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29화 (29/200)

# 29

29. 참신한 개소리군

하이든은 세상이 빠르게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몸이 붕 떠올랐다. 시야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이었다.

마치 제삼자가 되어 세상을 관조하는 느낌.

당혹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천천히 가라앉으며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석상처럼 멈춘 모든 것들 사이로 도현의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웃는 듯 휘어지며 달싹이는 입 모양을 따라 읽었다.

‘축…하한다?’

하이든은 순간 세상이 핑 돌았다.

“아…….”

온몸을 훑으며 지나가는 짜릿한 전류에 양손을 쥐었다 폈다.

‘벽이… 허물어졌어?!’

믿기 힘들 정도로 허무한 성장이었다.

꽈악!

하이든은 덜덜 떨릴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도현을 향해 무릎을 꿇고 양손과 함께 이마를 바닥에 댔다.

제브라드에서 노예의 인사법이지만, 대한민국의 절과 비슷했다.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르침, 정말… 감사합니다!”

도현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인사가 과분했지만, 나쁘지 않다.

옛 추억이 떠올라서일까?

흐뭇한 웃음을 입에 걸고 추억을 회상하려 할 때, 거실 바닥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크으윽… 하이든…….”

하이든은 가라앉은 눈으로 꿈틀대는 벌레를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식탁에 쌓인 뚝배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벌레를 향해 걸어갔다.

“하…이든 어디 있…….”

푸른 오러가 감싼 뚝배기가 벌레의 머리에 떨어졌다.

빠각!

둔탁하면서도 찰진 소리가 거실을 울리며 오르조는 개구리처럼 거실 바닥에 뻗었다.

도현은 자신을 보며 어색하게 웃는 하이든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이든이 손에 든 뚝배기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거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역시 잊을 수 없는 손맛을 느낀 걸까.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로 되겠어? 필요하면 몇 개 더 챙겨 주지.”

“아닙니다.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래, 그럼.”

흔쾌히 허락함과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끼이익.

열린 문밖에는 하이든의 말처럼 이종족의 절세 미녀들이 초점이 나간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야 할 시간인가 보군요…….”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에 도현은 인벤토리에서 주먹만 한 구슬을 꺼내 던졌다.

“이게 뭡니까?”

“마나든 오러든 쓸 수 있어야 뭐라도 하지 않겠어?”

그 뜻을 바로 이해한 하이든은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생각지도 않은 격려에 감정이 북받쳤다.

팔뚝으로 눈을 훔친 하이든은 조심스럽게 구슬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거실에 뻗은 오르조를 경멸스럽게 내려 보다 한쪽 다리를 잡아 문 너머로 던졌다.

하이든이 마지막으로 도현에게 허리 굽히며 인사를 했다.

“가 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도현은 문 너머로 발을 내딛는 하이든의 뒤통수에 대고 가볍게 말했다.

“갈 데가 없다면 헤미오르를 찾아.”

대답은 필요 없었다.

다시 차오르는 눈물에 하이든을 입술을 씹었다.

“라면이 또 먹고 싶으면 이오르한테 가 보고.”

이오르……?

누군지 기억을 되짚던 하이든이 경악했을 때, 열린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달칵.

하이든 메르토아스

24/남

오르조 수행기사(사망)->소드마스터, 왕실기사단 미스릴단의 단장

여황 헤미오르에게 ‘메르토아스’라는 성을 하사받음.

체력 SS

힘 S

민첩 A

행운 D

마나 SS+

친화력 SS

신앙 SSS+

특이 사항

1. 이종족 구출로 엘프, 수인족들과 100년간 동맹을 맺습니다.

2. 우도현교 장로가 되어 이종족에 우도현교를 설파합니다.

도현은 정보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신경 쓸 필요 없겠네.”

잠시 추억이 밀려왔다.

제브라드에 넘어가 뭣 모르고 날뛰었을 때.

그때는 자신과 페론드가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힘을 기르고 나라를 만들어 제브라드를 자신의 세상인 양 주물렀던 그 시절.

‘그래 봤자 100년도 못 이어진 이야기였지.’

그래서 덧없게 느껴졌던 그 일이, 자신 때문에 다시 시작되는 걸 느꼈다.

가슴속에서 피가 끓는 듯 묘한 감정이 일었다.

길을 인도해 주는 조언자랄까, 자식을 챙겨 주는 부모의 입장이랄까.

딱히 많이 관여하지 않았지만, 작은 일들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제브라드에 녹아들어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내겠지.

그 역사는 전설이 되고, 다시 태어나는 인간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

간접적으로나마 지켜본다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뭐, 신이라도 된…….”

도현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하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제브라드. 내 생각이 빗나갔으면 좋겠는데…….”

“끼낏?”

마침 눈을 비비며 일어난 토토가 도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각했던 도현도 그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풀리며 토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민한다고 변할 것도 아니고.”

뭐, 어쨌든.

하나씩 풀어 가면 되는 거다.

여유도 있고 시간도 넉넉했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왔으니까.

방문자도 계속 오겠지.

귀찮았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그들을 이용할 수 있는 커넥트를 통해 제브라드의 상황도 알 수 있다.

“아, 하이든 그 녀석도 넣을 걸 그랬나.”

너무 윗놈들만 넣으면 아랫물이 어떨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이것도 생각하면서 해야겠네.”

“낏낏낏!”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던 도현은 자신의 검지를 갖고 놀던 토토가 벌떡 일어나자 의아해했다.

끼이익.

다시 방문이 열렸다.

밤 11시.

습관처럼 거실 벽의 시계를 확인한 도현은 황당했다.

이 시간에 방문자라고? 게다가 연속?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르는데, 문틈으로 하얀 것이 보였다.

“안녕하심까요!”

7살짜리 애만 한 흰 족제비가 문을 벌컥 열고 활기차게 인사했다.

“이건 또 뭐야?”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

헌터 사무 공무원학과 학과장실.

김문열 교수는 손에 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군.”

리포트 발표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도현은 헌터 등록 확인 서류만 제출하고 가려다 학과장에게 붙잡혀 앉게 되었다.

맛도 없는 커피로 간간이 입만 축이던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10분밖에 지나지 않아서다.

학과장이 말했다.

“지금 빠지면 조원 충원은 안 되는 건 알 테고.”

“대신 워프 헌팅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조원들과 이야기는 끝낸 상태였다.

헌터 자격증을 땄어도 졸업은 꼭 해야 한다는 엄마.

강의도 빠지면 안 되고 헌터 일도 하란 말에 좁쌀만 한 인내심이 가루로 바스러졌다.

‘그러곤 엄마한테 대들었지…….’

아빠의 중재로 일단락되면서 조율할 수 있었다.

학교의 중요한 일정은 참여하고 그 외 시간은 알아서 하라는 것.

헌터 일을 하든 뭘 하든.

잘 풀린 건지 모르겠지만, 헌터 사무 공무원학과는 학과 특성상 3학년부터 실습이 주를 이룬다고 했다. 그게 사무직이든, 워프 조사 팀이든.

‘말만 다를 뿐 결국 같은데 엄만 왜 닦달인지.’

다시 속이 뒤집히는 도현이 인상을 찌푸리자 학과장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행색인가?”

도현의 표정이 뚱해졌다.

“혹시 능력입니까?”

“난 비각성자네. 뭐 종종 도사 소리를 듣긴 하네만, 자네는 얼굴에 다 드러나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40대 중반이라더니, 무슨 손주의 재롱을 보듯 허허 웃는 모습에 떨떠름했다.

그런 도현을 격려하듯 학과장은 한마디 더 얹었다.

“이 나이 돼 보면 이해될 게야. 20대 청춘이라… 좋을 때지.”

껄껄 웃는 교수를 보며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학과장은 당연하게도 도현의 입학 과정을 알고 있었다. 막대한 장학금은 물론이고, 협력 회사로 지원하겠다는 조건으로 입학한 재벌 2세. 우도현.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툭 던졌다.

“사춘기인가?”

“뭐, 흔한 부모와 자식의 갈등이죠.”

“무엇이기에?”

학과장은 그렇게 물으며 커피 잔을 손에 쥐었다.

“요리하려고요.”

아주 잠깐 멈칫했던 그는 조용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신한 개소리군.”

“1초의 고민도 없는 대답이네요.”

도현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백수는 안 된다 해서 제일 무난하고 적당한 일을 골랐더니 왜 반대를 외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학과장이 말했다.

“요즘 워프산 식자재들이 많은 건 알고 있나?”

“마트 대부분이 그렇더군요.”

“점점 지구의 땅에서 작물이 재배되지 않네.”

“예?”

도현이 눈을 끔뻑였다.

“말 그대로야. 논이고 밭이고 작물 재배가 점점 줄고 있어. 워프가 나타난 뒤로 계속 감소하고 있지.”

말이 안 됐다. 창문 밖만 내다봐도 푸른 나무들이 빽빽한 산이 보이는데.

“정확히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말이 맞겠군.”

학과장의 말은 이랬다.

흔히 먹는 과일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고, 통화 식물인 고구마, 감자도 전혀 맺히지 않았다.

그저 자라나기만 하는 풀이 되어 버린 거다.

부추나 쑥갓, 미나리 같은 채소도 마찬가지였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쓰거나 독성을 지니게 된 것도 있었다.

그리고 변이된 나무와 식물들은 끝없이 자라났다.

계절도 상관없었다. 죽지 않고 오직 자라나기만 했다.

독성 때문에 거름도, 태울 수도 없어 폐기 전용 워프에 들이붓는 실정이라고.

그나마 워프에서 대체할 수 있는 식자재들이 있어 다행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워프의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헌터들이 그 가치를 모를까.”

헌터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

물이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세상이 변하고 있단 말이었다.

“문제 될 거라도 있습니까?”

“없다고 생각하나?”

“구성이 다를 뿐이죠. 뭐, 이미 누렸던 이들이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지만.”

학과장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피가 쏟아질 거네.”

“안정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이 시대에 지양해야 할 문제 아닌가?”

도현은 픽 웃었다.

“참신한 개소리네요.”

학과장의 눈에 잠깐 화가 서렸다 사라지며 조소를 지었다.

“마치 겪어 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도현은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눈이 커지는 학과장을 뒤로하고 도현은 학과장실을 나왔다.

***

“드디어 해방이네.”

일과 중에 제일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학교가 오늘로 끝이라서 그런 걸까.

해방된 기분이었다.

날씨도 화창했다. 햇볕이 따가웠지만, 오늘만큼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댔다.

‘뭐, 아직 해결 안 된 문제가 더 많지만.’

절로 인상이 찌푸려져 생각을 지웠다. 지금만큼은 이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학과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어? 벌써 나왔어?”

“투머치토커 교수님이 웬일로?”

시민형과 김승재가 한마디씩 했다.

“여, 블랙!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

도현은 떨떠름해졌다.

‘이들이 왜 있는 걸까?’

이상한 소릴 해 대는 이민준을 무시하고 고창하를 봤다.

그는 핸디북 형태의 워프사전을 접고 안경을 끌어 올리며 자신을 바라봤다.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왜?”

많은 게 함축된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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