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31. 귀찮다 (1)
삐리릭― 덜컥!
도현은 점심을 먹은 뒤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새로 올 방문자에 대한 계획 때문이었다.
“오셨슴니까요, 도련님!”
7살짜리만 한 족제비가 종종걸음으로 현관 앞까지 나와 도현을 맞이했다.
이번 주 마지막 방문자였던 모르달.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것과 다르게 예의를 차려 먹을 것을 요구했다.
이상했지만, 일단은 방문자였으니 뚝배기 라면을 대접했고, 그렇게 일주일 스코어가 달성했다.
그리고 보상으로 남은 게 이 족제비였다.
왜 이 녀석이 남았냐.
바로 이런 이유였다.
다음 주부터 한 주의 방문자 수가 늘어납니다.
방문자 수 증가 5명(총 8명)
현재 방문 가능자 수: 0
일주일 스코어: SSS
보상으로 ‘제브라드의 선물’이 지급되었습니다.
제브라드의 선물-모르달
모르달은 거대 흰족제비족으로, 흰색을 신성시하는 제브라드 신의 심부름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그들은 만능 일꾼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묘족의 앞발이 아닌, 거대 흰족제비족을 찾아주세요!
손실된 능력치가 3% 복구되었습니다.
현재 능력치: 54.6%(복구된 능력치 포함)
이후 방문자부터 대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젠 동물 농장이라도 차리란 말인가?’
뭐 토토야 우연이지만…….
아무래도 이 족제비는 고의성이 다분해 보였다.
좋게 말하면 시종이고, 나쁘게 말하면 제브라드의 감시자.
그것도 이렇게 적나라하게 던질 줄은 도현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원치 않음에도 떠맡아야 하는 상황. 당혹감과 불쾌감이 밀려오는 건 당연했다.
그런 마음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는지 모르달은 순종하듯 짧은 앞발을 배에 모아 고개를 숙였다.
“저를 보내신 건 제브라드 님이시지만은 저의 주인님은 도련님이심니다요.”
말투만 뺀다면 모습은 참 고고했다. 만약 모르달이 인간이었다면, 바로 쫓겨나고 도현은 제브라드를 향해 되갚아 줄 준비를 했겠지만.
교묘히 피했다고 할까.
불쾌했다.
쯧, 혀를 차던 도현은 모르달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방문자라는 게 제브라드의 짓임을.
‘집어치울까?’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그것도 기분 나빴다.
이미 마음먹은 거 타의로 그만두는 꼴이니까.
“끼낏, 끼끼끼끼낏!”
다급하게 달려 나온 토토가 방방 뜬 모습으로 반가워했다.
놔두고 간 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의외로 둘이 잘 맞나 보다.
“도련님, 식사하셨슴까요? 도련님 명령대로 토토 님과는 막 식사를 끝냈슴니다요.”
옛 양반집 머슴이 쓸 말투라 해야 할지, 불량배들이 쓸 만한 말투라 해야 할지.
듣기론 제브라드 어느 지방 사투리라는데, 귀에 거슬리다 못해 속까지 벅벅 긁어 대는 것 같다.
‘정말 거슬리는 건지. 아니면 본주인 때문인지.’
괜히 제브라드가 다시 떠오르자, 기분을 망친 도현은 모르달을 무시하고 토토를 안아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자동으로 토토가 도현의 배 위에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모르달은 그런 도현이 누운 소파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아, 신경 쓰여.’
허연 가래떡처럼 낭창낭창한 것이 주위에 배회하니 신경 쓰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도현은 절로 나오는 한숨에 입을 뗐다.
“제브라드가 널 보낸 이유가 날 도우라고?”
“예, 그렇슴다요.”
“뭘?”
“무엇이든지요. 제 주인님은…….”
“그만.”
자정부터 돌아간 쳇바퀴가 다시 이어지려 하자 두통이 일었다.
“그러니까, 제브라드가 뭐라던데?”
“‘우도현 님께 가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슴다요.”
아마도 두 배 넘게 늘어난 방문자 때문이겠지.
그 알림창을 보고 바로 욕이 튀어나왔으니 말 다 한 거다.
일주일 내도록 온다 해도 하루만큼은 2명이 오게 되는 상황.
휴식 생각할 수도 없다.
이것도 웃긴 게 꼭 자신이 집에 있을 때만 들이닥친다.
‘반대로 집에 없으면 안 온다는 건데…….’
그래서 더 미치는 거다.
내 집인데, 내 집이 아닌 상황.
“이대로 튀어 버려?”
툭 튀어나온 본심을 정말 행동으로 옮길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자…….
“그러시면 안 됨니다욧!”
도현은 순간 짜증이 확 치밀었다.
“어쩌라고.”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슴까요?”
모르달이 몸을 일으켰다. 꼿꼿하게 고개를 쳐든다. 그러자 그를 삼키는 은빛 기둥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신탁을 받는 모습이었다.
세상에, 족제비가 신탁이라니.
도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제브라드 님께서 말씀하셨슴니다욧!”
두 눈을 반짝인 모르달이 살짝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슴다! 믿고 행하심, 길이 열릴… 꿰에엑!”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모르달을 발로 까 버리며 으르렁댔다.
“족제비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모르달은 맞은 아픔보단 도현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너무하심니다요, 도련니임… 소인, 도련님께 도움이 되고자…….”
“시끄럽고, 본론만 말해.”
살기 어린 눈빛에 눈물을 찍어 뿌리던 모르달은 가지런히 손을 배 위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떴다.
동시에 도현의 배 위에 엎어졌던 토토가 뒹굴어 바닥에 떨어지더니 잠들어 버렸다.
이상함을 느낀 도현이 모르달을 쳐다보자, 그의 푸른 눈은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르달 입에서 신성이 넘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도현 님, 선물이 마음에 안 드셨나 보군요.」
“당장 데려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도 제브라드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불가능합니다. 이미 모르달은 우도현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대신 필요한 게 있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헛웃음이 났다.
도현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제브라드가 빙의된 모르달을 노려봤다.
“내가 왜? 추방하는 걸로 부족해서 이젠 남의 차원까지 욕심이 나셨나? 거기다 방문자……. 하! 내가 깽판 치는 꼴이 보고 싶어?”
도현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힘을 끌어 올렸다. 당장에라도 모르달을 찢어 버릴 기세였다.
그 모습을 몽롱하게 응시하던 제브라드는 입을 열었다.
「여전하시군요, 도현 님은. 전 모르달을 보냈을 뿐입니다.」
“무슨 개소…….”
모르달을 보냈을 뿐이다.
그 말은 방문자나 농장은 그녀의 작품이 아니라고?
모든 게 그녀의 짓이라 단정 지었던 도현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도현은 일그러진 얼굴로 제브라드를 뚫을 듯이 쳐다봤다.
그녀를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로 보기에도 찜찜했다.
강림이라 더 모호한 상황.
그저 몽롱하게 은빛을 발하는 눈동자를 본 도현은 모든 힘을 거두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놔.”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그는 팔짱을 끼고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8명. 이번 주 들이닥칠 놈들의 수야. 하루에 다 몰리면 어쩌라는 건데?”
4인 식탁만으로는 턱도 없다.
그렇다고 그놈들이 올 때마다 부산을 떨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이게 끝일 리 없지.”
이게 끝일 리가 없다. 방문자는 계속 늘어나겠지. 그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애초 이런 시스템을…….’
“아씨.”
괜히 복잡해진 도현은 튀어나오려는 욕을 삼키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제브라드에서 겪은 고생 때문에 미각도 엉망이야. 요리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제브라드에 떨어지고 한 달. 먹을 게 없어 아무거나 주워 먹었다 죽을 뻔한 뒤로 미각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도 맛을 잘 못 느끼니 세상천지 널린 몬스터를 먹어 댔고, 친우를 잃은 뒤로 미각을 찾기 위해 식도락을 다녔지만 그것도 효과가 없다시피 했다.
집에 돌아오고, 그리운 음식들을 접해서인지 웬만큼은 맛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 느낌은 뭔가 늘 부족한 듯 밋밋했다.
그리고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은 맛이나 향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맛을 느끼려고 밀어 넣다 보면 그릇을 비우곤 했다.
남은 건 불쾌한 포만감과 더부룩한 속뿐.
평균에 못 미치는 미각이 문제였다.
이걸 고치기 위해선 같은 음식을 먹으며 무슨 맛이라고 세뇌하듯 새기는 수밖에 없는데.
이젠 매일 두 배로 늘어난 방문자들의 뒤치다꺼리나 하게 생겼다.
이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면 도현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나 버릴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곧 파업을 뜻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발뺌해 대지만, 못 믿어.’
보라. 지금도 못 도와줘서 안달 난 모습을.
도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잠시 이 세계를 훑어보겠습니다.」
모르달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거실에 은색 파동이 동심원처럼 퍼져 나갔다.
10초도 안 되어 모르달의 몸이 바닥에 내려앉자마자 번쩍 뜨인 그녀의 눈은 언제 몽롱했냐는 듯 생기가 가득했다.
「도현 님의 세계는 정말 독특합니다. 신인 제가 호기심이 생길 정도로.」
황홀한 듯 반짝이는 눈에 도현이 얼굴을 구겼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뭘?’
의아한 도현의 시선이 모르달의 몸에 닿았을 때, 모르달의 짧은 발이 거실을 굴렀다.
은빛 파도가 거세게 거실을 삼키며 각 벽과 방으로 뻗어 나가며 사라졌다.
조용해진 거실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신력으로 조절해 두었습니다. 명령어는 ‘오픈’과 ‘종료’입니다」
이어서 모르달이 꽃잎 같은 손바닥을 펼치자 아몬드 크기의 은빛 물방울이 나타나 도현에게 날아갔다.
제브라드가 말했다.
「태초의 씨앗. 이것이라면 미각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도현의 떨떠름한 얼굴을 보며 제브라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야, 설명은 해 주고 가야……!”
모르달의 몸에서 신성이 거두어지자 벌떡 일어난 도현이 모르달의 목을 잡고 탈탈 털었다.
“제 사정만 사정이지, 망할 놈의 신 같으니라고!”
“컥, 도, 도련님 소인 좀… 주, 죽겠……!”
“끼낏? 낏낏낏!”
잠들었던 토토가 벌떡 일어나더니 도현을 보고 화를 낸다.
도현은 토토를 무시하고 버둥대는 모르달을 5분간 더 털어 대다 결국 토토가 매달려 오자 모르달을 바닥에 던졌다.
“켁켁, 아이고, 소인 죽네. 도련님, 왜 그러심까요?”
‘제브라드 님께서 도와드리지 않았슴까요?’라며 투덜대는 모르달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던 도현은 안 풀리는 분을 겨우 다스렸다.
겨우 숨을 돌린 모르달이 말했다.
“태초의 씨앗은 그냥 드시면 된다 하셨음다요.”
아무렇게나 던졌던 씨앗이 테이블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씨앗을 집어 든 도현은 혀를 찼다.
제브라드의 기둥이라 불리는 태초의 나무.
이름 그대로 제브라드라는 세계가 만들어질 때 처음 심어졌고, 현재 제브라드의 1/10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몬스터.
왜 몬스터냐 하면, 자리는 옮기지 않지만 접근하는 생물에겐 가차 없이 공격했다.
미스릴에 버금가는 뿌리와 나뭇가지로.
그리고 공격에 죽은 생물은 나무의 먹이가 되었다.
그렇게 양분을 모은 태초의 나무는 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그걸 관리하는 종족은 태초의 엘프였다.
뭐 본 적은 없지만.
‘이왕 받은 거 잘 써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