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22. 진심 (2)
“뭐 줄까? 여기 없지만 우동도 있어~”
“서서 먹어도 되죠?”
“그럼~ 앞 접시 줄게. 거기 종지 있으니까, 간장 덜어 먹어요~”
손바닥만한 플라스틱 흰 접시가 위생 비닐에 쌓여 도현 앞에 놓였다.
집게를 든 도현은 먼저 떡볶이를 덜었다. 튀김을 잡으려니 아주머니가 다른 접시를 내밀었다.
“여기 덜어봐, 내가 데파줄게.”
도현이 피식 웃었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데워준다는 부산 사투리.
친한 친구인 김민혁의 어머니가 부산분이셨던 탓에 알고 있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친구 놈들도 찾아봐야 하는데.’
까먹기도 했고 바쁘기도 하다 보니 계속 미뤄버렸다.
‘헌터증이 있으니 이번 주에 두 곳 다녀오고, 몇 달 쉬어야지.’
진정한 백수라이프를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은 도현은 입꼬리가 끝없이 승천했다.
“고맙습니다.”
그 사이 김밥 한 줄까지 주문한 도현의 앞에 두 접시가 늘어났다.
그리고 첫 접시의 떡볶이는 국물에 헤엄치듯 국물로 홍수가 날 것 같았다.
튀김과 김밥 때문에 늘어난 국물이었다.
‘먹어볼까.’
집게를 든 손이 진지했다. 떡을 집어 절반을 베어 물었다.
쫀득쫀득!
두툼하면서도 쫀득한 식감이 밀가루 떡이 아니라 쌀로 만든 떡인 걸 깨달았다.
적당히 퍼진 떡 사이로 스며든 양념이 떡과 적절하게 배합되어 식감과 맛을 극대화했다.
도현은 몇 번 씹지도 않고 나머지 떡을 입에 밀어 넣었다.
진한 어묵 국물의 맛과 향이 떡볶이 소스에서 느껴졌다.
짭조름하면서도 어묵 특유의 맛에 취해 순식간에 다섯 개의 떡을 해치웠다.
밀떡을 좀 더 선호하지만 이런 맛이라면 쌀떡도 좋았다.
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쫀득한 식감의 여운에 좀 더 먹고 싶지만…
“쩝.”
남은 접시의 먹거리들이 애처롭게 도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빛을 뽐내는 튀김을 과감하게 낚아챘다.
바사삭!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튀김 옷이 입안에서 바삭거리며 부서졌다.
고소한 기름 향에 이어 적당한 두께 감의 고구마가 진득한 단맛을 뽐냈다.
‘이건 사기다.’
한때 우스갯소리로 운동화를 튀겨도 맛있다는 말을 듣긴 했었는데, 이 정도라면 정말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입을 베어 먹은 고구마튀김을 떡볶이 소스에 찍어 전부 밀어 넣었다.
미친 조합이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떡만 먹을 때만 해도 거치적거렸던 당근 채와 무채가 함께 어우러지며 당도를 배로 높였다.
그런데도 단맛이 과하지 않다.
산뜻한 단맛이랄까.
‘설탕?’
아니, 설탕은 아닌 것 같다.
재료가 뭔지 생각에 빠졌을 때, 아주머니가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단맛 다르지? 채소랑 과일을 갈아 넣어서 그래.”
“과일요?”
이런 처음 듣는 말이었다.
“배 말이야. 근데 요즘 배가 비싸서. 워프에서 나오는 호호가 열매를 써. 배랑 똑같거든.”
새삼 세상 모든 것에 워프가 녹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맛있네요.”
새로운 방법을 깨달은 도현은 조용히 튀김과 김밥을 비워갔다.
뒤를 이어 순대 2인분과 어묵으로 물떡, 곤약 꼬치를 먹고 입가심으로 우동까지 한 그릇 말았다.
“잘 먹었습니다.”
간단히 먹고 가려고 했던 생각과 달리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말았다.
과식이 아닌 게 어디인가.
“아이고야, 총각 배 안 터졌어?”
도현 앞은 접시와 꼬치, 그릇들이 어수선했다.
7명이 먹어도 많았을 잔해를 보고 아주머니도 놀란 기색이었다.
“아주머니 얼마죠?”
“3만 원만 줘. 뒷자리는 서비스야.”
엄청나게 먹었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너무 저렴한 가격에 도현은 두 번 놀라고 말았다.
“너무 저렴하게 판매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거 같지? 그래도 욕심 안 부리면 괜찮아. 그 덕인지 단골도 좀 있고.”
뿌듯해하는 아주머니를 보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이런 기분 참 좋네.’
도현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넸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엄마, 나 왔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가려던 도현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손님 계셨… 어?”
흙투성이인 몸을 장갑으로 털고 들어오는 사내.
피부가 검게 탔지만 그 덩치와 목소리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도현의 눈이 아련한 반가움을 담았다.
“오랜만이다 민혁아.”
“우도현?”
500년 만에 죽마고우와 재회했다.
***
도현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멍하니 소파에 널브러졌다.
분식 포장마차에서 만난 친우는 기억 속 친우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졸업식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엄마는 입원 중이었고.’
사업으로 바쁜 아버지와 지병으로 병원에 살다시피 하는 어머니를 둔 김민혁은 환경 때문인지 철이 빨리 들었었다.
‘차에서 번개탄과 유서가 발견됐다더라. 미안하다고. 짐 남겨두고 가서 미안하다고. 아버지 이름으로 빚이 50억이였어.’
장례도 쉽지 않았단다. 조문객보다 빚쟁이들이 더 많아서 3일장도 못 치르고 발인을 서둘렀을 정도로.
‘그렇게 정신없이 일주일이 지나고 보니까 각성했더라.’
모자가 함께 각성했단다. 아주머니는 5등급 민혁이는 7등급.
각성으로 아주머니의 지병은 깔끔히 나았고, 민혁이도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그런데 삶이란 게 참 쉽지 않더라. 상속 포기한 아버지 빚이 포기가 안 된대.’
각성자 5등급. 그게 발목을 잡았다.
6등급까지는 국가대표 수준이라면 5등급부터는 워프 한 번 출입 할 때마다 억 소리 나게 벌 수 있으니까.
‘엄만 아팠던 몸이라서인지 5등급 턱걸이였어. 게다가 능력도 헌터와 전혀 무관했고.’
발현한 능력은 ‘분식 맛내기’라고 했다. 민혁이가 분식을 좋아했는데, 지병으로 맛을 못 느꼈고 그래서 해주지 못한 마음에 그쪽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결과가 나왔단다.
‘그래도 괜찮아. 희망은 있으니까.’
생각보다 매출은 꾸준히 늘어서 10억 정도를 탕감했다고.
최악의 소식은 아니었다. 단지…
‘…이 등급으로 할 수 있는 게 막노동뿐이라서 하하.’
멋쩍게 웃는 민혁의 얼굴을 보며 도현은 친우를 만났다는 기쁨보단 답답함에 한숨이 나왔다.
학생 때만 해도 뭐라도 될 거라 생각했던 녀석인데.
서글서글한 얼굴에 성격도 좋았다. 얼굴까지 반반해 근처 학교까지 소문이 파다했던 녀석이었다.
같은 나이임에도 형 같았던 친구.
그래서일까 도현은 더 마음이 착잡했다.
고3이 되고 본격적으로 가상게임에 빠지면서 친구들을 등한시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힘이 되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새삼 어렸던 자신에게 화가 나긴 오랜만이다.
‘늦었지만 아저씨, 아주머니께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라. 장례… 못 치를 뻔했던 거 도와주셨거든.’
도현은 의아했다.
분명 엄마는 모른다고 했는데?
‘친구니까 알아서 결정하라는 건가?’
결정할 사람은 자신이니, 그런 걸까.
“하아.”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민혁을 도와주는 건 도현에겐 별일이 아니었다.
썩어 넘치는 게 돈이었고, 인벤토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전부 외우지 못할 정도로 가득했다.
그중 몇 가지만 사용해도 민혁의 등급을 차도식과 동급으로 순식간에 올려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씁쓸하게 타인의 이야기처럼 읊조리던 녀석의 모습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제브라드에 떨어지기 전, 평범한 고등학생일 때의 도현은 세상 물정 모르고 불만만 가득한 도련님이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임혜정은 도현을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시켰고, 세상을 배울 줄 알았던 도현은 오히려 친구들과 어울리며 소소한 사고를 치고 다녔었다.
그걸 고쳐주며 친구로 남아준 녀석 중 하나가 김민혁이다.
“선택은 녀석한테 맡기자.”
어떻게 됐든 베풀어 줄 수 있는 게 어딘가.
“그러고 보니 강한이랑 근석이는 어떻게 지내는 거지?”
민혁이와도 연락이 끊겼다니, 어디서부터 알아본다?
꼬르륵.
기지개를 한껏 켜던 도현은 먹을 걸 달라는 위장 소리에 입맛을 다셨다.
분식을 먹고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지.
시간을 확인하니 8시가 다 되어가간다.
먹은 게 4시가 다 되어서였으니 고플 만하네.
“뭐 먹지?”
기분도 영 구리니, 밥이 안 당긴다.
“혼술이나 할까.”
이런 날엔 한잔해줘야 할 것 같다.
메뉴는―
“안줏거리로 오뎅탕이랑 꼬치가 낫겠네.”
워프에서 구했던 재료들이 생각났다.
희한하게도 생산워프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식용이 가능했다.
일반적인 육류들보다 더 맛이 좋다. 워프에서 나온 고기라서인지 자주 먹어주면 젊어진다는 속설도 생겨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때문에 고가로 거래되며 나오는 즉시 다 팔려버리니 일반인들은 출혈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고급음식이지만, 헌터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먹거리 중 하나였다.
도현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를 뒤져 모둠 어묵과 대파, 양파, 무, 다진 마늘, 그리고 멸치와 건새우, 가다랑어포가 든 국물 우림용 다시 팩 하나를 꺼냈다.
도마 위에 올린 어묵을 한입 크기의 절반으로 잘랐다. 대파는 흰부분 2/3, 푸른 잎 1/3 양을 어슷썰기하고, 양파는 약간 두껍게 채를 썰었다.
무는 엄지 한마디 크기로 깍뚝 썰고, 다진 마늘은 밥숟갈 절반 정도로 준비했다.
이제 순서대로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
4, 5인용의 궁중 팬을 꺼내 절반하고도 새끼손가락 한마디 높이로 물을 받아 끓인다.
다시 팩을 넣고 썰어둔 무와 어묵을 투하했다.
불린 어묵을 선호하는 도현만의 레시피였다.
15분쯤 지났을까, 슬슬 불기 시작한 어묵을 보고 다진 마늘을 넣어 휘적휘적 저어주었다.
곧바로 대파와 양파를 넣어 3분 뒤 약불로 낮추며 뚜껑을 닫았다.
이제 할 일은 진국이 우러나며 어묵이 불기만 기다리면 된다.
“이제 꼬치를 준비해보실까.”
도현은 양손을 비비며 눈을 반짝였다.
그가 생각한 꼬치는 빅카우엑스의 고기와 빅모랄보어의 고기, 그리고 따끈따끈한 하리오카 열매가 메인이다.
거기에 파프리카와 떡, 파인애플을 함께 꽂아 구워준다면…
꼴깍.
생각만 해도 군침이 입안 가득 흘렀다.
행동이 빨라졌다. 주방과 거실 사이 작은 복도로 나갔다.
쭉 뻗은 복도 왼쪽에는 새시 넘어 옥상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방문 두 개가 나란히, 마지막 복도 끝에도 문 하나가 보였다.
드르륵.
도현은 새시를 열고 옥상으로 나갔다.
투룸 하나는 지을 정도로 넓은 옥상을 넘어 도심 속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
“서둘러야지.”
옥상으로 나온 이유는 몬스터 사체를 도축하기 위해서였다.
빅카우엑스와 빅모랄보어를 잡은 지 시간이 좀 지나버렸지만, 상관없다. 인벤토리에 들어가면 모든 게 넣기 직전의 상태로 보존되니 말이다.
“안심이 좋을까, 등심이 좋을까? 아니, 채끝… 부챗살이나 꽃등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인벤토리에서 빅카우엑스의 사체를 꺼냈다.
5미터의 거대한 소 한 마리가 육중한 소리를 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