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7화 (17/200)

# 17

17.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1)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던 도현은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얼굴을 돌렸다.

거기엔 망연자실한 두 학생과 시크한지 시큰둥한지 모를 멀대 하나, 그 뒤에 붙어 훔쳐보는 바가지머리의 매미 하나가 도현을 보고 있었다.

웃는지 우는지 모호한 얼굴로 김승재가 다시 물었다.

“진짜 그만둘 거 아니지? 아닐 거야, 그러면 안 된다고! 넌 우리의 보… 웁!”

“야, 때려 친다는데 휴학이겠냐? 자퇴지 자퇴, 가 아니라! 우리 같은 조인데 빠지면 안 되지! 리포트위크라고!”

이민준이 김승재의 입을 막고 뒤로 밀어버리며 도현에게 애원했다.

심기불편한 도현이 인상을 구겼다.

“뭐야?”

“리포트위크. 조별 리포트 때문이지. 5인 1조인데 마지막 조원이 너거든.”

고창하 특유의 사무적인 말투로 설명했다.

도현의 자리까지 오면서 넷은 많은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출석만 하고 잠만 자는 동기. 그렇지만 집도 빵빵하고, 현장실습서를 내고 멀쩡하게 돌아온 것만 해도 실력이 있다는 보물.

그런 보물이 하필 오늘은 고민이 많아 보이니 넷은 불안에 떨었다.

설마 시작하기도 전에 도현이 학교를 떼려칠까 봐. 봉이 달아나는 건 둘째 치고 인원 충당도 되지 않는 살인적인 레포트 위크라서 더 문제였다.

긴장한 네 쌍의 시선을 받은 도현은 손을 휘휘 저으며 거절할 생각이었다.

엄마만 안 떠올랐으면 말이다.

‘분명 전부 보고 받고 있겠지?’

막대한 기부금, 4년 치 학비 전부 완납.

이사장까지 구워삶아 돈독한 사이라고 아빠가 슬쩍 말해줬으니 조용히, 무난하게 졸업은 해야 했다.

아니면 평생 독립은 없다 했으니까.

‘차라리 요리가 나을지도.’

울며 겨자 먹기에 가까운 선택이지만 이건 그나마 관심 부류 아닌가.

‘전과나 해달라 해볼까.’

곧 한 학기가 끝나니, 그때 가서 요리 관런 학과로 전과를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다.

예식장에서 노발대발했었지만, 끌려다니며 정신적 피로까지 받느니 타협점을 찾아 볼 심산이었다.

‘그건 그렇고 리포트 위크?’

커넥트 창 때문에 교수의 말을 흘려들은 도현이 넷을 향해 되물었다.

“리포트 위크가 뭔데?”

“워프탐사.”

“워프에 들어가서 워프 생태계를 조사하는 거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환경인지, 동식물, 몬스터 전부!”

고창하의 단답과 달리 신이 난 듯 김승재가 설명했다.

“빽 있으면 부탁해도 된댔어.”

“야, 이민준!”

너무 적나라한 말에 김승재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 어때? 너도 아까 그랬잖아?”

김승재가 소리를 지르려던 차에 고창하가 둘을 떨어뜨리고 말했다.

“좀 웃긴 상황이 되긴 했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매달리는 건 아니고 조 편성이 이러니까 의견 들으러 온 거야.”

“조사할 워프도 골라야 하고, 리포트 분담도 해야 하니까.”

고창하 뒤에서 얼굴만 삐죽 내민 시민형도 한마디 거들었다.

“7등급 워프는 너무 기초적이라 못 가. 보통 5, 6등급 워프에 가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 그래서 나온 편법이 있어.”

“그게 생산워프지. 생산워프는 7등급이 제일 많거든? 근데 졸라 넓어서 탐사 시간만 일주일은 걸려. 결국 100퍼센트 탐사는 무리야.”

“게다가 전국구거든. 아마 2, 3일 뒤면 입장도 못 해.”

고창하 양옆에 선 김승재와 이민준이 보충 설명했다.

이해한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던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이 시간에 전화 올 사람이….’

리포트 소식을 들은 엄마의 전화인가 싶어 확인했더니 하지현이었다.

“어, 왜?”

(워프 탐사 리포트 떴다며?)

“어.”

뭐지, 모를 위화감은…?

엄마에 이어 여동생까지 알고 있다니?

(도와줄게, 워프는 정했어?)

“아니.”

(그럼 괜찮은 워프 있는데, 4등급 정도야. 어때?)

“…….”

여기서 더 물어봤자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시선들.

통화를 시작했을 때부터 느껴지던 시선이 이젠 강의장 전체로 번졌다.

다들 각성자이다보니 통화 내용을 엿듣는 것 정도는 숨 쉬는 것만큼 쉽다.

뒷배경이나 현장실습을 다녀온 게 아니었다면 학생들에게 워프셔틀이라도 당했을 분위기였다.

‘참나 왕따도 아니고.’

피식 웃은 도현은 다시 ‘어’라고 대답했다.

(그럼 내일 보자, 모일 곳은 큰아빠 회사 앞 오전 7시! 내일 봐!)

휴대폰을 내려놓자 기대에 찬 4명의 시선이 상대방이 누군지 묻고 있었다.

“들었지? 오전 7시, 블랙홀 앞.”

4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원했던 답이 아닌지 실망한 기색이었다. 어수선했던 강의실도 웬일인지 조용했다.

김승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기… 여자던데 누구야?”

‘목소리만 들어서는 모르는가?’

도현은 모르지만 블랙홀에 전속 헌터는 10명이지만 거래하는 헌터는 100명이 넘어갔다.

“하지현. 뭐, 랭크 2위라고 하던….”

“하지현?!”

“시팔, 존나 부럽다!”

도현의 한마디에 강의실이 시장통이 되었다.

***

다음날 모두가 모여 간 곳은 상도근린공원이 있는 국사봉이었다.

도심 속 뒷동산인 이곳에 워프가 생겨난 건 1년 전쯤.

“그러니까, 오늘이 1주기이란 말이지.”

차도식이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브리핑 중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1주기에는 이 몸 혼자서도 가능해.”

“역시 헌터의 정점! 차도식 헌터님이십니다!”

“3급 헌터! 최고의 헌터! 차도식 헌터님!”

자신감 가득한 말에 하지현과 이번에도 함께 하게 된 주팀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눈을 반짝이는 4명… 아니, 2명의 학생이 분위기를 띄우는 통에 제지도 못했다.

이런 호응이야 말로, 차도식의 존재의 이유라고 자신이 떠들어 대니 말이다.

오죽하면 별명이 공식 관종이겠는가.

“굳이 이 시기에 오자고 한 이유가 뭔지―”

도현은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삐딱하게 중얼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하지현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야, 특수 던전이니까.”

“헉, 특수던전!”

“생산워프의 특수던전이라니이이이!”

김승재와 이민준이 호들갑을 떨며 두 헌터를 찬양했다. 호들갑의 끝은 이런 배경을 가진 도현을 향했지만, 당사자는 떨떠름했다.

“적당히 안 되나.”

그런 도현만큼 반갑지 않은 시민형이 툴툴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 되든 말든 시민형도 도현만큼이나 주변보단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려 할 때 고창하가 손을 살짝 들었다.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1주기면 들어가는 것도 위험할 텐데요.”

“그건 여기 주나근팀장님이 알아서 해주실 거야.”

1주기로 강해진 몬스터들은 차도식과 하지현이 정리하며 리포트에 필요한 정보는 제공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이번 워프는 하리오카 과수원, 본래라면 여물 시기는 아니지만 1주기와 겹쳐서 최상급 하리오카도 맛볼 수 있다. 물론 이것도 리포트 제출 가능하다.”

“아싸, 가산점!”

이번엔 김승재보다 엉덩이가 덜 가벼운 이민준이 환호했다.

“고창하 학생 말처럼 그만큼 위험하다. 조사했겠지만, 하리오카는 둠고블린의 주식이기도 하다.”

대게 생산워프에는 생산과 관련된 몬스터들이 필수적으로 함께 딸려 왔다.

주기에 들어선 생산워프는 품질이 올라가는 반면 몬스터들도 강해진다. 대게 1주기에는 이름을 부여받은 몬스터, 네임드가 나오며 2주기에는 몬스터들의 왕이 나오는 게 그 예였다.

“브리핑은 이 정도로 하고, 질문 있습니까?”

워프 탐사와 지형, 생태계 조사. 거기에 필요한 마나석 기반의 전자기기도 블랙홀에서 무상 대여해주었다.

거기다 헌터가 학생들을 인솔하는 형태이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그럼 물품을 한 번만 더 점검하고 입장하겠습니다.”

각기 가방이나 인벤토리를 확인하는 동안 도현은 간이용 회의 텐트 밖의 워프 입구인 조각난 달을 슬쩍 확인했다.

초록색이라지만 푸른색이 섞여 빛을 발하는 모습이 무척 몽환적이다. 그리고 조각난 비스킷처럼 불균형한 외형이 여태 봤던 워프 중에서 가장 작고 특이했다.

‘2미터는 되려나?’

도현이 하지현에게 들은 바로는 워프 입구가 작으면 작을수록 워프 세계는 넓어진다 했다.

‘과수원이랬으니 꽤 넓겠지.’

설마, 벼만 있던 무한평야보다 넓을까.

그사이 점검이 끝나고 텐트를 정리했을 때, 멀리서 차도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차 헌터님! 하 헌터님! 주 팀장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리가 안 된 긴 머리에 진한 다크써클이 음침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흰 가운을 걸친 여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 뒤로 남녀 5명이 병아리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진박사님.”

하지현이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4등급 워프, 하리오카 과수원에 입장하셨습니다]

저번 주 매일 한 번씩 들었던 알림이 머릿속에 울렸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일까, 아침부터 떨떠름한 마음이 영 펴지질 않았다.

도현은 조금 익숙해진 워프의 마나가 오늘따라 묘하게 느껴졌다.

이전까지는 제브라드를 추억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제브라드의 어느 땅을 밟고 선 느낌이랄까.

‘커넥트 때문인가?’

괜한 일을 벌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있다 뒤통수 맞는 건 사양이다.

그러니 추방당한 몸은 꼼수를 쓰는 수밖에.

그것도 안 한다면 방문자니 뭐니 시스템 때문에 제브라드인들의 뒤치다꺼리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시스템상 더 높은 난이도를 요구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안락했던 자신만의 보금자리가 시끌벅적한 음식점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치닫자, 도현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거 아무래도 코가 꿰인 것 같은데.’

그래도 정보처와 커넥트 시스템을 얻었으니 나쁘지는 않달까.

미간을 좁히며 방문자를 생각하던 도현은 습하고 더운 공기에 주변을 훑었다.

‘과수원이라더니 공기가 왜 이래?’

한증막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빌라 한 채 높이에 성인 3명이 손잡고 빙 두르면 나올 두께의 나무.

크기에 맞게 파라솔처럼 무식하게 넓은 잎이 하늘을 가렸지만, 쨍한 햇살을 다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 시원한 맥주 한 캔 했으면 딱딱인데.’

도현이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옆에서 휘파람이 들렸다.

“이게 전부 하리오카야?”

“우와, 쩌, 쩐다! 이게 대체 얼마야?”

김승재와 이민준이었다.

초등학생에게서나 볼 법한 호들갑에 도현은 혀를 차려다 이들의 나이가 20살이라는 걸 깨달았다.

‘좋을 때다.’

그런 늙은이 생각이 끝날 때쯤, 차도식이 시선을 모았다.

“1주기에 들어선 워프다. 브리핑 때도 말했지만, 지식은 잊고 무조건 리더인 내 말을 우선으로 한다. 그리고 늦었지만, 워프 탐사를 도와주실 분을 소개하겠다. 진박사님.”

입장 직전 합류한 진미경이 차도식 옆에 섰다.

“진미경입니다. 오늘 워프 1주기 연구, 탐사를 위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편히 진박사라 불러주세요.”

여자치고는 낮고 딱딱한 목소리.

대충 틀어 올려 볼펜으로 고정시킨 머리에 진한 다크써클이 인상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