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14. 쓸데없다 (2)
그라드는 오른쪽 팔뚝이 불에 덴 듯 뜨거운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몸이 바르르 떨렸다. 본능적으로 발버둥 치려 했지만, 약자의 힘도 마법도 이 암살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단도의 등의 톱날이 그라드의 뼈를 톱질하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라드는 처음 겪는 고통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끄아아악!”
“낄낄낄.”
미치광이처럼 웃는 목소리에 온몸이 푸들푸들 떨렸지만, 그라드는 입술을 꽉 씹고 정신을 다잡았다.
‘이… 이대로는 둘 다 죽는다!’
자신이 죽더라도 스승님은 살려야 했다. 자신을 키워주고 가르쳐주신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라드는 품에 안긴 스승을 발로 멀리 밀치며 속으로 조력자라는 사람에게 부탁했다.
‘스…스승님을 부탁합니다!’
도와주길 바라며 그라드는 부릅뜬 눈으로 미치광이 엑마의 눈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마력을 쏟아 붓는다. 생명을 불태워서라도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시야는 붉게 물든 단도로 가득 찼다.
도현이 말했다.
“그만.”
그 한마디에 단도가 그라드 눈앞에서 뚝 멈췄다.
“……?”
당황한 엑마가 단도를 잡아당겼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단도가 박힌 듯, 아무리 힘을 주고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익!”
시뻘게진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홱 돌아간 고개가 도현을 향하며 진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 쥐새끼가?”
엑마는 단도를 놓고 두 번째 무기인 송곳을 들고 도현을 향해 찔렀다.
도현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향하는 송곳을 잡아챘다.
“헉!”
‘가, 강자다!’
엑마는 다급하게 무기를 버리고 몸을 빼려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허공에 박힌 단도처럼 알 수 없는 기운이 자신을 옥죄는 것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면 죽는다…!’
엑마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도현에게 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하, 보자 보자 하니까.”
방문자로 오는 것도 겨우 이해해줬더니 이 상황은 도대체 뭔가.
도현은 식탁의 반찬을 보며 끌어 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이놈들이 들어온 방문 위를 보니 붉은색의 숫자가 카운터 되고 있었다.
2:48:09
2시간 48분 9초.
도현이 송곳을 잡고 있는 젓가락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단도와 송곳, 젓가락이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렸다.
“……!”
바로 앞에서 지켜본 엑마는 충격으로 입만 뻐끔거렸다.
식탁 의자에서 일어난 도현은 거실에 낭자한 피를 보며 인상을 썼다.
깔끔하게 찌르고 치고 박고 할 줄 알았더니, 톱질은 또 뭐란 말인가.
“네가 무슨 톱 살인마라도 되냐?”
“푸, 풀어라! 당장 풀란 말이다!”
떨리는 목소리가 협박과 거리가 멀었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변한 눈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암살자가 두려움이라니.’
제 정신으로 돌아온다 해도 밥벌이를 하려면 이제 다른 일을 찾아야 할 거다.
도현은 끅끅, 신음을 흘리는 그라드를 향해 다가갔다.
오른 팔은 고깃덩이가 됐고 왼팔은 강제로 멈춘 바람에 마나로 뒤틀러 있었다.
거실도 피와 잔해로 난장판이다.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 했다간 과다출혈로 목숨이 간당간당하다.
“그레이트 리커버리.”
도현이 나직하게 외쳤다. 진한 녹색 빛이 그라드 몸 전체를 감쌌다.
아무렇게나 뒤틀린 왼팔이 우드득거리며 제 자리를 찾았다.
오른팔의 피가 부글부글 끌어 오르며 상처를 덮었다. 시간을 되감듯 상처가 나이갔다.
스승 구출로 다친 상처까지 완벽하게 나은 그라드는 믿지 못한 듯 몸을 더듬으며 살폈다.
마탑주도 쉽게 펼치지 못하는 8서클 완전 치유마법이었다.
이어 도현은 거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더러워진 흔적이 빛으로 산화해 사라진다. 거실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아직 굳은 채 구경중인 엑마에게 다가갔다.
꿀꺽!
고양이 앞의 쥐처럼 변한 엑마는 도현이 두려웠다.
자신의 무기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 것, 마법사의 상처도 말끔히 치유했도, 바닥의 흔적까지 지웠다.
그 중에 시동어를 뱉은 건 치유 마법뿐.
“대, 대체… 드래곤…?”
손 짓 하나로 부릴 수 있는 건 인간의 능력으론 무리다. 그게 가능한 종족은 드래곤이나 신 밖에 없었다.
신은 비교할 수 없으니 그나마 현실성을 부여하자면 드래곤 밖에 없다.
“넌 좀 자라.”
도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엑마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난 그라드를 향해 식탁으로 눈짓했다.
“이야기 좀 들어볼까.”
“사, 살려주십시오!”
그라드는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스승님, 스승님 좀 살려주십시오!”
무미건조한 시선이 그라드를 넘어로 향했다. 하얗게 질린 채 기절한 늙은 마법사.
50대 쯤 될까. 검게 그을린 머리와 수염, 보이는 곳의 상처외 멍 자국들. 탈출이라도 한 것일까?
“헤나지그 카 오르센, 실용마법학파의 수장이십니다. 정통학파가 전통을 무시하고 학파통일을 위해 암살자를 보냈습니다….”
‘실용마법학파?’
도현은 자신이 심심풀이로 만든 학파가 튀어나오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중세시대의 문화에 가까운 제브라드를 보며 답답해서 만든 몇 가지의 마법이, 왕실마법사를 통해 학파가 창설 됐었다.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
400년이 세월이 무색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학파의 수장이라는 헤나지그를 좀 더 살펴본 도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제 끝인 것 같은데.’
예상은 정확했다.
쓰러진 헤나지그는 5써클 초입의 마법사다. 보통 7써클이 수장을 맡는 풍습에 비해 무척이나 부끄러운 수준이다.
눈앞에 사정하는 젊은 마법사도 2써클 초입. 마법사라고 명함을 들이밀기에는 너무나도 조악했다.
‘게다가 이 녀석….’
방금 상처를 치료하면서 눈치 챘지만 몸속이 엉망이었다. 마나를 끌어올릴 수록 망가지는 몸.
그런 몸으로 2써클까지 배운 걸 보면 목숨을 걸었을 거다.
짠내가 나도 너무 나는 두 사람.
드라마였으면 그러겠거니 하겠지만 막상 자신과 연관되는 사람이라 하니 괜히 욱한다.
‘제브라드. 이런 놈들을 나한테 보냈다 이거지?’
500년동안 느낀 것이지만 신은 간섭도 도움도 주지 않았다.
제브라드의 가치를 따져본다면 그저 그녀의 귀에 걸 악세서리 하나 정도?
그게 신이 생각하는 제브라드의 가치였다.
‘치장하난 끝내줬는데.’
차원의 문 때문에 면담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별을 고하는 자리에 풀 메이컵을 하고 오는 여자의 모습이랄까.
그리고 전남친이 된 남자에게 잔에 든 물을 뿌릴….
‘아침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나름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은 도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벌벌 떠는 그라드에게 물었다.
“이름.”
“예? 아, 그라드라합니다. 2써클….”
“됐고, 어떻게 하고 싶은데?”
“스승님을 살려주시면….”
도현은 같은 말만 반복하자 짜증이 몰려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살려 줘봤자 죽을 텐데? 설마, 이번이 끝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예, 예…?”
“지킬 생각은 없냐?”
멍하게 쳐다보던 그라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리며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리고 무릎에 올린 주먹이 바르르 떨었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능력이 부끄러워서겠지.’
도현은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나와 거래하자.”
“거래… 말씀이십니까?”
“몇 살이지?”
“올해 열아홉입니다….”
“음, 성인식까지는 아직 1년 남았나?”
그라드가 얼떨떨한 음성으로 물었다.
“성인식은 3년 전에 했습니다….”
“아니, 혼혈 성인식 말이다. 넌 마족 혼혈이거든.”
“무슨…?”
그라드가 멍청한 얼굴로 도현을 바라봤다.
도현은 이번 방문자를 보고 의심이 들었다.
‘나와 관련된 놈들만 보내나?’
하지만 그 의심은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처음 방문한 놈은 전혀 상관없는 놈이니까.
그렇지만 그놈은 도현 때문에 미래가 바뀌었다. 그 뒤로 친우의 후손인 헤미오르, 그리고 이번엔 자신 때문에 창설된 학파까지.
긴 시간 제브라드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흔적이 사라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건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가 되돌아온 후 대한민국에서 지낸 시간은 이제 막 1년 반.
제브라드로 친다면 150년 정도.
적은 시간이 아닌데도 그의 유지는 어떻게든 흘러가고 있었다.
‘어떡할까.’
도움을 주는 건 세르노아스 여식 하나면 됐다.
별 것 아니었음에도 여식은 제국의 최초로 여황이 될 거다.
게다가 이도교라는 우도현교를 국교로 삼는다.
제브라드 신교를 두고 자신의 교를 국교로 지정할 정도면 그녀는 강하다는 거겠지.
하지만 먼 미래의 이야기라 그런 건지, 시스템에서는 따른 보상이나 특출 난 혜택도 없었다.
오히려 시스템이 이제 와서 자신의 생활에 간섭하는 게 못마땅했다.
그리고.
‘단순한 문제 같지는 않단 말이지.’
자신의 능력이라면 해결해주지 못할 건 없었다. 드래곤도 명함을 들이밀지 못하는 강함과 신의 제약도 없는 이계 인간.
그래서 가볍게 넘기기엔 찜찜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지구로 돌아온지 고작 일년 반인데.
그냥 저냥 생각 없이 귀찮다는 이유로 해결하려고만 들다 자신의 안빈낙도의 삶과 멀어질 것 같았다.
‘정보가 필요해.’
누군가 물어다 주는 정보가 아닌,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정보 말이다.
도현은 인벤토리에서 검은 조약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둠의 정령석이다.”
친화력이 없어도 당장에라도 정령과 계약 가능한 정령석.
제브라드에 정령사는 드물고 강한 정령사는 더 드물었다. 그 이유는 마나를 사용하는 게 아닌, 친화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마나도 재능이지만 진화력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 할 정도.
괜히 축복 받았다는 말이 떠도는 게 아니었다.
그라드는 검은 조약돌을 보고 눈을 껌뻑였다.
“처음 듣습니다.”
“당연하지, 이건 마족의 전유물이니까.”
뭐, 다크엘프라면 가능할지도.
멍청한 얼굴을 지운 그라드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거래는 무엇입니까?”
“마족을 선택해.”
“그게 끝입니까…?”
얼떨떨했다. 혼혈의 성인식 때 마족을 선택하는 게 끝이라고?
‘고작 그게 끝일 리는 없어.’
목숨을 건 일이 이렇게 간단할 리 없다.
도현의 말을 의심한 그라드는 잔뜩 긴장한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마계를 네 발 아래 둬.”
미친.
“그게 말이 됩니까?”
고작 저 돌 하나의 값이라기엔 상상을 불허했다.
“네 스승도 살려줄게.”
“……!”
“저대로 두면 며칠 내로 죽을 거다.”
그라드는 정신을 잃은 스승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하얗게 질렸던 안색이 파랗다 못해 시체처럼 느껴졌다.
체온도, 느려지는 숨소리도 문제가 있다고 느꼈지만 그게 생명이 꺼져가는 현상일 줄은….
“정신 잃은 것과 연관이 있습니까?”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널 살리기 위해 무리했지.”
그라드는 무너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벌겋게 충혈된 눈에서 맺히지도 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