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23. 진심 (3)
도현이 오랜만에 애검을 꺼내 시원하게 자르려고 할 때였다.
[도축 시스템을 이용하시겠습니까?]
“오?”
생각지도 않은 편의에 감탄이 나왔다.
이런 건 사양 않고 이용해줘야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바로 도축이 끝난 사체는 도축업자도 울고 갈 만큼 깔끔하게 분해되어 부위별로 정리되어 나타났다.
먹을 부위를 선별하고 나머지는 지퍼백에 담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5분도 안 돼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도현은 도축을 끝낸 고기를 싱크대에 올려두고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다듬었다.
“아. 꼬치가 있었나?”
즉흥적으로 생각한 메뉴라 도구가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흠….”
지금 나가서 사 오기에는 흥이 깨질 것 같다.
‘그냥 이대로 볶을까?’
꼬치에서 볶음으로 생각이 기울 때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재료를 확인합니다.
추천 메뉴 – 바비큐 꼬치
바비큐 꼬치를 제작하시겠습니까?
이런 기능도 있었다고?
오늘따라 시스템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응.”
바비큐 꼬치를 완성했습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한 뼘 길이의 꼬치 20개가 가지런히 도마 위에 놓여 있었다.
“허, 구워지기까지 해?”
막 불에서 꺼낸 것처럼 자글자글 거리는 소리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게 보였다.
탄 것도, 그렇다고 설익은 것도 아닌 노릇노릇하게 익어 황금빛이다.
겉면의 윤기에 위가 꼴린다.
미치겠다.
자신도 모르게 절로 손이 가려는데, 시스템 창이 시야를 가렸다.
빅카우엑스 꼬치
카리오카 뿌리를 꼬치로 사용. 빅카우엑스의 꽃등심과 과일, 채소가 함께 어우러진 꼬치.
카리오카 뿌리 특유의 향이 재료의 맛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빅모랄보어 꼬치
카리오카 뿌리를 꼬치로 사용. 빅모랄보어의 삼겹살과 과일, 채소가 함께 어우러진 꼬치.
카리오카 뿌리 특유의 향이 재료의 맛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히야―”
생각지도 않은 수확에 도현은 기쁨의 탄성이 나왔다.
시스템이 이렇게 마음에 들긴 처음이다.
잽싸게 접시 꺼내 꼬치를 담고 불을 끈 뒤 오뎅탕을 식탁에 세팅했다.
진간장과 식초, 설탕으로 간단한 소스까지 올린 뒤 맥주와 소주를 꺼내 유리잔에 1 대 1로 섞었다.
제일 맛있는 비율. 적당히 즐기기에 딱 좋다.
의자에 앉자마자 젓가락을 놀려 퉁퉁 불은 어묵 하나를 소스에 찍어 입에 넣었다.
뜨끈한 국물에 하아, 한 김 빼주고 씹자 진한 생선 특유의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지며 살캉살캉한 식감이 탄력적이게 느껴졌다. 짭조름한 어묵 맛에 절로 고개를 끄덕여진다.
이어서 우동스푼으로 국물을 떠 후르륵 마셨다.
“크으- 이 맛이지!”
소맥 한 잔까지 원샷 하자 아릿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을 농락했다.
이번엔 꼬치다.
다시 소맥을 말고 소냐 돼지냐의 고민을 하던 도현은 소를 택했다. 식으면 맛이 먼저 반감되는 게 소였기 때문이다.
맨 위에 꽂힌 파프리카를 씹었다.
구워진 탓에 첫 질감은 무른 느낌이었지만, 중간쯤 터져 나오는 파프리카의 특유의 달달한 즙과 아삭한 식감이 입맛을 돋았다.
곧바로 빅카우엑스의 꽃등심을 씹었다. 엄지 두께의 고기가 제법 두꺼울 법도 한데, 부드럽게 씹히며 육즙과 지방이 함께 어우러지며 하모니를 이룬다.
도현이 제일 좋아하는 레어 상태의 굽기였다.
꼬치로 사용된 카리오카 뿌리 때문일까?
허브를 가미한 것처럼 약간의 씁쓸하면서도 산뜻한 향이 모든 맛을 아우르며 입안을 깔끔하게 만든다.
“끝내준다!”
자르지도, 굽지도 않았음에도 이렇게 완성도 높은 요리라니.
이상하게도 요리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던 그였기에, 시스템에 대한 호감도가 팍팍 올라갔다.
세 번째로 하리오카 열매였다. 따자마자 먹었을 때도 정신없이 먹어치워 버렸는데, 익힌 건 어떤 맛일지 궁금증과 호기심이 증폭되었다.
살캉살캉.
익히기 전에는 단맛과 라임 향이 강한 여운을 남겼다면, 익힌 열매는 상큼함이 더 했다.
라임 향은 더욱 진해져 새콤달콤한 맛까지 어우러진다. 마치 밀당 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정신없이 꼬치 하나를 먹어치우는데 든 시간은 3분도 되지 않았다.
꿀꺽꿀꺽.
다시 소맥을 원샷 한 도현은 입안에 감도는 여운을 음미했다.
꿀꿀한 기분에 시작한 혼술이 생각보다 꽤 즐거운 시간으로 변했다.
“이젠 빅모랄보어 꼬치!”
잔뜩 기대감에 꼬치를 들었을 때였다.
“끼낏!”
워프에서 나오기 직전, 잠들며 소환 해제되었던 원숭이가 정수리 위로 툭 떨어지더니 도현의 몸을 타고 식탁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배고파서 깼냐?”
픽 웃은 도현은 손에 든 꼬치를 원숭이 눈앞에서 휘휘 흔들었다.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초록 눈동자가 홀린 듯 꼬치를 좇았다.
입가로 흐르는 침만 봐도 얼마나 먹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빈손으로 접시를 가져와 꼬치 하나를 올려 밀자 하나씩 빼서 양손으로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끼끼끼끽!”
몸을 부르르 떨며 팔딱팔딱 뛰어대는 폼이 영락없는 원숭이었다.
“어째 이런 게 펫이 돼서는.”
워프 속에서 이놈이 나왔을 때만 해도 얼마나 황당했는지, 아직도 그때 허탈감은 잊을 수 없었다.
적게 잡아도 만 개가 넘어갈 붉은 마나석이 모조리 타오르더니 알로 흡수될 건 뭐란 말인가.
그러고 태어난 게 이 원숭이였다.
거기에 이어진 시스템 알림까지.
태초의 장인 종족, [펫]돌원숭이(유일)를 획득하셨습니다!
돌원숭이는 대장장이의 신, 불카누스의 화신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불의 축복을 받습니다! 불을 자유자재로 다룹니다.
불 속성에 대해 100퍼센트 면역을 가집니다.
알에서 갓 태어났습니다. 도현님을 부모로 여깁니다.
호감도 MAX! 도현님의 어떠한 말이든 믿고 따릅니다. 부모로서 이름을 지어주세요!
성장 속도가 빠릅니다. (1,000%)
혹 떼려다 혹 붙은 상황은 마음에 안 들지만 이미 붙은 혹을 뗄…
“양도는 안 되려나?”
제 몸 하나도 귀찮은데 펫이 달가울 리가 없다.
“끼끼끽!”
열심히 꼬치를 먹어대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 항의를 해댔다.
붉은 털에 얼굴까지 붉어지니 토마토가 따로 없었다.
“말까지 알아듣나?”
팔짱을 끼고 고개까지 끄덕이는 녀석을 보고 도현은 허, 하고 웃었다.
“그러고 있으면 나머지 내가 다 먹는다?”
“끼낏! 끼낏낏!”
부리나케 앉아 다시 먹어대는 모습을 보고 도현은 피식 웃었다.
뭐, 이런 정도라면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러고 보니 이름을 지어주란 알림이 있었지?’
도현은 복스럽게 꼬치를 먹어치우는 녀석을 뜯어봤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앉아 먹은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빈 꼬치가 5개로 늘어났다.
붉은 털이 형광등 빛에 윤이 좔좔 흐른다. 적당히 풍성한 모량이 꼭 솜인형 같았다.
꼬치가 입에 맞는지 먹는 얼굴에 홍조까지 띠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야 인마, 이에 고기 다 꼈다.’
킥 웃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이름은 토토다.”
토마토라 하기엔 음식 이름을 붙이기 뭣하니 토토라고.
그렇게 단순하고 센스 없는 도현의 펫이 탄생했다.
그리고―
[펫]돌원숭이(유일)에서 [펫]토토(돌원숭이/유일)으로 변경됩니다.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였다. 하지만…
돌발 퀘스트 완료!
이 종족 방문자의 만족도 A 달성하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농장)이 주어졌습니다.
농장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돌발 퀘스트가 도발적이게 도현을 놀래켰다.
마시던 소맥을 마저 비운 도현은 어이없는 얼굴로 메시지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방문자가 그 방문자가 아니라고?’
아니, 방문자가 집으로 찾아오는 방문자에 한정된 게 아니라는 말이 맞았다.
“끽?”
가만히 있는 도현이 이상했는지 토토가 콩만 한 손으로 도현의 손을 잡았다.
가득 묻은 음식 잔해가 손에 느껴졌다. 어떻게 먹은 건지 토토의 몸 전체가 기름과 다양한 즙으로 번들거렸다.
“온몸으로 먹는구나.”
무슨 피부에 양보할 것도 아니고.
시원한 트림까지 해댄 토토의 볼을 툭툭 쳤다.
“청소.”
한마디로 토토의 몸과 자신의 손까지 깨끗하게 만들고 농장으로 이동했다.
농장 첫 방문을 환영합니다.
“생각 그대로의 농장이네.”
보상이 농장이라 할 때부터 예상했던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끝도 보이지 않는 황무지. 그 중앙에 도현이 서 있었다.
무엇이든 재배가 가능합니다.
농장 : 무럭무럭 성장(성장 속도 10배 증가)이 적용됩니다.
농장 : 타임아웃(현실 시간 흐름 정지)이 적용됩니다.
공기 속에 진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거기다 진 붉은빛을 띠는 거친 땅은 무엇을 심어도 전부 풍작이 될 것 같았다.
노농이 봤다면 눈이 뒤집혔을 그런 땅.
아무 생각 없는 도현에게 주어진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끽끽!”
도현의 어깨에 앉아있던 토토가 코딱지만 한 노란 덩어리를 도현의 손에 올렸다.
물방울 형태의 납작한 모양. 하리오카 열매의 씨였다.
아무래도 꼬치 재료를 다듬다 몇 개가 제거되지 않았나 보다.
“이걸 심자고?”
몸이 휘청일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토토를 보고 웃은 도현은 인벤토리에서 하리오카 열매 하나를 꺼냈다.
검지를 들어 열매 위에 가로, 세로로 긋고 다시 사선으로 교차하며 그었다.
쩍!
자로 맞춘 듯 8조각이 나버린 열매 중 한 조각을 잡은 토토가 입을 쩍 벌렸다.
“먹으려고? 이거 심으면 수십 개는 더 먹을 수 있는데?”
움찔.
토토는 손에 든 열매와 땅을 번갈아 보다 결국 땅으로 내려가 흙을 파고 열매 조각을 묻었다.
“끼낏!”
8번의 반복으로 땅 위에는 작은 흙더미들이 봉긋하게 솟았다.
삐뚤빼뚤, 간격도 엉망이었지만 뿌듯해하는 토토가 귀여워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토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뽁! 뽁뽁!
토토의 머리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토토가 심은 씨앗의 흙더미에서 죽순처럼 줄기가 삐죽 튀어나왔다.
눈을 깜빡이니 그 사이에 두 배로 자란 줄기에 넓은 잎이 달리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기지개를 켜듯 하늘로 쭉쭉 뻗어가던 줄기는 어느새 기둥처럼 단단하게 굵어졌다.
이리저리 뻗은 가지에 우산처럼 넓은 잎이 성장에 춤추듯 살랑살랑 흔들린다.
순식간에 꽃이 피고 꽃잎이 떨어지더니 탐스러운 열매가 맺혔다.
3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끼끼끽!”
주렁주렁 열린 하리오카 열매가 햇볕에 반사되어 싱그럽게 반짝였다.
신난 토토가 나무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며 제 몸보다 큰 열매 하나에 매달려 갉아 먹어댔다.
“성장 속도 10배라더니….”
나무통은 어림잡아도 성인 남자의 허리만큼 굵었다.
황무지였던 땅이 순식간에 숲… 아니, 과수원이 되다니.
나무 자체가 빠르게 자라는 종인 걸까?
워프 안에서 돔고블린의 무리를 덮었던 하리오카가 떠올랐다. 일반적인 나무였다면 제 아무리 몬스터라 해도 생활공간인 곳에 무턱대고 심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성장속도가 빠르단 소리인데—
“뭐, 어쨌든. 이제 걱정 없이 먹어도 되겠네.”
소소하게 100개 밖에 못 챙겨 아껴 먹을 생각이었던 도현은 이렇게 게속 먹게 되어 좋았다.
“그럼 돌아가서 혼술이나 마저 해야지.”
도현이 머릿속으로 나가기를 떠올리자 출입을 묻는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현실로 되돌아갑니다. 3,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