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에필로그
호송차 앞.
“…….”
한율은 거래창을 열어 의자를 꺼내고 그 의자에 앉아 멍하니 흑색 거성을 바라봤다.
리치, 하이시스는 수십 병이나 되는 성수가 온몸을 적셨음에도, 강력한 신성력 폭탄을 바로 눈앞에서 직격당했음에도 소멸하지 않았다.
신체가 성수, 그리고 신성력 폭탄에 의해 소멸했을 뿐, 라이프 베슬은 여전히 고체화된 마나에 보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신체를 잃고 라이프 베슬만 남은 리치, 하이시스는 마지막, 작전이 실패할 것을 대비하고 있던 크라이스가 처리했다.
“만약에요.”
멍하니 흑색 거성을 바라보고 있던 한율이 입을 열자 그 옆에 의자를 꺼내고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레스트, 언소월,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에리얼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한율을 돌아봤다.
“차원의 문이라는 스킬이 생성되지 않았다면 지구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야…….”
멸망했을 것이다.
한율이 마법을 공개하고 무공을 공개했다. 하지만 뛰어난 스승을 두지 못한 지구의 헌터들은 하이시스는커녕 그의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 침략한 언데드, 키메라도 막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영상기기를 이용해 원거리 가르침(?)을 받아 지금의 힘을 얻었다고 해도 역시 힘들었을 것이다.
등급으로 분류하면 S등급도 아닌 SS등급에 해당되는 오러 마스터, 대마법사가 함께하지 않으니 이동 마법 봉인진을 완성할 수가 없고 최소한의 피해로 침략한 키메라를 쓰러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이동 마법을 봉인하는 이능력자가 각성해 바로 SS등급 게이트 퀘스트에 참가하더라도 홀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동 마법 봉인 능력을 펼쳐야 했으니 수개월, 아니 언데드와 키메라의 침략이 이어지는 국가가 있으니 하이시스 토벌 작전을 펼치는 데 수년은 걸렸을 것이다.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일이 정말 잘 풀려 하이시스 토벌 작전을 펼쳐도 문제다. 뛰어난 실력자가 매우 부족한 헌터들은 초원을 정리하고, 성벽 안쪽에 있는 몬스터를 정리하고, 그 후에 하이시스를 상대하며 또 몇 년이나 시간을 소비했을 것이다.
“운이 좋아 일이 다 잘 풀려 지금처럼 진행해도 기습 작전도 실패했겠죠.”
기습 작전도 실패했을 것이다.
하이시스는 자신의 꿈이었던 차원 이동을 6서클 마법사, 7서클 마법사, 그리고 마법을 모르는 정령왕이 사용했다는 것.
평생을 걸쳐 숙원(宿願)을 이룬 자신의 꿈을 자신보다 낮은 이가 실현시켰다는 것에, 마법을 모르는 정령이 실현했다는 것에 놀라고 절망하고 이해를 하지 못해 틈을 만들었다.
만약 한율이 홀로 차원의 문을 이용한 습격 작전을 펼쳤다면 어땠을까.
하이시스는 빈틈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세 명이 자신의 숙원을 이뤘다는 것과 한 명이 ‘이능’이 존재하는 다른 차원에서 자신의 숙원을 이뤘다는 것이 전해 주는 느낌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지구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퀘스트였네. 이거.”
“그래서 차원의 문이라는 스킬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중얼거렸던 한율이 옆에서 들려오는 언소월의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 거래 대상이 늘어나는 쪽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차원 거래 능력은 차원의 문으로 진화했다.
다른 차원의 도움을 받아야 해결할 수 있는 퀘스트라는 것을 알려 주듯이 말이다.
“아, 몰라. 일단 끝났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한율이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자 양옆에 앉아 있던 레스트와 언소월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고, 에리얼이 다시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펐다.
“그런데 한율 님.”
“네?”
“언제 시작하실 겁니까?”
“응? 시작이요?”
시작?
뭘?
한율이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자 질문을 던졌던 레스트도 고개를 갸웃하며 상대를 바라봤다.
“차원의 도시 계획.”
“……아.”
SS등급 게이트를 클리어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다.
SS등급 게이트라는 퀘스트가 진행되기 전부터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던 계획.
차원의 도시.
차원의 벽에 생성된 게이트가 지구로 넘어오기 전에 소멸시켜 지구를 안전하게 만드는 계획.
차원의 도시 계획.
멍하니 레스트를 바라보던 한율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한 달.”
“예?”
“딱 한 달만 쉬고 시작하죠.”
***
SS등급 게이트라는 이름의 퀘스트가 시스템 ‘퀘스트’에서 사라지고 한 달.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한 한율은 다시 움직였다.
헌터 협회를 방문하고, 청일 그룹을 방문하고.
스킬, 차원의 문(진)이 아닌 스킬, 차원의 문을 이용해 레스트를 만나 차원의 도시 계획에 관심을 가진 국가의 대표를 만나고, 언소월의 도움을 받아 각파(各派)의 맹주들을 만나고.
오전에는 마탑의 대표로서 마법사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협력자들과 함께 차원의 도시 계획을 진행하고.
이게 사는 건가…….
직접 계획하고 진행하는 일이기에 그런 말을 매일매일 입에 담았지만 한율은 멈추지 않았다.
***
지구 최악의 위기라 불리었던 SS등급 게이트가 소멸하고 1년.
일찍 퇴근한 이들이 치킨을 먹으며 예능 방송을 시청할 때.
야근이 있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오른 회사원, 학생들이 스마트폰을 만지며 집으로 향할 때.
게이머들이 일찍 사망해 게임창을 최소화하고 인터넷에 접속해 시간을 때울 때.
필요한 것이 있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인터넷에 들어가 쇼핑몰을 찾을 때.
그때,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일이 벌어졌다.
예능 방송이 끝나고 광고가 시작해 리모컨을 들었던 이들이 리모컨을 다시 내려놓았다.
인기 급상승 영상에 익숙한 얼굴이 나와 사람들이 그 영상을 클릭했다.
즐겨찾기에 추가된 쇼핑몰을 클릭하려던 사람들이 유명 포털 사이트 배너에 익숙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광고가 보여 인터넷에 접속한 사람들이 그 광고를 클릭했다.
광고 시청 방법은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광고를 시청했다.
[어,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법사, 한율입니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이렇게 영상을 올립니다. 아, 광고라고요? 근데 광고할 필요가 있나요? 아, 있다고요. 자꾸 대답하지 말라고요. 알았어요. 알았어.]
마법을 공개할 때, 무공을 공개할 때를 떠올리는 영상.
피식 실소를 터트린 사람들이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 한율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영상에 집중했다.
[제가 오늘 전달하는 이야기, 아니 광고는 SS등급 게이트가 시작되기 전부터 준비한 것입니다. 차원의 도시라는 계획인데 일단 영상을 시청하고 다시 전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