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프롤로그
가상현실 게임에서 괴짜로 소문난 우도현은 월드 서버 최초이자 마지막 에피소드, 신이 되는 길에서 실패하며 999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1,000번째 되살아난 곳은 처음 보는 세계 제브라드.
게임에서의 죽음이 이세계로 떨어질 거란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알몸과 인벤토리뿐.
오직 돌아가기 위해 악으로 깡으로 이세계 생활을 시작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가 되기까지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집으로 돌아갈 열쇠가 되지 못했다.
참고 참았던 인내심이 폭발했을 때, 이세계의 신 제브라드와 면담하게 되었다.
피처럼 붉은 긴 머리, 치장한 악세서리에는 엄지만 한 보석들이 잔뜩 박혀있었다.
새끼손톱 크기만 해도 제국 하나를 살 정도로 값비싼 것들이었다.
손에 든 검과 방패는 어떤가. 차원 하나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들이었다.
거기에 다른 차원의 광물이라 일컫는 아만티움이 통째 들어간 갑옷까지.
‘한마디로 사치의 끝판왕이네.’
도현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제브라드, 그녀는 빤히 쳐다보는 도현을 마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도현, 그대가 바라는 건 정말 그것밖에 없습니까?”
“그래, 집으로 돌아가는 거.”
신에게 반말을 지껄이다니!
제브라드교인들이 봤다면 신성 모독죄로 몇만 년이고 죽지도 못한 채 고문당할 만큼, 무시하는 건방진 말투였다.
제브라드는 실소하며 다시 물었다.
“모든 걸 잃는다 하여도?”
도현이 코웃음 쳤다.
“이제 잃을 거라곤 내 몸 밖에 없는데?”
제브라드에 떨어졌을 때도 그랬다. 몸뚱이밖에 없었던 그때. 살기 위해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뒷골목의 양아치가 되기도 했고, 노예로 팔려나갈 뻔도 했다. 용병의 미동이 되어 몹쓸 일을 당할 뻔도 했다.
‘많은 일이 있었지….’
이보다 더한 지옥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든 것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즐거움은 그리움으로,
따뜻함은 쓸쓸함으로.
500년. 인간으로서 해볼 건 다 해봤을 시간.
아련함으로 물든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제브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도현의 옆에 붉으면서도 푸른 보랏빛 워프가 열렸다.
‘저것이 차원 이동 워프!’
도현은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워프를 열기 위해 그간 했던 개고생을 생각하면 제브라드라는 단어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차원의 문, 차원과 차원을 오갈 수 있는 문.
검의 정점이라는 그랜드마스터가 되고서도. 마법의 신이라는 드래곤을 아이처럼 다룬다 할지라도.
이 워프만큼은 열 수 없었다.
신만의 권능이었기에.
그걸 깨달았을 때, 도현이 선택한 건 깽판이었다.
말 그대로 거슬리는 건 전부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그러다 보면 신이 나타나 쫓아내지 않을까 싶어서.
예상대로였다.
단지 깽판 치는 과정이 미화되어 ‘우도현교’가 창설된, 아주 사소한 문제 하나만 빼고 말이다.
‘그래, 사소한 문제지. 음. 그렇고말고.’
도현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워프 앞에 섰다.
희열과 설렘으로 한걸음 내딛으려 할 때 제브라드가 헛기침을 했다.
“뭔데? 할 말 있어?”
“마지막으로….”
“……?”
[제브라드의 이름을 걸고 당신을 제브라드에서 절대 추방합니다.]
신어가 허공에 모여 문자를 만들어냈다.
“……!”
본능적으로 힘을 끌어올리던 도현은 귀에 꽂힌 한마디에 힘을 흩트렸다.
“워프 닫아버릴 겁니다.”
“옙, 가만히 있겠습니다.”
빛나는 투명한 문자가 도현의 이마에 박혔다. 겉으론 볼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이 제브라드라는 차원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음을.
머리가 핑 돈다. 어지럽고 속도 울렁거리는 게 꼭 멀미를 하는 것 같았다.
그때쯤 제브라드가 속 시원한 한숨을 내뱉으며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다른 차원을 떠돌더라도 이 제브라드엔 절대 올 수 없습니다. 절. 대. 로.”
도현도 올 생각이 전혀 없던 터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간다. 잘 살아.”
제브라드는 그 말을 듣자 그간 도현이 제브라드에서 친 사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이제 더는 없다.
그랬기에 그녀는 웃을 수 있었다.
부디 두 번 다시 만나지 말기를.
그녀는 빌며 도현이 들어간 차원의 문을 넘어 시선을 던지다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지구를 감싼 7개의 마나파장.
제브라드는 입술을 씹었다.
***
불덩이의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8개의 행성이 있는 태양계.
그중 선명하고 영롱한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행성 지구를 지켜보는 7개의 시선이 있었다.
황금을 빼다 박은 눈동자가 말했다.
「5년이란 시간이 흘렀군.」
붉은 빛이 감도는 황금색의 눈동자가 동조했다.
「절반만 살아남을 줄 알았는데. 인간들이 생각보다 적응력이 좋다.」
외눈박이. 하지만 그 크기는 두 개의 눈보다 더 큰 녹색 눈동자가 즐겁다는 듯 휘어졌다.
「막 이제 시작했을 뿐이네. 승자는 모든 걸 갖는다는. 다들 잊지 않았겠지?」
그 말에 보라색 눈동자가 살짝 찌푸려졌다.
「승자는 나라구! 예쁜 건 내가 다 가질 거야!」
열의를 올리는 보라색 눈동자와 달리 연갈색 눈동자가 흥분으로 반짝이며 혼잣말을 뱉었다.
「달궈졌으니 이젠 괜찮겠지? 저긴 너무 맛있는 게 많아!」
외눈박이는 휘어진 눈을 바로하며 말없이 지구를 주시하는 회색 눈동자를 향해 물었다.
「자넨 무슨 생각인가? 태생의 차원일 텐데 움직이지 않을 건가?」
「…….」
여태 그랬던 것처럼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 다섯의 시선이 제각각 놀아나는 사이, 은빛 눈동자만이 지구. 대한민국에 순간 반짝인 빛을 바라봤다.
1. 그 헌터의 자취방 문은… (1)
도현이 행방불명되고 5년밖에 흐르지 않은 지구.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에 다시 돌아온 도현은 숨만 쉬는 백수가 되었다.
그리고 1년 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그는 자취를 시작했다.
드르렁, 드르렁!
해가 중천임에도 코를 골며 단잠에 빠진 도현은,
끼이익―.
귀를 긁는 마찰음과 함께 방문이 열리자 벌떡 일어났다.
“뭐야…?”
도현은 자다가 일어나 눈을 끔뻑였다.
갑작스럽게 열린 방문.
그 문 앞에는 익숙하지만 익숙하기 싫은 인종이 멍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16세, 17세쯤의 키. 푸른 눈에 갈색 장발과 중세 유럽을 떠올리게 만드는 옷차림.
제브라드에서 질리도록 봤던 평민의 모습이었다.
불쾌한 기억이 떠오른 도현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본래 성질대로라면 곧장 발로 차 문을 닫았을 거다.
산발이 된 머리와 찢기고 엉망이 된 모습만 아니었다면.
“뭐야?”
“여, 여긴 어, 어디죠?”
“너 뭐냐고.”
눈치를 살피면서도 두려움에 덜덜 떠는 모습에 도현이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도망자의 전형적인 모습.
‘그런데 제브라드의 사람이 어떻게 내 방에?’
의문도 잠시, 사내 뒤를 확인한 도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문밖으로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 새카만 연기가 구름처럼 하늘로 피어올랐다.
부서진 건물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과 굵은 고함이 끊이지 않고 들렸다.
자동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마을 하나가 털린 거 같은데.’
도현의 예상대로였다.
히이이잉!
“저놈을 쫓아라!”
말을 끄는 무리 하나가 사내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씨, 겨우 1년밖에 안 지났는데.”
귀찮음이 잔뜩 묻어났지만, 행동은 빨랐다.
성큼성큼 걸어 사색이 된 사내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동시에 방문을 닫았다.
쾅!
…….
정신 사나웠던 공간이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문 닫는 소리에 놀란 사내는 방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말없이 내려다보던 도현은 크게 한숨 쉬며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
“너 어떻게 문을 열었냐?”
제브라드의 언어가 방을 울렸다.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라 더 몸을 움츠렸다.
‘아, 이게 아닌데.’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목소리가 너무 뾰족했다.
도현은 최대한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특이한 능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어떻게… 왔는데?”
‘기어들어 왔냐?’라고 물으려던 그는 용병이나 쓰는 거친 말인 것을 인지하고 최대한 평범한 단어를 붙였다.
성격에 안 맞는 말이라 씹듯 나온 게 문제였는지, 사내는 몸을 더, 더 움츠렸다.
결국, 좁쌀만 한 인내심이 바스라 졌다.
“하… 사내새끼가 찌질해서는. 넌 존심도 없냐, 새꺄? 복수한다든가 힘을 기른다든가. 하여간 제브라드 새끼들은.”
제브라드 언어를 집어치운 도현은 혼잣말처럼 투덜대며 일어났다.
자신만의 세상이자, 보금자리. 누구도 알 수… 부모님은 예외지만. 아무튼, 이런 천국에 저런 오물 투척이라니.
‘아침부터 일진이 더럽게 사납네.’
도현이 이를 갈며 혀를 찼다.
“아니야… 나, 나도 힘만 있었다면, 힘만 있었다면! 싸웠을 거라고!”
병든 짐승새끼 마냥 낑낑대던 놈이 벌떡 일어나 씩씩댔다. 시뻘게진 얼굴이 얼마나 억울한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다.
마침 그 파편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 방바닥.’
더러워진 방바닥이 눈에 들어오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니, 그런데 나 한국말로 말했는데?’
“너 지금 내 말이 들려?”
“아, 아주 잘 들린다, 새, 새, 새꺄!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그런 말은….”
커다란 푸른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자 도현이 한 손으로 눈을 덮었다.
“이, 인상 쓰면 어쩔 건데, C발!”
고함이 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순박하게 생긴 것치고 의외였다.
‘그래도 깡은 있나 보네.’
도현은 작게 감탄하며 말을 내뱉었다.
“나가.”
담백하게 퇴출을 명령하자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던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아 밀었다.
“……?!”
‘하아… 민다고 열릴 리가 있나. 돌려서 밀어야지.’
잠깐의 낑낑거림으로 문을 연 사내는 콧김을 뿜으며 한 걸음 내디뎠다.
“어…?”
들어온 입구였으니 당연하게도 나갈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방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10평 정도의 거실이었다.
“오, 하나님 맙소사.”
도현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일단 씻어.”
도현은 빠르게 정신을 수습했다. 서랍장에서 새 속옷과 반팔 티셔츠, 추리닝 바지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눈앞의 옷가지를 흘기더니 도현을 빤히 쳐다보곤 입꼬리를 올렸다.
탁!
도현의 손 위에 있던 옷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도현은 진심으로 빡쳤다.
“이 새끼가?”
전신에서 피어오른 짙은 살기가 사내에게 쏘아졌다. 사내는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혼이 나간 모습이었다.
“오줌 싸면 뒤진다.”
도현이 으르렁대자 사내는 필사적으로 다리 사이를 틀어막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정말, 온 힘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도현은 천천히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 건넸다.
“마지막이다. 저기 보이는 문 열면 욕실이다. 가서 씻어. 씻고 갈아입고 와.”
사내는 그게 뭔지, 무슨 말인지 묻고 싶었지만, 토를 달지 못했다. 그랬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독약을 받는 죄인처럼 옷을 받아 든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우와악!
요란한 소리와 비명이 겹치자 도현은 문득 생각이 스쳤다.
“아. 사용법을 안 알려 줬네.”
뭐 알아서 하지 않을까?
다양한 소리가 들리길 한 시간.
그나마 깔끔해진 사내가 발소리까지 죽이며 나와 도현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댔다.
“귀, 귀족 나으리 자,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
“됐고, 너 이름 뭐냐.”
“미도론이라 하옵니다. 펴, 평민으로 다로셀라의 로거….”
“아아, 필요 없고. 그, 미도론? 어떻게 들어왔지?”
정적 10초.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도현이 이를 뿌득 갈자 미도론이 어깨를 들썩였다.
“마, 마을 뒤, 도, 도, 동굴이 있습니다! 거, 거기로 도망쳤는데….”
“여기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미도론이 다시 몸을 떨었다.
귀족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니, 불경죄로 매를 후려칠 일이었다.
‘준남작이 그러할진대 이 귀족은….’
성격이 정말, 정말 더럽다.
‘주,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아버지, 어머니, 로라!
미도론은 다시 눈앞이 흐려지자 자신도 모르게 숨죽여 흐느꼈다.
“너 또 바닥 더럽히면 널 걸레로 쓴다.”
“크흡!”
저건 분명 자신의 피부를 벗겨 쓴다는 말이겠지. 옆 영지의 마노르타 귀족이 심심치 않게 쓴다는 귀족 모독죄의 하나였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미도론은 오금이 저려왔다. 차라리 산적의 눈먼 칼에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이젠 우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하게 된 미도론은 입술을 씹으며 울음을 삼켰다.
도현은 다시 터져 나오는 한숨에 이마를 짚었다.
‘아아, 제브라드. 다신 보지 말자며. 이건 뭐냐고.’
이것이 신(神)종 괴롭힘인가?
“우선은 좀 일어나 봐.”
7년 된 컴퓨터 본체처럼 털털거리며 떠는 미도론을 보다 못해 살짝 살기를 피우자 벌떡 일어섰다.
피곤한 기색으로 미도론을 훑었다.
“밥은?”
“괘, 괜찮습니다.”
쿠르르릉.
모깃소리처럼 들리는 목소리 보다 그의 배에서 울리는 천둥소리가 더 컸다.
“솔직한 뱃속이 더 낫네.”
도현은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는 미도론을 지나 거실로 나가며 그에게 거실의 소파를 가리켰다.
“저기 앉아있어.”
그가 식탁에 차린 건 구운 스팸과 계란 프라이, 그리고 김치였다.
밥숟가락으로 대충 푼 밥 두 공기가 마주보고 놓였고 도현의 자리에는 수저 한 벌이, 미도론이 앉을 자리에는 숟가락, 포크, 나이프가 없어 과도가 놓였다.
“와서 앉아.”
쭈뼛쭈뼛 다가온 미도론이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아 식탁을 살폈다. 익숙한 빵이나 수프 따위가 아닌 처음 보는 것들에 어색함만 가득했다.
새빨간 국물이 가득한 김치를 보며 미도론은 식은땀을 흘렸다.
‘저건 피에 절은 채소인가?’
노릇노릇 구워진 스팸은 더 끔찍했다.
‘이건 노예의 살을 발라 구운 것인가?’
순수한 호의로 차려진 한 끼 식사가 순식간에 살인마의 식탁으로 변했다.
그나마 손댈 수 있는 건 익숙한 계란 프라이 뿐.
은빛으로 번쩍이는 식기를 보며 도현이 이젠 귀족이 아닌 왕족이 아닐까 생각한 미도론은 덜컥 겁이 났다.
“잡생각 말고 밥이나 처먹어.”
밥상에서 살기를 피웠다간 그릇이나 식탁이 남아나질 않기에 도현은 거친 말만 내뱉었다.
미도론은 두려움에 떨며 포크를 들었다. 계란 프라이 끄트머리를 조심스럽게 찍는다. 과도를 들어 누르며 밀어냈다.
“아.”
깔끔하게 잘리자 미도론은 떠는 것도 잠시 잊고 탄성을 내질렀다.
이렇게 잘 드는 칼이라니. 포크도 그랬다. 은이다. 무려 은. 게다가 깃털만큼 가볍다. 어떻게 광택을 낸 건지 자신의 얼굴이 다 비칠 지경이었다.
자른 계란 프라이 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고소한 기름향에 이어 계란의 고소한 맛에 혀가 놀랐다. 끝에 느껴지는 짭짤한 맛에 미도론은 눈이 번쩍였다.
소금! 소금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에 갇힌 로거드에서는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던 조미료였다.
감격이었다. 감격에 겨워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름 모를 귀족님, 아니 왕족… 일지도 모르는 귀족님! 감사합니다!’
방금까지 벌벌 떨던 놈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도현은 다시 미간을 좁혔다.
한마디 하지 않은 이유는 미도론이 더 이상 떨지 않아서였다.
도현은 덤덤히 젓가락으로 스팸을 하나 집어 베어 물었다. 남은 건 밥공기 위에 올려두고 김치를 찢어 먹었다.
그 모든 과정을 보고 있던 미도론이 계란 프라이처럼 스팸을 작게 잘랐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입에 넣고 눈을 질끈 감으며 씹었다.
‘이 맛은?!’
미도론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며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이게 무슨 음식입니까?”
“스팸.”
“스팸?”
“통조림 돼지고기. 돼지 살을 갈아서 찐 거. 엄청 짠데 안 짜면 맛없어.”
“고기…….”
미도론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고기라니. 3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진수성찬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미도론의 눈빛이 변한 것은.
“허….”
도현은 흡입하기 시작하는 미도론을 멍하니 바라봤다.
조심스럽던 포크 질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잘라 먹더니 이제는 칼을 들지도 않는다.
찍고, 퍼고, 입에 밀어 넣는다.
쌀이란 게 생소할 만도 한데, 김치가 매울 만도 한데, 거리낌이 없이 입에 밀어 넣는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군.’
도현은 이미 젓가락을 놓고 감상했다.
미도론이 광란의 포크 질을 멈춘 건 모든 그릇을 다 비운 후였다.
“안 짜냐?”
도현이 머그잔에 물을 담아 건넸다.
얼떨결에 받은 그는 도현의 마시는 시늉에 컵을 입에 댔다. 맑고 시원한 물에 다시 감격한 모습이었다.
“설마 제가 죽어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 건 아니겠죠?”
‘아. 두려움을 안 느낀 게 아니라 이미 죽었다, 생각한 건가?’
도현은 설명을 포기했다. 귀찮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다.
‘어? 그럼 같이 살아야 한다고?’
엄청난 사실을 깨달은 도현은 제브라드의 목을 잡고 탈탈 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귀, 귀족 나으리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극진한 공경에 이젠 이쪽이 적응 안 된다.
‘알려줘도 되려나. 괜히 발작하는 건 아니겠지?’
“우도현.”
머리를 긁적이던 도현이 짧게 이름을 댔다.
“딸꾹.”
빈 컵이 식탁 위에 나뒹굴었다.
굳은 미도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용해진 것 외에는 큰 발작이 없자 도현은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국물만 남은 김치 통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엄마한테 김치를 더 보내 달라면 잔소리 엄청 듣겠지?
한 통 가득 보내주신 지 2주밖에 안 됐다. 그걸 벌써 다 먹어 치워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