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 뚝배기 (1)
도현의 아침은 여느 때와 같이 전화 알림으로 시작되었다.
다른 점이라면 전화 대상이 부모님이 아닌, 리포트조의 고창하였다는 것 정도.
워프를 빠져나오면서 넘겼던 입체지도로 리포트는 빠르게 완성되었고, 삼일 뒤 발표 날 참석하기만 하면 된다는 전화였다.
어차피 헌터자격증이 있어 학교 출석은 유명무실해졌지만, 한 번쯤은 가야 하니 그날 가서 정리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리고 이어진 아빠의 전화를 받고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너, 너! 헌터자격증 땄다며?!)
“어, 어.”
(몇 급― 아니다, 진짜 헌터 할 거야? 안 한다며, 요리할 거라며!)
“응, 요리할 거야.”
(그치? 그래그래. 요리만 하자? 알겠지, 아들… 엌! 여, 여보!)
퍽퍽 거리는 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겼었다.
엄마가 왜 아빠를 잡았는지 이해는 안 됐지만, 뭐 어른들의 사정이 있겠지.
“차라리 엄마가 전화했더라면 반찬 해달라 했을 텐데.”
도현은 쩝, 마른 입맛을 다셨다.
우선은 자신의 왼손에 달라붙어 물고, 빨고, 씹어대는 이 토토부터 어찌해야 했다.
이미 집 냉장고들은 텅텅 빈 상태.
“마트도 가야되니 거기서 때워야겠다.”
워프가 생겨나고 대형마트는 24시간 연중무휴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잘 시간도 부족한 헌터들의 항의라는데 꽤 신빙성 있는 말이긴 했다.
도현은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자연스럽게 1층의 음식점으로 들어섰다.
“뭘 먹지? 토토야 뭐 먹을래?”
푹신한 게 좋은지 어느새 머리 위를 지정석으로 정한 토토는 진열대의 음식모형에 눈을 반짝였다.
침을 질질 흘리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게 느껴졌지만 어젯밤의 TV 사건 때문인지 바로 달려들진 않았다.
“낏낏! 낏낏낏!”
토토가 풀쩍 뛰어내려 진열대 앞 유리에 찰싹 붙었다. 소불고기 정식 메뉴였다.
한글을 알지도 못하면서 고기라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녀석이 신기했다.
도현은 돌솥비빔밥과 소불고기 정식을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토토는 신이 났는지 정신 사납게 테이블을 뛰어다녔다.
만난 지 하루 밖에 안 됐지만 먹을 거에 환장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머, 저거 원숭이 아냐?”
“꺄아― 너무 귀엽다! 그런데 색이 붉네? 소환수인가?”
“헐, 소환사? 어디 소속….”
이른 아침이라 휑한 자리 중에서 뒤편 끄트머리에 앉은 두 여성이 토토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평상복 차림이었지만, 분위기는 헌터라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끼낏!”
뛰어다니기를 멈춘 토토가 가슴을 내밀며 거만하게 웃었다.
태어난 지 하루 밖에 안 된 녀석이 말을 알아듣고 뽐내는 모습에 도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꺄아―!”
두 여성은 도현과 달리 눈에서 꿀이 떨어지려고 했다. 도현이 조금만 사교성이 있었다면 합석과 동시에 토토를 안았을 그런 모습이었다.
띵!
전광판에 도현의 번호표 숫자가 찍혔다.
“토토, 기다려. 음식 가져올게.”
“낏!”
음식이 온다는 소리에 토토는 다시 오두방정을 떨었다.
그렇게 도현이 음식을 가져왔을 때는 두 여성의 테이블 위에서 재롱부리는 토토를 볼 수 있었다.
토토가 풀쩍 뛰어 공중제비를 돌았다. 긴 꼬리를 다리처럼 테이블에 세우며 양발을 뗐다.
꼬리를 스프링처럼 줄였다 튕기며 허공에서 다시 한 바퀴 돌고 착지하려 할 때, 도현의 집게 손이 토토의 목덜미를 잡았다.
놀란 건 토토뿐만이 아니라 두 여성도 포함되었다.
도현이 고개를 까딱였다.
“실례했습니다.”
“죄송해요, 너무 귀여워서….”
“하, 합석 안 될…!”
웨이브 진 긴 머리 여성이 헛소리하는 짧은 커트 머리를 한 동료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말은 멈췄지만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눈빛은 도현이 밥을 먹고 자리를 뜰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도현은 토토에게 위험을 알려줬다.
“너 그러다 미아 되면 난 모른다?”
“낏!”
진지하고 중요한 이야기임에도 토토는 고개를 팩 돌려 콧방귀를 뀌었다.
훼방에 잔뜩 토라진 모습이었다.
픽 웃은 도현은 자글자글 끓는 뚝배기를 봤다.
한껏 달군 뚝배기에 기름을 두르고 밥을 떠 네 종류의 채소와 중앙에 계란 프라이를 얹은 돌솥비빔밥.
나름 꼬들꼬들하게 눌은밥과 채소들이 어우러지는 그 맛이 좋아 이따금 찾는 메뉴였다.
숟가락으로 따로 나온 고추장을 떠 쓱쓱 비볐다. 그 와중에 토토를 살폈다.
언제 삐쳤냐는 듯 앞에 놓인 음식을 보고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뚝배기 안에 소불고기가 자작한 국물과 함께 뜨거운 김을 뿜고 있었다.
갈색빛 간장 국물과 얇게 썰린 소고기, 투명한 빛을 띠는 양파 채와 당면이 당근 채와 함께 어우러져 식욕을 자극했다.
토토가 뚝배기에 바로 뛰어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제 오뎅탕에 뭣 모르고 달려들었다가 온몸으로 먹고 음식 금지령을 들은 뒤로 음식 앞에서는 얌전해졌다.
‘역시 인생은 경험이야.’
아무리 옆에서 잔소리를 해봤자 한 번 경험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다.
도현이 먹기 좋게 덜어주기까지 토토는 얌전하게 기다렸다.
적당히 덜어진 앞 접시가 토토 앞에 놓이자 후후 입김을 불어먹는 모습은 퍽 귀여웠다.
도현도 서둘러 돌솥비빔밥을 섞고 한 숟가락을 펐다. 뜨끈한 온도 뒤로 혓바닥에 퍼지는 매운 고추장의 칼칼한 맛과 채소의 단맛이 어우러진다. 적당히 볶아진 밥알이 그 사이에서 고소하게 퍼졌다.
돌솥비빔밥과 함께 제공된 된장 시래깃국을 한술 떠 꿀꺽 삼키자마자 입은 갈증이라도 난 것처럼 또 밥 한 숟가락을 종용했다.
“역시 이 맛이지.”
냄비로 쓰이기도 하고 지금처럼 그릇 대신 쓰이기도 하는 뚝배기.
오랜만에 뚝배기 음식을 먹은 탓일까, 뚝배기에 욕심이 생겼다. 난이도가 높은 음식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단순한 요리라면 도전해 볼 만 했다.
도현은 오늘 살 품목에 뚝배기를 추가했다.
***
오르조는 턱을 괸 채 심드렁한 얼굴로 서류를 훑고는 앞에 시립한 베니지를 흘깃 바라봤다.
“이게 사실이라고?”
잔뜩 긴장한 베니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현재 북부지역의 몬스터 토벌을 모두 끝냈다 합니다.”
“그 노르세아스가?”
오르조가 인상을 찡그렸다.
좋지 않다.
페란트 카 노르세아스를 몸저 눕게 만들고 몬스터 웨이브로 노르세아스를 지울 목적으로 3년 넘게 준비한 계획이 몇 달 사이에 어그러졌다.
그것도 한 년 때문에.
“이 모든 게 그 여식이 한 짓이란 말이지?”
반반한 얼굴 말고는 머리가 좀 있어 아카데미에 간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뭔가 있음이 분명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베니지가 몇 번이고 입술을 축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떠도는 소문에는 여식이 검을 들었다고 합니다.”
“검?”
오르조의 한쪽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게 검에… 오러가 서렸다는…”
오르조는 베니지를 향해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를 던졌다.
퍼억!
“커억!”
베니지의 머리를 때린 재떨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옆으로 베니지가 쓰러졌다.
오르조는 시가를 꺼내 물며 중얼거렸다.
“후, 유능한 놈인 줄 알았더니 아무거나 먹고 뱉는 돼지새끼였군. 하이든.”
“예, 가주님.”
오르조 뒤로 존재감 없이 서 있던 하이든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정리해.”
“예, 알겠습니다.”
집무실 입구로 향하는 하이든의 뒤로 오르조가 덧붙였다.
“유능한 놈으로 붙여.”
하이든은 대답 대신 묵례를 하고 문밖에 대기중인 시종장을 찾았다.
이야기를 전달한 하이든이 다시 집무실로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르조가 말했다.
“거기로 가지.”
“…예.”
굳은 하이든을 보며 오르조가 웃었다.
“자네가 유능한 기사라서 다행이야.”
일종의 경고였다.
자신이 제2의 베니지가 될 수도 있다는.
하이든은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저만치 걸어가는 오르조의 뒤를 따랐다.
넓은 백작가 한쪽에는 가주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정원이 있었다.
햇살이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을 걸어 들어갔다.
한밤중이라 오해할 정도의 어두운 이 길 끝에는 유리로 만든 돔이 존재했다.
태양을 걸어둔 듯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을 내뿜는 그곳은 가주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의 정원이었다.
정원에 가까워질수록 하이든의 얼굴은 굳다 못해 검어졌다.
오르조가 입구의 마나석에 손을 올렸다.
왕성에서도 보기 힘든 특수 잠금장치였다.
우웅―
마나석이 공명하자 유리 돔이 한 번 크게 울렁거리며 입구가 나타났다.
오르조는 흡족한 웃음을 입에 걸치며 정원으로 들어섰다. 한발 늦게 하이든이 따랐다.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희귀한 동식물부터 귀하다는 최상급 마나석들과 한 모금에 금화 한 개라는 정령의 호숫물을 호수 째 옮겨온 모습까지.
하이든은 정말 드래곤이 있었다면 그들의 레어가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오셨어요, 주인님?”
하프가 울린 듯 아름다운 목소리의 여인이 낭창낭창한 걸음으로 다가와 오르조 곁에 섰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백금발의 머리와 회색빛 눈동자, 눈보다 희고 뽀얀 살결까지.
웃음 하나로 뭇 사내들의 마음을 쥐고 흔들 정도로 빼어난 미모였다.
문제라면, 그런 그녀의 귀가 길고 끝이 뾰족하다는 것과 걸친 옷이 중요 부위만 가린 것이었다.
“귀염둥이, 잘 지냈느냐?”
오르조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엉덩이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오르조 품에 안기며 얼굴을 파묻었다.
“안으로 들어가셔요, 주인님.”
“흠흠, 그러지.”
그녀는 돌아서기 전 하이든을 슬쩍 보며 오르조와 함께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하이든은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뒤로 숨긴 주먹만 부르르 떨었다.
하이든은 정원 속 작은 저택 앞에 묵묵히 서 있었다.
오르조가 그녀를 이끌고 들어간 저택에서 해괴망측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하이든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런 그의 옆, 풀숲이 흔들리며 붉은 머리가 튀어나왔다.
“또 왔다! 이번 시종은 오래간다!”
건강미를 자랑하는 구리빛 피부의 그녀는 머리 위로 짧은 귀를 쫑긋거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하이든을 살폈다.
회색의 고양이 눈, 이쪽은 수인족 중 묘족이었다.
하이든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하나 같이 귀 한쪽 끝에 달린 보랏빛 구슬 귀걸이가 눈에 거슬렸다.
마나 제어장치이자 복종의 귀걸이.
마족을 숭배하는 흑마법사들이 노예를 능욕하기 위해 만든 아티팩트를 개조한 것으로, 현재는 고위 귀족들의 욕정의 전유물이 되었다.
하이든이 이곳을 드나들게 된지 5년. 오르조의 수행기사로 지낸 시간이었다.
공명정대하기로 소문난 백작을 흠모해 온갖 노력으로 기사단에 들어왔고 2년 후 수행기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보게 된 곳이 이 비밀의 정원, 유리 온실이었다.
하이든의 첫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그는 결심했다.
이들을 해방시키기로.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강해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