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6화 (6/200)

# 6

6. 별로 안 궁금한데? (1)

“도대체 이게 뭐야?”

황당함에 혹시나 가상현실게임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착각이 일었다.

“일단 남은 날 동안은 안 들어온다, 이거지?”

빠르게 정신을 수습한 도현은 현실을 수긍했다.

차원을 문을 넘어 지구로 돌아올 때 모든 능력을 잃을 각오는 당연히 하고 있었다.

도현의 기억 속 지구란 기계 중심으로 발전한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계에 검이나 마법은 이레귤러나 마찬가지.

‘이것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고.’

시간적 개념이 맞을 거란 기대도 없었다. 그저 살아계신 부모님의 얼굴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오히려 절반이라지만 그것만이라도 남은 게 어딘가. 깎인 능력임에도 생활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세상이 바뀐 게 더 어이없다고 할까.

“거기에 시스템 창이라.”

마치 이 세상이 가상현실이 된 기분이다.

“뭐, 애초 인벤토리가 제브라드에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웃긴 일이긴 한데.”

하필 독립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것도 웃긴다.

아무튼.

“난 그저 백수가 꿈이라서.”

몸을 움직이는 건 제브라드에서 지겹게 했다.

솔직히 아무것도 안 하고 취미 생활이나 하며 지내고 싶지만, 부모님 잔소리에 그것도 쉽지 않아 문제이긴 하다.

못마땅한 시선이 방문을 향했다.

오는 놈들을 족족히 쫓아 버릴 수도 없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문뜩 생각이 떠올랐다.

페론드 카 노르세아스.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그 녀석.

도현이란 이름이 어렵다며 투덜대길래 댄 이름이 트롤이었다.

제브라드에 떨어지기 전 게임에서 쓰던 닉네임.

‘무슨 몬스터 이름을 써?!’

성질을 내며 트론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마 그때가 노예 상인한테 잡혔을 때였지?’

독에 중독되어 옴짝달싹 못 하던 그에게 밑져 봐야 본전인 마음으로 건넨 게 인벤토리의 포션이었다.

모든 상태 이상 해제.

그게 피의 저주까지 포함될 줄은 몰랐지.

그렇게 전설이 시작되었다.

피식.

그땐 그게 그렇게 괴롭고 힘든 일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아름답게 포장된 추억이 되었다.

도현은 습관적으로 냉장고를 열어 캔 맥주를 꺼냈다.

치익, 딱!

시원한 소리가 거실을 울리며 하얀 거품이 입구 위로 얕게 올라왔다.

익숙한 탄산이 목을 두드렸지만 뭔가 시원섭섭하다. 적막한 거실에 TV의 방청객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쩝.”

괜히 옛 추억을 꺼낸 건지 입안이 텁텁했다. 도현은 남은 맥주를 말끔히 비우고 쓰레기통에 던졌다.

아직 치우지 않은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먹었던 반찬들이 마지막이었던가?

“마트 좀 다녀와야겠다.”

침울했던 눈이 7살짜리 아이처럼 반짝였다.

등교를 제외하면 한 달 만의 외출이었다.

***

제브라드에서 500년, 지구의 햇수론 5년.

그 시간동안 지구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지만 변함없는 것들 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건 당연히 마트였다.

흔한 동네 슈퍼가 됐거나 망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트는 오히려 몇 배나 커졌고 선반에는 다양한 물건들로 빈자리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둘러보는 데만 꼬박 세 시간.

돌아온 뒤로 처음 마트에 갔을 때의 흥분은 아직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 이유는 당연히 먹을 것.

제브라드는 육류 위주의 식생활이다 보니 제 아무리 고기가 좋다 한들 몇백 년 동안 먹어댄다면 물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요리라는 관념 자체가 약했던 세상이기도 했고, 넘어갔던 초기에는 몬스터 고기를 더 많이 먹었던 도현에게는 제브라드 음식 자체가 고문에 가까웠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만들어도 봤지만 독한 몬스터의 고기에 절은 입안이 평범한 음식에서 맛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비슷하게 만들어냈던 녀석이 있긴 했는데….’

유희의 삶이 전부인 드래곤. 그중에서도 바다의 수호자라 일컫는 블루드래곤.

‘요리로 제브라드를 정복하겠다!’

어이없는 그 목표에 도현은 잘됐다 싶어 이것저것 요리를 요구했고, 대한민국의 요리를 비슷하게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었다.

‘그놈은 잘살고 있겠지…?’

뭐, 알아서 잘살고 있을 거다.

도현은 카트 하나를 끌고 과자 코너로 들어섰다. 그리고 보이는 과자를 마구 쓸어 담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과자 산에 주위 시선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음은 채소.”

야채 코너로 옮겼다. 밑반찬을 만들기 위해 냉장 선반을 훑었다. 익숙한 채소와 지구의 것이 아닌 채소들로 다양했다.

“키오르풀? 부추 같은데?”

워프가 생겨나고서 제일 많이 변한 게 있다면 이런 것들이었다.

도현이 견학으로 들어갔던 워프 말고도 초원이나 산으로 이루어진 워프들도 많았다.

그곳에서 채취한 먹을거리는 모든 안정성만 통과하면 이렇게 일반 마트에서 판매한다.

맛도 좋고 빨리 자랐다. 무엇보다 장기 보관이 가능하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게다가 워프 안은 계절이 고정이니 수확할 사람만 있다면 유통이 끊길 일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옛 채소들이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긴 했다.

“고라타의 알이라.”

하얀 알이 보였다. 달걀보다 1.5배 크지만, 가격은 절반밖에 안 된다.

한참 둘러 본 도현은 미간을 좁혔다.

“죄다 이런 거밖에 없어?”

엄마가 해주던 건 옛 맛 그대로인데 왜 익숙한 채소들이 없는지 이해가 안 갔다.

“총각 찾는 거 있어?”

한참을 고민하고 있으니 아주머니 한 분이 슬쩍 말을 걸어왔다. 브랜드 이름이 적힌 앞치마, 좀 더 뒤를 보니 두부의 상표와 같았다.

“그냥 반찬 좀 만들려고 하는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그렇지? 요즘엔 워프에서 나오는 상품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아주머니가 손뼉 치며 호들갑을 떨더니 그나마 익숙해 보이는 채소를 가리켰다.

“저기 애호박이랑 된장하고 고기 좀 사서 된장찌개는 어때? 두부도 넣고 끓이면 밥도둑이 따로 없는데.”

마지막으로 두부를 가리켰다.

도현이 말없이 아주머니만 보자 아주머니는 얼굴을 붉히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니, 팔려는 게 아니라― 슬 더워지니 입맛도 없을 테고, 우리 아들 생각나서 그랬지! 맛있어. 총각, 하나 먹어볼래?”

아주머니는 엄지손톱만 하게 썰어 둔 두부를 이쑤시개에 꽂아 도현에게 건넸다.

“잘 먹겠습니다.”

도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입에 굴려본다. 고소한 백태의 맛이 느껴졌다. 입안에 쓸리는 질감도 산뜻했다.

평범하지만 제브라드에서 꽤 그리워했던 그 두부 맛이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엄마가 해주던 된장찌개를 한 달 동안 해 달라 졸랐었지.

역시 두부는 그냥 먹어도 맛있다.

“두부 살게요.”

시식 두부를 준 뒤로 딱히 관심 두지 않던 아주머니가 반색했다.

“어머, 정말? 서비스 팍팍 붙여줄게. 어떤 거?”

도현은 검지를 들어 냉장 선반을 따라 쭉 그었다.

“저기서 저기까지요.”

털털털털, 투둑.

천천히 밀고가는 카트에서 산처럼 쌓인 상품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카트가 이렇게 작아서야.”

도현은 떨어진 두부를 다시 카트에 넣으며 투덜댔다.

‘차라리 계산하고 다시 들어오는 게 나으려나?’

그러기엔 너무 귀찮다.

고민에 빠졌을 때 검은 양복을 쫙 빼입은 사내 3명이 다가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물었다.

“도현 도련님 되십니까?”

‘도련님?’

뭔가 불안했다.

이미 복장만으로 힐끔 거리는 시선이 배로 늘었다.

“저희는 블랙홀에서 왔습니다.”

블랙홀. 아버지가 이끄는 회사.

띠리리.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아들, 직원들 도착했지? 우리 아들 다 컸네? 혼자 장보러도 가고. 힘들게 장 보지 말라고 직원 좀 보냈어. 장 잘 보고 나중에 전화줘, 아들~)

“…….”

할 말만 하고 끊어진 휴대폰을 보다 인기척에 서 있는 사내들을 바라봤다.

둘은 이미 새 카트를 가져왔고, 손이 빈 사내가 도현에게 몸을 살짝 숙이며 물어왔다.

“카드를 저에게 맡겨 주신다면 큰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도현은 이마를 짚었다.

헌터는 만능이다.

워프에서 사냥으로 돈을 번다거나, 강인한 육체로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한다거나, 서비스직으로 일을 할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총 3,582,821원입니다.”

도현의 카트를 받아갔던 남자가 황금색 카드를 캐셔 직원에게 건넨다.

나머지 두 명은 계산된 물건들을 하나씩 잡자 물건이 증발했다.

인벤토리에 넣었을 때 생겨나는 현상이었다.

“편하기는 한데.”

마트 직원, 손님 할 것 없이 모든 시선이 집중된 상태였다.

지금 시각 8시 21분. 저녁을 먹고 운동 삼아 온 사람들로 마트 안은 더 붐벼갔다.

아무리 철판을 깔았다 해도 의도적으로 시선을 끈 적이 없던 도현은 점점 낯이 뜨거워졌다.

‘아. 딱 한 번 있구나.’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제브라드를 뒤집었을 때.

그땐 물불 안 가렸던 터라 애초 신경 쓰지도 않았던 부분이다.

선글라스 3인이 박자에 맞춰 물건을 인벤토리에 수납한다.

그 모습이 너무 절도 있고 박력 넘쳐 시선 속에서 수군거림이 커져갔다.

‘인벤토리에 물건 넣는데 사명감 같은 건 부여하지 말라고! 좀!’

게다가 씩씩한 몸짓에 도현은 결국 얼굴을 돌렸다.

‘나는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래, 나는 모르는 사람이야….’

“도련님 정리 끝났습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마트 입구에 카페가 있으니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모시러 가겠습니다.”

긴가민가하던 시선들이 꽂히기도 전에 도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지이잉, 지이잉!

공식적으로 숨만 쉬어도 되는 주말. 한참 퍼질러 자고 있던 도현은 잠을 깨우는 벨소리에 인상을 쓰며 깼다.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니 아빠다.

“…여보세요?”

잔뜩 잠겨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아, 아직 자고 있었니? 오늘 결혼식 잊은 건 아니지?)

“결혼식?”

기억을 더듬었다.

며칠 전 동갑내기 사촌의 결혼식이 있다고 오란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었다.

‘근데 걔는 26살밖에 안 됐으면서 무슨 결혼이야?’

귀찮다. 그렇다고 잠수타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애써 정신을 챙기며 기억을 더듬었지만 날짜도, 시간도, 장소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 근데 몇 시였더라?”

(식은 11시다. 시간 맞춰 꼭 와. 안 오면…)

갑자기 목소리가 멀어졌다. 높은 톤으로 뭐라 말하는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엄마 목소리 같은데.

(엄마가 너 시간 맞춰 안 오면 일주일 동안 말단으로 굴린다는데?)

“나 학교 가야 하는데?”

(아. 모르는구나? 워프 실습으로 면제돼)

“어…?”

(그러니까 빨리 와라. 끊는다)

통화가 끊기고 확인한 시간은 9시 57분.

씻고 준비하는 데 5분이라 쳐도 여기서 결혼식장까지 택시 드론으로 1시간이 넘는 거리다. 드론을 기다리는 시간까지 하면 얼추 2시간.

결국 뛰어가야 한단 소리였다.

엎드린 채로 베갯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도현은 발작처럼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주말에 좀 쉬자고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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