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3화 (13/200)

# 13

13. 쓸데없다 (1)

셋은 푹신한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댔다. 몸을 감싸는 최고급 가죽과 받쳐주는 쿠션이 몸을 녹게 만든다.

소파 앞으로는 종잇장 같은 100인치 벽걸이 TV가 있었고, 방 2개와 주방까지 딸린 형태는 한 가정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곳은 한국 헌터 협회 회장실.

강혁 혼자서 사용하는 사무실이었다.

헌터 협회 자체가 돈이 많은 걸까?

도현은 생각 이상으로 헌터의 대우가 좋다는 걸 깨달았다.

“꿀꺽, 꿀꺽, 꿀꺽, 푸핫!”

2리터의 생수통을 병째 원샷 한 강혁이 대뜸 이야기를 꺼냈다.

“삼, 사 일 전인가, 도식이가 씩씩대며 하소연을 하더라.”

“차서방이?”

“차서방? 아. 새끼 괜히 부럽네. 아무튼, 곡식 특급 워프에서 날짜가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데 보스가 나타났다는 거야. 그것도 두 마리씩이나.”

“그런 적은 없었잖아?”

도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2시간 동안 무슨 얘기를 했던 건지 우대성도 처음 듣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그래서 4등급 워프가 순식간에 2등급이 됐지. 그 정도면 어떤 수준인지 너도 알 거 아니냐. 대성아.”

“설마 그거….”

한참을 둘이서만 워프 이야기를 해대던 강혁이 도현을 향해 턱짓했다.

“그래. 살려면 튀어야지. 그게 정석이지. 그런데 조카가 두 놈을 복날 개 패듯이 팼단다. 대련장에서 입을 뻥긋대던 누구 씨 말처럼.”

우대성이 뜨끔하며 ‘개 아니랄까 봐 귀는 어지간히 밝아요.’라며 빈정댔다.

강혁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체가 말끔히 증발했지. 그게 대성이와 널 소환한 이유고.”

이건 도현을 향한 설명이었다.

차도식과 하지현, 주 팀장이 알아서 처리한 내용을 알려준 것이었다.

도현은 몰랐지만, 몬스터의 사체는 철저하게 관리된다.

누가 잡았으며, 상태가 어떤지, 어떤 경로로 거래가 됐는지.

그런데 누가 잡았다는 정보만 있고 사체 자체가 증발했으니,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버렸다.

그것도 3년 차 워프의 보스몬스터 사체.

다행인 건 차도식이 다른 곳에 떠벌리지 않고 강혁에게 바로 찾아와 하소연했다는 것.

강혁은 그 대가로 도현에게 대련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우대성이 어떤 사람인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들을 샌드백으로 쓰겠다는 친구 놈의 말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물론 이런 설명은 제외한 채 우긴 대련이었지만 말이다.

실랑이가 길어지자 강혁은 우대성을 사무실에 가둬둔 채 먼저 도현이 있는 뷔페로 내려온 것이었다.

전후 사정을 다 들은 도현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직권남용도 이런 직권남용이 없었다.

‘빨리 튀어야겠다.’

도현은 빨리 결론을 내렸다.

아빠의 친우라지만 이런 유형의 사람은 엮여도, 엮이지 않아도 피곤한 부류다.

부모님의 관심만으로도 인내심이 아슬아슬했던 도현은 더 이상의 관심은 사절이다.

생각을 끝낸 도현과 우대성의 시선이 슬쩍 마주쳤다.

“그럼 네 말대로 대련도 끝났으니까 이만 간다. 아들아, 가자.”

우대성이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도현도 심드렁한 얼굴로 일어나 몸을 털었다.

흰티에 청바지. 귀찮아서 같은 옷만 수십 벌 산 그는 인상을 구겼다. 대련으로 구겨진 주름과 묻은 흙먼지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야야, 조카야 너도 이렇게 가면 어떡하냐. 헌터계에는 너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니까? 너 헌터 1위 해서 인기도 얻고 돈도 벌면 좋잖아? 응?”

꼬리가 있었으면 축 늘어져 낑낑대는 모습과 닮았다.

도현은 이런 사람이 협회장이라는 데 다시 괴리감이 느껴졌다.

‘뭐, 강혁 아저씨한테 일러바친 놈도 있는데.’

부부 아니랄까 봐.

현관문 앞에 서서 대답을 종용하는 강혁을 보며 도현은 딱 잘라 말했다.

“저 헌터 안 할 건데요.”

“뭐?! 그럼 아빠 회사 물려받으려고? 그건 헌터 해도 할 수 있잖아?!”

아빠한테 슬쩍 시선이 갔다. 머쓱해하는 걸 보니 아마도 헌터를 무르려고 그렇게 둘러댄 듯했다.

“아닌데.”

“그럼?”

“저 요리 배울 건데요.”

둘은 경악한 얼굴로 도현을 쳐다봤다.

***

도현은 팔에 살짝 힘을 줘 프라이팬을 흔들었다.

치이이익―

반동으로 김치전이 뒤집힌다. 묵은 김치 특유의 시큼한 냄새에 이어 고소한 향이 열기를 따라 풍겼다.

“음, 이건 됐고.”

약한 불로 낮춘 그는 프라이팬 옆에서 끓고 있는 작은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훅 끼치는 뜨거운 김 사이로 된장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도마 위에 썰어둔 두부를 찌개 위에 올리고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끼얹었다.

-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그 사이 밥솥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저녁 8시 30분.

밥 먹기에는 조금 늦은 부산스러움.

도현은 식탁에 반찬 통을 통째 올려 뚜껑을 열었다. 뚜껑들은 음식물이 닿지 않게 포개어 옆으로 치우고 즐거운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아빠가 데려다주면서 엄마가 보냈다는 반찬까지 다 깔고 보니 식탁 위에는 9첩 반상이 깔려 있었다.

거기에 흥이 돋아 만든 된장찌개와 김치전까지.

보기만 해도 흐뭇할 밥상이다.

갓 지은 밥을 한 술 퍼서 먹었다. 뜨끈한 김에 하아, 절로 입김을 날리니 달달한 흰쌀의 풍미가 입 안 가득 채운다.

한참을 씹고 음미한 도현은 엄마가 만들어준 오이소박이를 들었다. 손에 묻는 걸 싫어하는 성격을 잘 아는 엄마의 오이소박이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새끼손가락 두께의 어슷썰기한 오이. 그 사이에 3분의 2쯤 칼집을 내고 양념에 절인 짧은 부추로 채운 오이소박이다.

아삭아삭!

짭조름한 오이 맛 뒤로 양념에 버물인 부추가 함께 씹혔다.

부추 특유의 향이 젓국과 한데 어우러지며 매콤한 양념이 깔끔하게 입맛을 당겼다.

감탄과 함께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다음은 나물이었다.

채 썬 무를 볶아 익힌 무나물.

국물에 반쯤 담긴 모습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도현이 즐겨찾는 반찬 중 하나였다.

그 옆으로 시금치, 데친 콩나물과 데친 부추나물까지 입에 넣고 씹으니 입이 터질 듯 볼이 빵빵해졌다.

“맛있다.”

이 나물들은 전부 같은 양념으로 만드는 걸 직접 봤다. 그런데도 그 맛이 다 달랐다.

‘그게 나물요리의 묘미지.’

도현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오랜 시간 제브라드에 있으면서도 잊을 수 없었던 음식들. 그래서인지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입 안 가득 나물의 여운을 뒤로 하고 직접 부친 김치전을 향해 젓가락을 놀렸다.

취향이 명확한 그는 얇고 바삭한 전을 선호했다. 취향만큼 심혈을 기울여서인지 살짝 탄듯 안 탄듯 아슬아슬한 테두리와 노릇하게 구워진 불그스럼한 김치전은 도현을 유혹하듯 선명한 자태를 보였다.

바사삭!

부서지는 겉면 사이로 쫀득한 식감에 눈을 반짝이다 묵은지 특유의 맛이 어우러지며 입안을 희롱했다.

“크으, 이 맛에 김치전을 먹지!”

그렇게 먹고 싶었던 김치전은 제브라드에선 도저히 구경할 수 없어 더한 갈증을 느꼈었다.

맛을 음미하며 감았던 눈을 뜨니 식탁 앞, 거실 너머 발코니가 눈에 들어왔다.

쏴아아아—

집에 들어올 때쯤부터 오기 시작한 비는 캄캄한 밤임에도 선명할 정도로 굵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럴 땐 전에 막걸리가 딱인데.”

한국식 나이에는 전혀 안 맞는 취향이었지만, 중고등학생 때 일탈의 추억이 살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놈들은 잘 지내려나?’

중·고등학교를 함께한 세 놈이 있었다. 자신까지 해서 고등학생 때는 꽤 유명했었는데, 각자 한 성격하는 탓에 어울리는 게 불가사의라 할 정도였다.

돌아와서야 그놈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을까.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만나봐야지 하며 유야무야 보낸 시간이 벌써 일 년이다.

‘엄마한테 듣기로 이래저래 연락이 끊겨 버렸다 했으니까…’

입학 전, 계속 집에만 처박혀 있을 때.

결국 폭발한 엄마가 친구라도 만나라며 잔소리를 했는데, 이미 전화번호는 바뀐 상태였고, 엄마도 모른다 했다.

‘뭐, 엄마의 굴림도 끝났으니 차차 알아봐야지.’

집에 쳐박혀 있을 때야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지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도현은 찌개를 한 숟갈 가득 펐다.

우물우물.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먹어줘야 하는 된장찌개. 거르게 된다면 입안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푹 빠졌다.

행방불명 이후 집에 막 돌아왔을 때만 해도 걸신들린 듯 매일매일 한 솥 째 퍼먹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그나마 장족의 발전이랄까.

“그나저나 방문자 놈들은 언제 오는 거야?”

얼마 안 남은 시간에 은근 신경이 쓰였다.

남은 시간이라고는 27시간 정도.

“진짜 한 데 몰아서 오는 거 아니야?”

경건함과 즐거움이 가득해야 할 밥상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그때였다. 방문이 열린 건.

쿠당탕탕!

뒤엉켜 거실 바닥에 밀려온 두 놈과 문 앞에 깔끔하게 착지한 한 놈.

방문자였다.

“…그럼 그렇지.”

이놈의 입이 웬수다.

도현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라드는 뼈를 울리는 고통에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여긴 어디… 아, 스승님!’

두 눈동자가 품으로 향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조용히 잠든 것처럼 안겨 있었다.

‘분명 탈출할 때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생각 못한 기습을 대신 막으며 정신을 잃은 스승을 어떻게든 끌어  안고 워프가 설치된 창고까지 왔다.

계속 따라 붙는 암살자들을 때낼 수 없어 결국 창고문을 열어젖혔는데…

‘여기가 어디지?’

기억 속의 창고가 아니었다.

어둡고 퀴퀴해야 할 창고는 정오의 태양이 비추는 듯 눈부시게 밝았다.

냉기와 습기로 불쾌감이 느껴져야 할 바닥은 대리석을 깔은 듯 매끈하고 깨끗했다. 거기에 미약한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라드는 무엇에 홀린 듯 고개를 쭉 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물건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설마, 워프가 함정이었나?’

현실을 믿지 못하고 워프가 있어야 할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육전 냉면! 맛집을 찾아라!]

거기에는 이상한 언어와 그림이 계속 바뀌는 큰 액자 하나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라드의 눈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워프가… 없어?”

“쥐새끼가 도망을 쳐봤자지.”

문앞의 사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킬킬댔다.

그라드는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겨우 2써클밖에 되지 않는 자신이, B등급, 마법사로 치면 5써클의 암살자를 상대한다는 말 자체가 우스웠다.

블러드 크레이지 엑마. 암살자임에도 피만 보면 환장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라드가 이렇게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즐기는 살인 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낄낄, 여기가 어디든 네놈들의 무덤이란 건 변함없다. 그리고 거기 검은 쥐새끼.”

엑마가 고개를 들어 도현을 봤다. 바늘처럼 쏘아진 살기에도 태연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엑마의 눈꼬리가 치켜지다 반달로 휘었다. 비웃음이었다.

“킥, 그래 최후의 만찬을 즐기고 있도록 해라.”

그는 벌벌 떠는 그라드를 보며 끌어 오르는 쾌감에 단도를 혀로 살짝 핥았다.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뜨끈한 날의 감촉에 진한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깊은 속에서부터 솟는 갈망을 풀어줄 때가 되었다.

‘우선은 마법사 쥐새끼부터.’

“넌 특별히 디저트로 즐겨주지.”

도현을 맨 마지막으로 밀어두며 그라드를 향해 한 발 움직였다.

‘조력자라고?’

그라드는 눈을 깜빡였다. 학파의 마법사들은 스승님을 구하면서 대부분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어.’

남은 마법사라 해봤자 자신과 스승이 전부였다.

피어오르는 기대감을 지운 그라드는 빠르게 현실을 직시했다.

어디든 도망가야 했다. 그리고 스승님을…

푸욱!

“크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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