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가짜 숭례문(1)
퀘스트 생성 1년.
레스트는 정령왕의 이름을 빌린 최상급 정령, 계약을 맺고 지상으로 내려온 정령, 그리고 정령사를 대동한 채 드래곤을 찾아갔다.
문제는 없었다.
최상급 정령이 자신의 존재를 걸고 정령왕의 말을 전달했고, 드래곤들 또한 차원의 벽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스트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드래곤의 협조를 구하고.
찾아오는 정령왕의 명령을 받은 최상급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들을 반기고.
마지막으로 여행을 다니며 맺은 인연들에게 연락을 보내고.
레스트는 그렇게 동료를 모았다.
드래곤도 다르지 않았다. 중간계의 수호자라 불리는 그들은 직접 국가를 방문해 오러 마스터, 대마법사를 차출해 갔다.
거절?
드래곤의 요청을 거절하는 국가는 없었다.
드래곤의 무력 때문이 아니다.
드래곤이 가진 칭호, 중간계의 수호자.
이 중간계의 수호자라는 칭호 때문에 국가는 드래곤의 요청을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퀘스트 생성 1년 6개월.
퀘스트를 완료한 레스트는 차원의 문(진) 스킬을 사용해 정령계로 이동했다. 물론 혼자 정령계로 이동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드래곤, 언데드 드래곤을 토벌하는 데 크나큰 공을 세운 드래곤들과 함께 이동해 정령왕들과 작전을 구상, 혼돈의 정령왕을 토벌했다.
불의 정령왕이 큰 부상을 입었고, 혼돈의 정령왕을 토벌하기 위해 중간계(레스트의 차원)에서 넘어온 다섯 드래곤 중 둘이 큰 부상을 입었지만 레스트, 그리고 에리얼은 혼돈의 정령왕 토벌에 성공했다.
퀘스트 생성 1년 9개월.
정보를 모아 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수색하던 언소월이 악황제의 무덤을 발견했다.
퀘스트 생성 1년 11개월.
명예, 공적, 그리고 다른 곳보다 앞서고 싶은 마음에 사파의 무인들이 악황제의 무덤을 공격, 악황제의 무덤에 숨어 있던 혈교의 반격으로 패배, 큰 피해를 입었다.
퀘스트 생성 2년.
1개월마다 악황제의 무덤을 공격하고 실패하자 언소월이 아군, 세외의 협력자(다른 차원의 지원군)과 함께 연합 본부를 방문했다.
퀘스트 생성 2년 2개월.
정사마 연합, 그리고 다른 차원의 지원군이 힘을 합쳐 악황제의 무덤을 공격했다. 정파, 사파, 마교의 대표가 큰 부상을 입고 말았지만 혈교를 섬멸하고 불안전하게 부활한 악황제를 소멸시켰다.
퀘스트 생성 2년 6개월.
정사마 연합 해산 직전, 언소월이 직접 다른 차원의 지원군과 함께 등장해 이들은 세외의 연합군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협력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혼란은 없었다.
언소월이 사실을 밝히는 것과 동시, 정체를 숨기고 있던 정령왕들이 정체를 드러내고 드래곤들이 폴리모프 마법을 해제해 본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
퀘스트 생성 2년 8개월.
스마트폰을 만지며 복도를 걷던 한율이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다. 당연히 그를 호위하던 경호원들도 걸음을 멈췄다.
경호원들이 힐끔 한율을 훔쳐봤지만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스마트폰 화면만 바라봤다.
“흐음, 개판이네요.”
“……예?”
“인터넷이요.”
“아아.”
경호원들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 것처럼 현재 인터넷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퀘스트가 생성되고 2년째가 되었을 때, A등급 게이트와 A+등급 게이트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각국의 S급 헌터, 그리고 A급 헌터가 모여 소멸시켰다.
초기 대응이 늦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A등급 게이트도, A+등급 게이트도 헌터들의 힘으로 소멸시켰다. 문제는 부상자가, 그리고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그걸 문제 삼아 외치기 시작했다.
A등급 게이트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는데 S급 게이트를 소멸시킬 수 있느냐!
S급 게이트는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절대 S급 게이트를 막지 못할 것이다!
장난스럽게 말한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한 개의 글은 오래 가지 않아 두 개로 늘어났다.
이후?
네 개, 여덟 개.
글은 빠른 속도로 생산되어 수십, 수백 개의 커뮤니티를 타고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다.
“안 그래도 바빠 뒤지겠는데.”
4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모두가 힘을 합쳐 막아 낼 생각은 않고 죽는다고, 몬스터에게 패배한다고 소리치고 있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한율이 스마트폰을 회수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경호원들과 함께 강의실로 이동, 여느 때처럼 마법사를 교육하고 연구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 선 한율이 굳게 닫혀 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봤다.
‘내버려 둘 수밖에 없나.’
정치권에서 글을 삭제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작성하는, 아니 사람들이 글을 복사해 퍼트리는 속도가 더 빠르다.
대체 몇십, 아니 몇백, 몇천 명이 이 글을 퍼트리고 있는 건지.
띵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한율은 경호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고, 4층에 도착해 홀로 연구실에 도착하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터넷 전쟁은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관여한다고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다른 사람들처럼 글을 삭제하는 것이 전부일 게 뻔했다.
“그러니 미루고.”
인터넷 전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한율이 스킬창을 열어 차원의 문(진)을 확인했다.
차원의 도시 계획에 차원의 동료들을 끌어들인 직후, 한율은 청일 그룹의 대표와 헌터 협회의 대표를 차원의 벽으로 끌고 갔다.
당황하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마법이 아닌 차원 거래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청일 그룹의 대표, 그리고 헌터 협회의 대표는 바로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차원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차원의 벽과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한율이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려는 두 사람에게 ‘보류’라는 대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하이시스가 지구에 아공간을 생성하고 그 아공간에 몸을 숨긴 것이 아닌, 차원의 벽에 아공간을 생성하고 그 아공간에 몸을 숨겨서였다.
차원의 돌을 흡수한 하이시스가 아공간을 탈출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움직일까.
바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까.
아니면 차원 이동 기술을 더욱더 쉽게 사용하기 위해 차원의 벽을 파괴할까.
한율, 레스트, 언소월, 그리고 에리얼은 오랫동안 고민했고, 그 끝에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아공간을 탈출한 하이시스는 차원의 벽에 남아 자신의 능력을 점검하고 그 후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것이다’라는.
아공간 내부에서 연습을 한다?
그럴 수도 있다.
아공간 내부와 아공간 바깥의 마나 밀도가 다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도시 계획은 모든 일이 끝나면 진행하고. 그리고 그때 공식적으로 도시 계획을 발표.’
속으로 중얼거리며 턱을 쓰다듬던 한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됐다.
한율이 연구실 안쪽에 위치한 휴게실로 이동, 차원의 문(진) 스킬을 사용했다.
오늘은 엘리베이터 문.
피식 실소를 터트린 한율이 차원의 문(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테이블을 만들고 의자를 만들고 있는 레스트.
“블링크.”
파앗.
이동 마법을 사용해 레스트 옆으로 이동한 한율이 레스트를 도와 테이블을 생성하고 의자를 생성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할 일을 마친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에리얼, 언소월이 차원의 문(진)을 사용해 차원의 벽으로 넘어왔다.
레스트가 칠판을 만들었고, 한율이 거래창을 열어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그럼.”
글보다는 그림이 더 설명하기 편해 회의를 할 때마다 칠판을 만든 레스트였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
청일 그룹 본사.
대표의 부름을 받아 본사를 방문한 청일 건설의 사장, 이상필이 땀을 훔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무슨 일로 부르는 거 같습니까?”
청일 그룹의 사람이다. 그것도 사장이고 현 대표, 이상민의 친척이다. 하지만 이상필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상민과 함께 이상남의 교육을 받았다.
이상필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자신의 비서에게 존댓말을 사용해 물었고, 그런 자신의 사장님을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그린 30대 초반의 남성이 대답했다.
“모릅니다.”
“아니이. 모른다고 하면 어떡합니까.”
“진짜 모릅니다. 3년 전부터 청일 그룹은 소규모 건설만 수주받지 않았습니까.”
3년 전, 이상필은 이상남에 연락을 받았다.
소규모 건설만 수주하라는 이상한 연락을 말이다.
S급 게이트, 정확하게는 지구가 게이트화되는 것이다. 정계 고위 인사들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군사 기지 건설을 의뢰했고, 수많은 재계 고위 인사들이 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그 의뢰를 받아 전국 곳곳에 군사 기지를 건설했을 때 날아온 이야기다.
이상필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상남의 요청을 받았고, 그렇게 3년 동안 소규모 건설 사업만 받아 사업을 이어 가고 있었다.
띵동.
익숙한 엘리베이터 알람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어서 오십시오. 이상필 사장님.”
“아이구. 제가 뭐라고 여기까지 마중을 나오셨습니까.”
이상필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배희연을 따라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네고 물었다.
“저기 배희연 헌터님.”
“예. 이상필 사장님.”
“혹시 무슨 일 때문에 저를 찾으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외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사업이다 보니 대답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일단 알고 계시다는 것이군요.”
방긋 웃으며 중얼거리는 이상필.
역시 건설사 사장은 사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을 터트린 배희연이 이상필과 함께 대표실로 향했다.
똑똑똑.
“청일 건설, 이상필 사장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와.
노크를 하고 보고를 하고.
대표실 안쪽에 있는 누군가가 보고를 듣고 대답하고.
이상필이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예. 들어가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