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한율과 레스트(1)
대륙의 서부.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하던 레스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천막 아래에 모여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모닥불 주변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오늘 언데드 드래곤을 토벌, 아니 사냥하는데도 긴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오러마스터, 대마법사 등 정상, 또는 정상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레스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간다.”
“아니, 이미 은퇴하고 수면을 취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무슨 여행입니까.”
“어허! 아직 끄떡없어!”
“끄떡없기는! 일어날 때마다 허리 붙잡고 신음 흘리더만!”
“쓰읍!”
한자리에 모여 쑥덕거리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차원의 문.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언데드 드래곤에게만 집중하던 중간계 수호자, 드래곤들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호기심.
흥미.
이유는 다양하다.
문제는 모든 드래곤이 차원 여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간계의 수호자.
당연히 누군가는 대륙에 남아야 지켜야 하니까.
“애들 보는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 짓이야.”
퍼억! 퍼억!
곰방대를 강하게 휘둘러 성년이 된 드래곤, 그리고 중년층 드래곤의 정수리를 가격한 골드 드래곤, 크라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할아버지!”
“영감님!”
“삼촌!”
퍼억! 퍼억!
다시 곰방대를 휘둘러 드래곤들의 정수리를 다시 한 번 가격한 크라이스가 느긋하게 걸어 레스트에게 다가갔다.
“잘 잤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물건은?”
“아, 언소월 님, 그리고 에리얼 님의 물건은 도착했습니다.”
“한율이라는 놈은?”
“타이밍이 너무 나빴습니다. 30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레스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크라이스가 처음, 레스트가 바라보던 허공을 응시했다.
1년.
중간계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수색 범위를 축소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추적을 대비한 것인지 언데드 드래곤은 자신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워 수색 범위를 축소했음에도 아공간을 찾는 데 1년이나 걸리고 말았다.
“그래도 찾기는 찾았군.”
“예. 찾았습니다.”
짧은 대답과 함께 다시 몸을 돌린 레스트가 크라이스와 함께 허공을 응시했다.
“그래서 순서가 어떻게 되었다고 했지?”
“언데드 드래곤, 혼돈의 정령왕, 악황제, 그다음 하이시스입니다.”
“흐음. 하이시스를 먼저 쓰러트리는 것은 역시 어렵고?”
“예. 차원의 벽이 충격파를 견딜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하이시스를 차원, 차원의 벽에 묶은 상태로 전투를 치를 수는 없다.
멀리 떨어뜨려 놓은 상태에서 싸운다?
아무리 멀리 떨어뜨려 놓은 상태에서 전투를 시작해도 하이시스는 ‘지성을 갖춘 언데드’라 불리는 리치다. 당연히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을 고를 것이고, 그 전장은 차원의 벽 인근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예. 말씀하십시오.”
“뭐 때문에 늦는다고 하냐?”
“아.”
요청하자마자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준비한 물건을 전달한 언소월, 에리얼과는 다르게 한율은 시간을 요청했고, 그렇게 그에게 받아야 할 물건이 도착하지 않아 전투 준비가 끝났음에도 언데드 드래곤 사냥을 못 하고 있었다.
“게이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저번에 말하던 S급?”
“아뇨. A+등급이라고 합니다.”
***
“쯧!”
혀를 찬 한율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는 위험에 처한 헌터의 앞에 나타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아닌 소총, K-99를 크게 휘둘렀다.
콰앙!
금속으로 이루어진 소총이 나무 몽둥이를 강하게 후려쳤다. 살짝 금이 가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나무 몽둥이는 멀쩡했고, 그 나무 몽둥이를 휘두른 몬스터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을 끝으로 다시 나무 몽둥이를 휘둘렀다.
12월 26일.
퀘스트가 생성되었던 12월 26일.
A+등급 게이트가 나타났다.
걱정하는 나라는 없었다. 마법, 그리고 무공이 개방되면서 헌터들의 무력 또한 매우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A-등급, 그리고 A등급 게이트와 A+등급 게이트는 차원이 달랐다.
A-등급 게이트가 조금 위험, A등급 게이트가 위험이라면 A+등급은 매우 위험한 등급이었다.
무공 또는 마법을 통해 능력을 한 단계 상승시킨 A급 헌터 세 명이 모여야 쓰러트릴 수 있던 A등급 몬스터가 아니다.
A+등급 게이트에 서식하는 몬스터는 A등급보다 한 단계 높은 A+등급 몬스터.
그렇다면 무력만 높은 몬스터냐.
아니다.
놈들은 홀로 헌터를 상대하지 않았다. 최소 셋이 뭉쳐 헌터들을 공격했고, 어리숙하지만 지형까지 이용하여 헌터들을 상대했다.
가디언 또한 만만치 않았다. 등급으로 따지면 S+등급으로 분류된다고 판단될 정도로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결과?
A+등급 게이트가 나타난 프랑스는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S급 헌터 2명 사망이라는 매우 심각한 피해였다.
부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아닌, 바람을 짓뭉개는 소리를 일으키며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거대한 몽둥이.
신장은 일반 오크의 세 배.
변종, 또는 진화를 해야만 마나를 다루는 오크들과는 다르게 마나를 다루는 A+등급, 레드 오크.
한율이 황급히 손을 뻗어 쓰러져 있던 헌터의 어깨를 잡았다.
“블링크.”
파앗!
빛의 폭발과 함께 한율, 그리고 헌터가 사라졌다.
콰아아앙!
그 이후, 아슬아슬하지만 빛이 일어난 공간을 가르고 지면과 충돌한 거대한 나무 몽둥이.
“진짜 볼 때마다 소름이 돋네요.”
“동의합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막아 내지 못할 거 같습니다.”
공격 한 번에 거대한 구덩이를 만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한율이 빠르게 소총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헌터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양손으로 롱소드를 잡고 적을 노려봤다.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관리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고개를 끄덕인 금발의 프랑스 청년, S급 헌터 제이든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흐릿한 잔상을 남긴 채 모습을 감춘 제이든이 레드 오크의 옆에 나타나 롱소드를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는 A+등급 게이트에 서식하는 몬스터였고,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오크.
날카로운 칼날이 피부에 닿기 직전, 레드 오크가 붉은 마나를 끌어올렸다.
콰아앙!
다시 한 번 일어난 폭발.
뒤로 튕겨 나간 제이든이 바닥을 구르며 레드 오크에게서 멀어졌다.
마나를 끌어올려 막아 냈지만 완벽하게 방어한 것은 아니었는지 옆으로 주춤 물러선 오크가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로 살기를 끌어올렸다.
타앗!
프랑스의 S급 헌터, 제이든이 다시 사라졌고, 레드 오크가 바로 마나를 끌어올려 대응했다.
콰앙! 콰앙!
S급 헌터와 A+등급 몬스터의 전투.
한율이 두 사람, 아니 두 종족의 전투를 잠시 지켜보다가 제이든에게 보조 마법을 걸어 주고 고개를 돌렸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레드 오크와 싸우고 있었다.
‘문제는 없을 거 같고.’
팀을 이룬 헌터들이 있었고, 제이든처럼 일대일 싸움으로 레드 오크를 상대하는 헌터들이 있었다.
팀을 이룬 헌터와 팀을 이루지 않은 헌터의 차이점은 등급.
먼저 팀을 이룬 A급 헌터들을 쭈욱 둘러본 한율이 보조 마법을 걸어 주고 팀을 이루지 않은 S급 헌터들을 확인하고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헤이스트, 스트랭스, 실드!
보조 마법을 걸어 주고 방어 마법을 사용해 위험에 처한 헌터들을 도와주고.
콰앙!
거대한 폭발.
고개를 돌린 한율이 뒤로 주르륵 밀려난 레드 오크, 상대하던 헌터와 멀어진 레드 오크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방아쇠는 당기지 않았다.
“어스 핑거!”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레드 오크가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레드 오크는 S급 헌터, A급 헌터들과 싸우며 대량의 마나, 그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쉴 정도로 체력을 소모한 레드 오크.
땅속에서 솟아오른 흙으로 이루어진 가시가 레드 오크의 팔다리, 그리고 가슴을 관통했다.
“취이이익!” 커다란 비명을 지르는 레드 오크.
“흐읍!”
롱소드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앞으로 달려 나가는 헌터.
한율이 목이 잘려 나간 레드 오크를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위험에 처한 헌터, 또는 빈틈을 보이는 레드 오크를 찾기 시작했다.
-9시 방향, 15마리가 진격하고 있습니다.
보조 마법, 방어 마법, 공격 마법으로 한참 아군을 지원하고 있을 때에 들려오는 목소리.
한율을 비롯한 후방에 배치된 헌터들이 고개를 돌렸다.
레드 오크 게이트는 초원 지형 게이트.
저 멀리 회색 구름이 보였다.
한율이 마나를 끌어올려 감각을 강화, 다시 한 번 9시 방향을 살폈다.
피 냄새를 맡은 건지, 아니면 동족의 울음소리를 들은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헌터의 보고대로 열다섯 마리나 되는 레드 오크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시간을 벌까요, 아니면 피해를 줄까요.”
착용하고 있던 무선 이어폰을 통해 한율이 두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A+등급 게이트 소멸 작전을 위해 각국의 S급 헌터, A급 헌터들이 모였다. 하지만 프랑스에 나타난 A+등급 게이트였기 때문에 작전 팀 지휘권은 프랑스의 S급 헌터, 제이든이 가지고 있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S급 헌터, 제이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에 레드 오크와 싸워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지만 지원군의 도착으로 전투가 연장된 상태다.
“후우. 둘 다 가능하겠습니까?”
한율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묻는 제이든을 돌아봤다. 갑작스러운 전투의 연장으로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걸음을 옮기는 그였다.
한율이 실소를 한 번 터트리고 주문을 외웠다.
“디그.”
쿠우웅!
굉음과 함께 발생한 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