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8화 (18/200)

# 18

18.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2)

김승재와 시민형이 들뜬 얼굴로 환호했다.

“우오오오! 반갑습니다!”

관심 없는 도현만 몰랐지, 그녀는 4급 헌터이면서 워프연구소 1팀의 소장으로, 워프연구라는 분야를 개척한 위인으로 유명했다.

“……?”

도현은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고창하가 빤히 쳐다보는 눈으로 물었다.

‘도대체 네 정체가 뭐야?’

그저 전화를 받았을 뿐, 그 외에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지만 딱히 변명하지 않으니 오해가 쌓여만 갔다.

‘그렇다고 오해를 풀 생각도 없지만.’

어깨를 으쓱인 도현은 주변의 나무들을 살폈다.

워프의 이름이기도 한 나무의 열매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하리오카 열매.

브리핑 때 들었듯, 멜론처럼 빵빵한 참외라는 말에 어이없었지만,

‘진짜 그렇게 생겼잖아?’

헛웃음을 흘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적절한 설명은 없다고.

이래 봬도 달고 맛있단다. 거기다 피로회복에도 좋고 미용에 탁월하다고.

듣기만 했을 땐 심드렁했지만, 열매를 확인하자 자신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나중에 하나 먹어 봐야지.’

입맛을 쩝 다신 도현은 박수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둠고블린을 정리하러 간다.”

차도식이 행선지를 알리며 몸을 돌렸다.

본격적인 워프 탐험이 시작되었다.

목적지는 동쪽 둠고블린 무리.

하리오카 과수원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차도식과 하지현이 선두로, 주팀장과 진박사가 끝을 맡고 학생들과 도현이 중앙에서 걸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떠들던 김승재와 이민준도 긴장한 탓인지 입을 닫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하리오카 열매가 둠고블린의 주식이라서일까, 무리까지 이어지는 길은 생각보다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쪽 우도현 학생 맞습니까?”

생각 없이 걷던 도현 옆으로 진박사가 다가왔다.

“그런데요.”

“잘 부탁합니다.”

한참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그렇게 고개를 까딱이고 뒤로 돌아갔다.

뭔가 몹시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아, 모르겠다.’

정 안되면 튀어버리면 된다. 마음먹고 튀면 그 누구도 그를 못 찾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20분 정도 걸었을까, 숲이 끝나고 드넓은 초록 평야가 시원하게 보였다.

차도식은 저 멀리 둠고블린 무리를 살폈다.

여기서 300미터의 거리. 마나를 끌어 올려 눈에 집중하면 둠고블린의 눈코입도 볼 수 있었다.

풀과 나뭇가지로 엮은 익숙한 울타리가 보였다. 3미터의 긴 울타리를 넘어 봉긋한 끝부분만 보이는 움집들이 드문드문 눈에 띠었다.

그 사이마다 하리오카 나무들이 넓은 잎을 뽐내며 솟아있었다.

적어도 20미터는 될 크기. 울타리와 움막들이 보이지 않았다면 또 다른 과수원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둠고블린 무리에 하리오카 나무가 있었나?’

상태를 살피던 두 헌터는 진지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고개를 끄덕인 차도식이 뒤에서 대기한 인원에게 말했다.

“모두 여기서 대기한다. 주팀장님.”

살짝 긴장한 주팀장의 시선에 차도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팀장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투명한 큐브를 손바닥에 올리고 마력을 주입했다.

차자자작!

주팀장을 중심으로 10미터 크기의 유리창이 두 헌터를 제외한 인원을 감쌌다.

정육면체, 은어로 각얼음이라 불리는 이 아이템은 최고급 보호막으로 쉽게 쓰기 힘든 비싼 소모품이었다.

“나와 하헌터가 정찰하고 오겠다. 그동안 주팀장님과 진박사님을 중심으로 여기서 대기한다.”

말을 마치자마자 두 사람은 둠고블린의 무리로 향했다.

“기다리는 동안 워프탐사를 하겠습니다.”

긴장으로 곤두서려는 분위기가 진박사의 말에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설명 없이 땅 위로 손바닥을 펼치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잡초들이 무성한 땅이 꿀렁거리더니 30센티미터도 안 될 흙인형이 솟아났다.

그녀의 힘인 땅의 정령이었다.

“파트너 흐기에요. 얘가 탐사를 도와줄 겁니다.”

“저, 정령!”

“뭐, 귀엽네.”

학생들 사이에서 이민준과 시민형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령을 부를 수 있는 각성자는 꽤 귀한 편이다. 그중에서도 헌터로 등록된 각성자는 채 100명이 되지 않았다.

진박사는 주변의 말을 무시하고 정령에게 부탁했다.

“주변 탐사 좀 도와줘.”

고개를 끄덕인 흙 정령은 다시 허물어졌다. 진박사는 바닥에 편하게 앉아 양 손바닥을 지면에 댔다.

조용히 눈을 감고 정령이 보내는 정보를 차근차근 훑기 시작했다.

신기하다는 둥, 멋지다는 둥의 호들갑이 학생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나오며 부산스러워졌다.

‘분위기가 밝아서 좋긴 하지만.’

두 헌터가 자리를 비운 뒤로 주팀장의 얼굴은 걱정이 가득했다.

두 헌터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였다.

여태 함께한 시간이 얼마던가. 눈빛만 봐도 어떤 상황인지 맞출 정도다.

‘최소한 한 명이라도 더 데려왔어야 했나….’

비록 자신이 5등급 헌터지만 그가 감지하기로 울타리 너머에는 단 두 개의 기척만 읽혔다.

차도식과 하지현. 도착했을 때부터 무리에서 둠고블린 몬스터의 기척은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학생들을 제외하면 제일 낮은 등급의 자신도 느꼈으니, 먼저 눈치 챈 진박사가 탐사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면 분위기는 경직을 넘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거다.

‘그러다 몬스터라도 나타난다면….’

4등급 1주기. 네임드가 아니더라도 일반 몬스터까지 강해지니, 진박사와 자신이 맡는다 한들 전멸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괜스레 주 팀장의 시선이 도현에게 향했다.

세상사에 흥미 없는, 득도한 수도승의 얼굴. 그 얼굴을 보자 언제 긴장을 했냐는 듯 안정을 되찾았다.

‘어쩔 수 없지.’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철판을 깔고서라도 적극적으로 부탁하는 수밖에.

절대 일어나지 않길 바라지만, 혹시나 모를 위험엔 도현만큼 든든한 보험은 없었다.

도현은 팔짱을 낀 채 두 헌터가 들어간 둠고블린 무리를 보고 있었다.

트레이드마크 같은 심드렁한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리포트 위크, 5명이 분담하여 워프 수급부터, 탐사, 정보 취합, 발표를 맡는다.

거기서 도현의 역할은 워프 수급.

의도치 않게 최상급 헌터와 인솔자까지 나타나면서 초특급 관광버스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도현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그러니 편한 마음으로 구경하는 도현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였다.

“저쪽보단 이쪽이 문제겠는데.”

뜬금없는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도현을 향했다.

도현은 지나온 숲길을 보고 있었다.

눈빛들이 ‘왜?’라고 묻기 직전에 익숙하지만 그래서 의아한 소리가 들렸다.

사락사락.

나뭇가지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릴 만큼 세찬 바람이 불었다면 말이다.

“……!”

투두둑! 쯔아아악!

익숙해진 하리오카 열매가 길바닥에 나뒹굴며 터졌다. 그 뒤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뿌리가 다리라도 된 것 마냥 하리오카 나무 한 그루가 다가온 것이다.

“으으으!”

놀란 학생들이 억누른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 성인 다리 굵기의 나뭇가지가 보호막 위로 떨어졌다.

카아앙!

금방이라 바스라 질 것 같던 보호막이 파르르 떨며 나무를 팅겨냈다.

쿠오오오!

몇 걸음 물러난 하리오카 나무가 격분하며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나무가 몬스터…?’

충격으로 진 박사의 눈동자는 갈 길을 잃고 흔들렸다.

정령의 경고에 눈을 뜨자마자 그녀가 본 건 방어막 위로 떨어지는 하리오카 나뭇가지였다.

“정말 하리오카가….”

아직도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눈 씻고 봐도 하리오카가 맞았다.

“이게 1주기 변화라고…?”

그녀는 공포에 몸을 떨며 현실을 부정하듯 중얼거렸다.

그저 열매만 맺던 나무가 몬스터가 되는 사상 초유의 이벤트는 세상이 바뀌고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쿠와아아아!

멀리서 괴성이 들렸다. 쿵쿵쿵, 땅이 울리자마자 나타난 두 번째 하리오카 나무가 굵은 나뭇가지로 보호막을 내려쳤다.

쾅, 쾅, 쾅!

시야는 온통 나뭇가지와 비처럼 떨어지는 나뭇잎에 막혔다.

그 사이로 언뜻 나무의 몸통이 보였다. 쥐어 뜯어버린 것 같은 눈과 입이 보호막을 내려칠 때마다 시시각각 위로 솟았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워프 경험이 있는 주 팀장과 진 박사는 등을 타고 오르는 소름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등급의 차이가 심할수록 느끼는 공포는 몇 배씩 차이 났다. 7급 햇병아리들이 겪어야 할 두려움은 최소한 5배.

그럼에도 입술을 꾹 다문 채 신음했지만, 정신을 놓지 않은 것만으로도 칭찬할 일이었다.

쩌적!

“……!”

큐브실드에 벼락처럼 금이 생겼다.

“주 팀장님!”

당황한 진 박사가 주 팀장을 향해 소리쳤다.

주팀장의 다급한 시선이 도현을 향했다.

“도련님!”

와장창!

사라지는 보호막 사이로 커다란 나뭇가지가 떨어졌다.

“이렇게 허술해서야.”

짜증 섞인 말과 달리 도현은 손가락을 튕겼다.

펑! 펑!

풍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가 폭발하며 파편이 나뭇잎과 함께 흩날렸다.

“우, 도현…?”

도현 옆에 몸을 움츠리고 있던 고창하가 넋을 놓고 도현을 바라봤다. 그 얼굴은 차갑고 진중함이 빠진 딱 그 나이 때 같았다.

‘차라리 저런 얼굴이 나은데.’

상황을 잠깐 잊은 도현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하려던 때, 도현 앞으로 진 박사가 불쑥 튀어나왔다.

“너… 뭐야?!”

“진 박사님!”

주 팀장의 만류에도 그녀는 도현의 멱살을 잡았다. 피로에 찌든 얼굴이 당황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손가락만 튕겨서…! 어떻게… 그건 협회 회장님도… 못하는 기술이라고!”

딱딱한 말투가 흥분으로 바뀌었다.

도현은 귀찮음에 입을 닫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도현을 불만스럽게 빤히 보다 얼굴을 붉혔다.

“너, 내 거 할래?”

“미쳤습니까?”

“진 박사님!”

주 팀장이 경기를 일으키며 진박사를 잡아뗐다. 그녀는 순순히 물러나며 음침하게 웃었다.

뭔가 찜찜하더니 이건 찜찜함을 넘어 미친 여자가 아닌가.

도현은 불쾌감이 가득한 손짓으로 주름진 티셔츠를 폈다.

미친 여자를 만난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당황했다.

무엇보다… 기분이 더러웠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쩔쩔매며 사과하는 주 팀장을 보고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주 팀장의 얼굴만 봐도 당황한 게, 저런 성격인 걸 라이브로 알게 된 듯했다.

어쨌든, 저 여자와 빨리 떨어지는 방법은 두 헌터의 복귀 시간과 워프 정리가 우선이었다.

도현은 윙크를 하며 추파를 던지는 진 박사를 외면하고 자신의 눈치만 보고 있는 주 팀장을 향해 물었다.

“기다립니까, 무리로 갈 겁니까?”

“무리 쪽은 괜찮은 겁니까?”

도현은 사실대로 말했다.

“뭐, 두 사람이라면. 그런데 이쪽이 합류하면 곤란할지도.”

“그럼….”

“아니요, 귀찮습니다.”

의중을 먼저 읽은 도현이 거절하자 주 팀장이 진중하게 패를 보였다.

“다 드리겠습니다!”

잡은 몬스터에 대한 소유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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