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 진심 (5)
고아의 삶, 굶는 게 당연했던 삶. 그 삶이 싫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구걸, 도둑질, 수발 등등.
검을 배우게 된 건 어떤 용병의 미동이 되고서였다.
운이 닿아 검을 배울 수 있었다. 그 후로 용병이 되었고, 카 등급을 거머쥐었을 때 처음으로 한 일이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모든 음식을 시켜 먹는 것이었다.
그때 미친 듯이 먹고 배가 터질 것 같아도 억지로 입에 밀어 넣었다. 울면서 먹고 토하고 먹고, 먹고, 또 먹고. 그런데도 허기가 메워지지 않았었다.
그런 그 때에 비해…
페드릭은 켜켜이 쌓인 냄비를 봤다.
먹다 남은 음식임을 앎에도 탐했고, 씹었을 때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맛의 쾌락에 취해 이것이야말로 신의 음식인가 했다.
비록 음식의 모양새는 레스토랑에 비해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그 맛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몸을 가득 채우는 이 만족감.
겉만 번드르르했던 음식과 달리 가슴이 충만했다. 머리는 더 맑아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요리. 요리라면 누구든 배부르게 해줄 수 있다는 걸.
그게 배든, 가슴이든.
진지하게 감동한 페드릭의 눈을 보며 도현은 난처했다.
“보다시피 제브라드와 여긴 달라.”
페드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말인데 이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오뎅탕?”
“이름이 오뎅탕이군요? 이런 맛은 처음이라― 이것만큼은 욕심이 나네요, 하하.”
그럴만도 했다. 제브라드에서 생선이란 건, 물에 가깝지 않은 이상 구경하기 힘든 음식이니까.
문제는…
“알려준다 해도 제브라드에서 어류를 구하긴 힘들 텐데.”
“어류요? 헉! 이게 물고기란 말입니까? 하아….”
말을 듣자마자 세상이 다 꺼저라 한숨을 내뱉는 모습에 도현은 혀를 찼다.
‘레시피만이라도 알려준다면 괜찮지 않을까?’
완전히 같은 맛을 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보존마법만 걸면 두세 번 해먹을 양은 줄 수 있다.
그 재료들을 가지고 비슷한 재료를 찾아 흉내라도 내 볼…
“아.”
방법이 있다.
우울하게 잠긴 페드릭의 눈을 보며 도현은 씩 웃었다.
“요리를 정말 배우고 싶어?”
“예! 요리를 배울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자신 있습니다! 설령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한다더라도!”
어렸을 적 검을 배우기 전으로 돌아가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도 배울 수만 있다면 그게 어떠하랴.
가능성만 있다면 무조건 도전할 수 있다.
도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혹시 이오르라고 아나?”
페드릭은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얼굴을 굳히며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미치광이 요리사… 그 이오르 말인 건 아니시죠?”
그 한마디에 도현은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이오르, 요리에 미친 블루드래곤.
그의 정체를 아는 건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그저 미치광이 요리사로만 알려져 있다.
어떻게 요리에 빠져서 세상 모든 음식을 먹어보고 요리로 세계를 정복하겠다던, 그 퍼런 도마뱀과의 만남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엉뚱했다.
도현이 고기에 물렸던 시절 생선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찾은 바다의 외딴 섬.
종류별로 잡아 올린 생선을 회를 떠 핫칠리소스에 찍어 먹고, 흉내만 낸 매운탕을 한 숟갈 떴을 때 바다에서 물고기가 튀어나온 것이다.
‘인어가 매운탕을 같이 먹자 했을 때 얼마나 웃겼는지.’
아직도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 뒤로 제브라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도현만의 조리법에 이오르는 스토커처럼 들러붙었다.
나름 쏠쏠하기도 했다.
이오르의 요리 집착으로 대한민국음식의 맛을 70퍼센트까지 재현해낸 것만으로도 놀라웠으니까.
‘그래, 그놈이라면 레시피를 알려 보내더라도 괜찮을 거야.’
한국 음식을 맛보고 싶어 하던 놈이었으니. 이쪽으로 방문하지 못해 음식을 못 먹이는 게 아쉽달까.
그 부분도 이놈을 통해 보내면 갈증은 풀 수 있을 거다.
도현은 다시 문 위에 카운트되는 시간을 확인했다.
대략 50분 정도.
이것저것 챙기려면 시간이 꽤 빠듯하다.
“이걸 가지고 이오르에게 가.”
깨끗하게 치워진 식탁 위에는 주먹만 한 가죽 주머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저 주머니만 봤을 땐 뭔가 싶겠지만, 페드릭은 귀신을 본 마냥 손을 떨었다.
아공간 주머니.
이 안에 어마어마한 양의 물건이 들어가는 걸 봤었으니 말이다.
음식으로 보이는 것부터, 문자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책과 골똘히 생각하던 도현이 즉석 해서 만들어낸 무언가까지.
꺼내놓는다면 자신의 키의 10배쯤 너른 공터에 산을 쌓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가면 내 치지 않으실지….”
내심 내쳐줬으면 하는 마음과 그래도 요리를 배울 천금 같은 기회를 발로 차려는 자신을 질책하는 마음이 계속 대립 됐다.
“이걸 보여주면 돼.”
실처럼 가느다란 은팔찌였다. 그걸 페드릭의 왼팔목에 가져가니 이음새가 없던 팔찌가 팔을 통과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팔목에 팔찌가 채워진 상태였다.
분명 크기가 꽤 작았었는데, 팔목에 딱 맞는 크기로 변했다.
‘아티팩트….’
무슨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티팩트는 웬만한 귀족 저택 한 채 값은 우스울 정도다.
“그리고 이 편지도 부탁하지.”
흰 봉투에 넣은 편지는 무척이나 수수했다.
침을 꼴깍 삼킨 페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갖고 싶은 게 있어?”
대뜸 묻는 말에 패드릭은 로봇처럼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생각도 안 났지만 요리사를 만나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회임를 준 걸 알아서였다.
도현은 페드릭에게도 자신의 피를 먹여 커넥트 시스템에 넣어버릴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접었다.
그를 위한 선물이라기 보단, 이오르와 소식을 주고받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릴 게 뻔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페드릭의 검술 경지도 나쁘지 않다.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10년 안에는 마스터의 경지에 닿을 것이다.
뭐, 그전에 이오르의 손에 좀 더 단축되지 않을까?
‘역시 그게 낫겠다.’
도현은 인벤토리에서 볼링공 크기의 새카만 돌덩이를 꺼내 집중했다.
“창조.”
도현의 몸을 타고 은빛 마나가 돌덩이 속으로 스며들었다.
환한 빛을 내며 허공에 떠오른 돌덩이는 점토처럼 빚어지더니 식칼이 되어 도현의 손에 내려앉았다.
날과 손잡이가 한 몸으로 만들어진 식칼. 문양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밋밋하기까지 했다.
도현은 마지막으로 검지를 들어 칼등에 작게 제브라드 언어를 새겼다.
페드릭.
작업이 끝나자 식칼은 빛을 빨아들이듯 검어졌지만 은은한 은빛이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우선은 외형을 칼로 맞췄지만, 손에 익히는 건 페드릭의 몫이다.
“선물.”
거절하려던 페드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기에 군말 없이 받았다.
덜덜 떨리는 손과 달리 그의 눈은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이, 이렇게 귀한 걸… 정말, 죽을힘을 다해 요리하겠습니다.”
“그런 부담 주려고 한 건 아닌데. 뭐, 열심히 해봐.”
끼이익.
타이밍 좋게 방문이 열렸다.
이제 보내야 할 시간이다.
***
도현은 식탁 앞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조용한 집. 오늘따라 유난히 휑하게 느껴졌다.
술을 조금 마셔서 그런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몸은 너무나도 말짱했다.
그럼 모든 먹거리를 탈탈 털어 보낸 탓인가?
그건 다시 마트에 가서 사오면 된다.
아니면 오랜만에 진심으로 사용한 힘 때문에?
어차피 사용한 힘이라 해봤자 이미 채워질 정도로 미약한 수준이었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봤다.
제브라드인들이 드나드는 문.
귀찮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는 이들이라 챙겨주는 정도였는데, 오늘만큼은 마음이 뭔가 다르다.
‘페드릭.’
그 녀석이 다녀간 이후 계속 뭔가 허전하다.
“끽?”
식탁에서 한참 뻗어 자던 토토가 벌떡 일어나 도현을 멀뚱히 쳐다본다.
“잘 잤냐?”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에 살짝 호선이 그려졌다.
이럴 땐 펫도 나쁘지 않다.
빵빵하게 불렀던 토토의 배가 금세 홀쭉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크기가 좀 큰 것 같기도 하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다시 배고프다고 보채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요리라….”
지구로 돌아오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던 음식.
그 음식이 어느샌가 대접의 용도가 되고 호기심이 생겨 배워보고 싶은 것이 되었다.
그 와중에 나타난 패드릭 때문인지 취미 생활쯤으로 치부했던 요리가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왔다.
젬병이긴 젬병인데.
그래서 왠지 더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뭘까?
“까짓것 하면 되지.”
그래, 하면 된다.
검도 그랬고 마법도 그랬다.
힘들고 지치고 한때는 의미까지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해내지 않았나.
요리도 다를 바가 없다.
단지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르니 안 움직였을 뿐이다.
지금은 남는 게 시간이니.
시스템도 도와주는 판에야.
정 모르겠으면 엄마한테 달려가도 된다.
‘이러니 꼭 20대로 돌아간 것 같네.’
아, 나 20대였지?
혼자 킥킥대던 도현은 페드릭이 돌아가고 떴던 상태창을 다시 확인했다.
페드릭 카 블루울프.
31세 / 남
전 블루울프 용병단 단장(자살) → 블루드래곤 이오르의 유일한 제자(이오르 식당 분점 1호 사장)
능력치 [상세 보기+]
스킬 [상세보기+]
특이사항
블루드래곤 이오르의 맹약자.
이전에 다녀갔던 이들에 비해 무척이나 심심했다.
당연한 일이다. 도현이 한 것이라고는 물건을 챙겨주기만 했을 뿐이니까.
3시간 내도록 도현의 이름을 물어보던 페드릭에게 이오르에게 들으라며 보내버렸다. 하나같이 경악하는 얼굴에 질려서다.
둘 다 다른 의미로 경악할 모습이 그려지자 도현은 킥하고 웃었다.
“좋아할 이오르를 못 본다는 게 좀 아쉽네.”
분명 함박웃음을 지을 거다. 그리고 그 맛을 완벽하게 구현해내기 위해 한참을 고민하겠지.
그러라고 다양하게 보냈다. 3분 요리부터 냉동요리, 씨리얼, 젓갈, 김치, 된장, 고추장, 간장 등등.
말 그대로 모든 냉장고를 깨끗하게 비워 보냈다.
복도의 방 하나에 냉장고가 종류별로 가득 했었는데 그 냉장고들이 다 비어버렸으니 말 다 한 거다.
그리고 혹시나 모르니 집에 사둔 레시피 북을 보내며 한국어를 담은 아티팩트까지 첨부했다.
짧은 설명과 안부까지 편지로 붙였고.
요리 개발을 위해 한국어를 중얼거릴 이오르를 떠올리니 뭔가 이상했다.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의 외국인이 한국어 사투리를 해대는 모습이려나?”
TV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이쪽은 블루드래곤이다.
상상만 해도 너무 웃겨 배를 잡고 한참을 웃은 도현은 외출복을 걸치려다 시간을 확인하고 내려놓았다.
곧 자정을 넘기는 시간에 마트는 좀 그랬다.
“내일 가야겠다.”
그리고 엄마한테도 다녀와야 한다.
먹을 것도, 재료도 다 털어줬으니 다시 채워야지.
“또 한소리 듣겠네.”
이마를 작게 찡그린 도현은 머리 위에 앉은 토토를 소파에 내려놓고 TV를 틀어줬다.
“씻고 올 거니까 보고 있어.”
“낏낏!”
먹을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자신의 애정 채널인 먹방을 틀어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긴 하루가 끝났으니, 내일부터는 바짝 조이지 않더라도 괜찮을 거다.
헌터자격증도 있겠다, 학교도 큰 걱정 없었다.
“이제 골칫거리는 없나?”
쿠당탕, 퍼엉!
문제는 거실에서 터졌다.
“끼끼끼끽! 끼끼끼끽!”
“토토야?!”
놀라서 거실로 나가자 TV를 씹으며 퍼덕이는 토토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