모르달에게 꽂혔다.

“제브라드……? 귀환?”

핵심만 콕 짚은 하지현은 멍하니 도현을 바라봤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이었다.

‘하… 제브라드. 정말 지능적으로 괴롭히네.’

“덜떨어진 족제비. 이젠 반품도 안 되니.”

“도, 도련님! 덜떨어진 족제비라니요! 말씀이 심하심다요!”

“찌그러져 있어.”

도현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헌터 협회만 아니었다면 모르달의 교육 현장이 됐을 만큼 몹시 짜증이 났다.

강혁은 팔짱을 끼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입을 뗐다.

“조카야, 설명이 필요하다.”

‘귀찮아…….’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주절주절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일이 말했다간 시달릴 게 뻔했으니까.

“뭐, 다른 차원에 떨어졌다가 돌아온 거예요.”

“다른 차원? 설마 워프에 갇혔다 온 거냐?”

귀찮은 게 질색인 도현이 사실을 말할지 오해하게 둘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쯤 발끈한 모르달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하찮은 워프를 제브라드에 비교하심…….”

“모르달.”

“아, 아님다요! 죽을죄를 졌슴다요!”

바닥에 납작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다.

그저 모르달의 성격인 걸까, 제브라드의 노림수일까.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들이 알아서 다리에 걸려 넘어지니 한숨밖에 안 나왔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먹는 것도, 입씨름도, 변명 같은 해명도 다 귀찮았다.

‘역시 집 밖은 위험해.’

조용히 아무도 건들지 않는 내 집에서 즐기는 백수 라이프. 타이틀만 들어도 얼마나 마음이 푸근해지는가.

‘정작 1년도 즐기지 못했지만.’

학교도 그렇지만 그놈의 방문자들 때문에 더 그랬다.

갑자기 울컥했다.

‘내 집에서 내가 못 쉰다니…….’

이젠 집 아닌 집도 필요 없었다. 그냥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틀어박혀 잠적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딱 10년… 아니, 5년 만이라도.

그런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탓에 도현이 너무 잠잠하자 강혁이 그를 불렀다.

“조카야?”

“예.”

“설명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다만 질문 몇 가지만 대답해 주면 안 되냐?”

며칠 사이에 도현을 정확히 파악한 강혁이 부드럽게 달랬다.

나쁘지 않다.

도현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모르달이 말한… 제브라드? 거긴 정확히 어디지?”

질문은 제브라드의 세계관, 각성자의 유무, 제브라드의 발전 상태로 이어졌다.

도현은 적당히 대답하면서 이유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이야기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제브라드라서 그런가?’

삼촌이 그저 강한 헌터라서 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위치에 맞는 노련함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다 코가 꿰일지 모르지 조심해야겠어.’

물 흐르듯 넘어가는 질문과 적절한 추임새가 사람을 안정시켰다.

그렇게 대답을 하다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술술 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물으마. 이건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앞선 질문과 다르게 진지했다.

도현은 바로 예상했다.

‘나에 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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