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 별로 안 궁금한데? (3)
300명이 수용 가능한 대형 강의실.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채운 강의실 중앙에 빔프로젝터가 눈에 띄었다.
무성한 잎이 달린 흰 뿌리채소였는데, 그 옆에는 시금치 사진과 하얗고 기다란 무의 사진이 함께 한 줄로 나열되어있었다.
“이처럼 로코코스라는 식물은 온도 변화에 따라 무처럼 뿌리채소가 되기도 하고 시금치처럼 잎채소가 되기도 합니다.”
진행 중인 강의는 워프 도감학.
헌터 사무 공무원학과 학과장을 맡은 김문열 교수는 40대 중반이지만, 30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만큼 젊었다.
거기다 성격도 온화한 편으로 학과에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똑똑똑.
노크가 울리며 강의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교수 옆 벽의 문이 열리며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무지 흰 티셔츠에 푸른 청바지. 검은 운동화를 신은 도현이었다.
“15분 휴식하고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교수의 말에 자리를 뜨는 학생은 없었다.
도현은 관심이 없지만, 그는 학과에서 소문난 유명인사였다.
재벌 2세, 빽으로 들어온 놈, 위아래 없는 놈, 잠만 자는 돌이라 해서 수석이라는 별명 등등.
절대 좋은 뜻의 꼬리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 그가 뭔가 손에 쥐고 들어왔으니.
대부분이 자퇴서나 휴학서를 내러 온 것이라 예상했다.
“현장실습서군.”
종이 한 장을 건네받은 김문열 교수는 도현과 서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저 인간이?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개강한 지 이제 두 달.
아무리 금수저라 해도 바로 현장실습을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돈이 있다 한들 실력이 없었고, 능력이 있으면 바로 헌터를 하는 게 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어중이 떠중이가 모인 학교에서는 등을 떠밀지 않은 이상에야 강의에 온 힘을 쏟았다.
목숨은 하나밖에 없으니 말이다.
서류를 쭉 훑어보던 김문열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블랙홀이라. 그래, 우 사장 아들이었지. 그런데 일주일 밖에 안 가나?”
“예.”
“두 달하면 A+로 한 학기를 퉁 쳐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테고.”
교수의 상식과 달리 도현은 몰랐다. 아니, 관심이 없다는 게 맞았다.
그는 대답 없이 서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이 김문열 교수와 마주했다.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더 커졌다.
‘블랙홀이래!’, ‘미친, 거기 워프 마켓 1위잖아?’, ‘진짜 재벌 2세였어? 아씨, 배 아파!’ 등등의 말이 오고 갔다.
그런 배경 속에서 도현의 표정은 점점 사라져갔다.
‘귀찮다….’
지금 상황도 마음에 안 든다. 그저 학과 사무실에 제출 하면 될 일을, 이 교수는 직접 강의실까지 오라가라 하는지.
‘경쟁이라도 붙일 생각이겠지.’
그래서 더 언짢았다.
원치 않은 먹이가 된 기분이었으니까.
한참 눈싸움을 하던 김문열 교수가 픽 웃었다.
“불만이 많은 얼굴이군.”
“그렇네요.”
“허, 구 대위 말대로 대차기까지.”
“가도 됩니까?”
김문열 교수는 현장실습서를 자신의 강의 자료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 일주일이라 그저 강의만 빠지는 건 알고 있겠지?”
“들었습니다.”
“가보게, 일주일 뒤에 보도록 하지.”
도현은 교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도 안 보고 성큼성큼 걸어 강의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강의실이 시끄러워졌다.
“와씨, 금수저, 금수저 하더니 저건 플래티넘 다이아다!”
“저럴 거면 왜 학교 왔대? 그냥 회사 들어가지. 재벌 2세에 실습이 되면 바로 사장 달겠다.”
강의실 두 번째 줄 중간, 김승재와 이민준이 대놓고 불평했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수저론에 끼지도 못하는 이들로 수능을 치고 헌터에 관련된 학과를 지원하면 무상으로 볼 수 있는 각성 테스트를 거쳐 입학한 케이스였다.
그러니 배가 아파도 아플 수밖에.
“아서라, 열폭할 시간에 도감 한 줄이라도 더 읽어.”
“창하 말이 맞아. 곧 있을 테스트만 생각해도 잠 잘 시간도 없는데.”
고창하 말을 두둔하는 더벅머리의 시민형이었다.
투블럭을 한다고 한 머리는 눈썹까지 덮어 완전무결한 바가지 형태였다. 차분한 참 머리라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쓴 게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바가지, 박쥐처럼 편들지 마라. 그런다고 안 좋은 머리가 좋아지기라도 하냐?”
“대기 5번이었던 놈이 말이 많다!”
처음부터 투덜대던 김승재와 이민준이 시민형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 사이를 중재한 건 고창하였다.
“됐고, 시끄럽게 떠들 거면 나가서 싸워. 나 공부할 거니까.”
“허, 우등생 납시셨네.”
거친 말이 오가지만 누구 하나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서 코흘리개 때부터 함께 해온 친구이자 동기다.
“다 들어왔나? 강의 시작하도록 하지.”
김문열 교수가 레이저 포인트 리모컨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 속엔 호리병처럼 생긴 주머니를 가진 식물이 띄워졌다.
***
“내고 나왔어.”
(그래, 그럼 회사로 가. 영업 1팀 주나근 팀장 찾으면 될 거야)
아빠와의 통화를 끝낸 도현은 멍하니 푸른 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냥 좀 내버려 두면 안 되나?”
도현의 소박한 소원이었다. 그저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잘 살걸, 왜 못 놔둬서 문제란 말인가.
어제 결혼식 뷔페에서 소박한 꿈을 밝히자마자 엄마가 폭발했다.
‘너, 내일부터 출근해.’
‘응? 왜?’
‘네가 아직 안 굴러 봐서 그런 소리나 해대지? 돈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알아?!’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엄마, 아빠가 뼈 빠지게 벌어다 주는 건 생각도 안 하고! 너 이제 용돈도 없어! 아빠처럼 굴려버릴 거야!’
‘여, 여보?’
‘엄마…?’
머리끝까지 화난 엄마는 실로 무서웠다.
행방불명 되었던 아들이라 감싸고 돈 게 문제라며 이제 알아서 벌라는데….
뭐랄까.
엄마의 모습이 좀 속상해 보였다.
“그래, 내가 좀 퍼져있긴 했지.”
볼을 긁적인다.
오랜만에 돌아온 탓에 너무 자신을 드러냈나 보다.
‘적당히 감출 걸 그랬나?’
잠깐 고민한 도현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더 피곤해질 거다. 특히 아빠 회사가 회사인만큼.
어제 결혼 한 찌롱이도 아빠 회사 전속 아니던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걔도 일 년 만에 봤는데, 자신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뭐 좋게 생각하자. 일주일쯤 드나들다 보면 화도 풀리겠지.”
엄마를 달랜 건 역시 아빠였다. 무슨 방법을 쓴 건지 기한 없던 굴림이 일주일로 줄어들었다.
대신 굴림 앞에 빡센이 붙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생각의 꼬리를 물며 한참 고민하던 그가 회사에 도착한 건 2시간이 넘어서였다.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업 5팀 팀장 주나근입니다. 주 팀장이라 부르십시오.”
“안녕하세요, 우도현입니다.”
얼핏 보면 운동복에 가까운 옷차림이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키만 멀대같이 큰 사내.
검은 뿔테 안경까지 낀 모습이 전형적인 사무직 스타일인데 영업팀이란다.
‘이 사람도 헌터인가?’
각성하면 겉모습과 달리 힘이 생기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언밸런스 했다.
‘하긴 워프에 들어가려면 헌터가 아니고선 안 된다 했지.’
그럼 회사 직원 모두가 헌터?
도현이 주 팀장 뒤로 사무실을 훑었다.
200평도 넘을 사무실에는 대충 세어본다 해도 100명이 넘었다.
등급이 어떻든 이들이 헌터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아빠가 안쓰러워졌다.
‘하루 3시간 밖에 못 자고 갈릴 때부터 알아봤어.’
그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이라 생각하니 한숨이 먼저 나왔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단은 엄마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한참 기다렸습니다. 바로 출발하죠.”
“바로요?”
안경 너머 무심한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보였다. 생각보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사내였다.
“30분이면 여유롭다고 생각했는데 1시간 반이나 보내버렸으니. 가면서 이야기하죠. 지금 나서도 촉박합니다.”
한숨처럼 말을 뱉으며 서두르는 주 팀장을 따라 회사를 나왔다. 회사가 대로변에 위치한 만큼 교통수단을 사용하기에는 좋았다.
‘차를 탄다 해도 늦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도현의 귀에 주 팀장의 목소리가 꽂혔다.
“이쪽입니다.”
인도에 들어서자 주 팀장이 뛰기 시작했다.
설마…
“뛰어갑니까?”
“당연합니다. 이동교통수단은 3시간 이상 거리나 총무팀을 제외하면 안 씁니다. 헌터 체력이 있는데 뭐하러 탑니까. 뭐, 가끔 기상 악화일 경우에도 쓰긴 합니다만.”
막혀서 그냥 달립니다.
라는 말이 이어졌다.
도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신의 걸음으로 10분인 학교조차 택시 드론을 탄다.
그런데 30분 거리라고?
헌터가 아닌 일반인이라면 2시간은 훌쩍 넘을 거리다.
“어서 가죠.”
무심한 눈빛으로 도현을 재촉했다.
“하아.”
벌써 저만치 가버린 주 팀장을 따라나섰다.
***
차도식은 눈앞의 녹색 워프를 보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모이기로 한 시각까지 10분 남겨둔 상황.
주 팀장이라면 벌써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을 사람이다.
‘그런데 늦는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딱히 이유로 짚을 뭔가는 없었다.
“먼저 들어갈까?”
옆에서 지켜보던 하지현이 가녀린 팔로 차도식의 허리를 감싸며 등에 얼굴을 묻었다.
7개 등급의 워프 중 4등급 워프. 무지개색에 따라 빨간색이 1등급, 보라색이 7등급으로 매겨지는데, 이 둘이 3등급 헌터인 걸 고려한다면 인력 낭비도 이런 인력 낭비가 없었다.
그런데도 함께 있는 이유는, 신혼여행은 고사하고 워프에 매달려야 하는 그들을 위한 헌터 협회측의 배려였다.
“그래, 그러자. 어차피 별일 있을 워프도 아니고.”
1, 2등급을 제외하고 3등급까지는 한 등급이 오를 때마다 아래 등급의 5배나 강해졌다.
둘이 해서 3배 이상의 전력은 평균 4등급 워프 처리를 위해 파견하는 한 파티(5명)에 비하면 두 배 전력이다.
차도식 옆에 하지현이 섰다. 손을 잡고 마주 보며 배시시 웃는다.
그렇게 신혼여행이 시작됐다.
약속 시각 정각.
“후욱, 벌써 들어가셨나 보군요.”
조금 차오른 숨을 내뱉으며 주 팀장은 워프 앞에 섰다.
“바로 들어갑니다.”
올 때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먼저 들어가 버렸다. 도현은 입맛을 쩝 다시며 뒤따랐다.
밖에서 느낄 수 없던 마나가 훅하고 몸을 덮쳤다. 물속에 들어간 듯, 온몸이 마나에 젖는다.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대학교에서 7등급의 워프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런 느낌도 없더니, 4등급부터가 진정한 워프라 볼 수 있는 걸까?
어설프지만 제브라드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4등급 워프, 무한평야에 입장하셨습니다.]
방문자를 제외하고 처음 들어보는 알림음에 도현은 실소했다.
‘정말 지구에 게임을 덧씌우기라도 한 거야?’
앞선 주팀장은 익숙한 것 같지만, 도현만큼은 큰 괴리감을 느끼며 환해지는 시야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한낮의 벌판이었다. 언젠가 TV에서 봤던 벼가 노랗게 익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 벼들이 끝없이 펼쳐진 평야.
살랑,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벼가 황금빛 물결을 만들어낸다.
그 모습은 생각보다 꽤 괜찮은 장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