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드래곤(4)
‘괴인이 있지.’
요괴를 섭취해 요괴의 힘을 얻은 요인.
몇 차례에 불과하지만 요인들과의 전투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잠시 요인들을 떠올렸던 언소월이 다시 걸음을 옮겨 정(正)이라는 글자가 적힌 문 앞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진주언가의 언소월입니다.”
“……아.”
진주언가의 언소월.
언가의 저주를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 술법이라는 길을 찾아 명성을 얻고 있는 도술사.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던 문지기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가문의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군사부에 전달하고자 합니다.”
“등급을 알 수 있겠습니까?”
“2급.”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진주언가의 이름으로 방문했다고 해도 중요 등급이 3급 이상이었다면 며칠 정도 기다려야 했지만 중요 등급이 2급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동료에게 자리를 맡긴 무인은 안으로 달려갔다.
문지기가 떠나 자연스럽게 자리에 남아야 했던 언소월이 몸을 돌려 스무 명이나 되는 가문의 문들을 바라봤다.
“언양.”
“예. 도련님.”
“근처에 가문이 관리 또는 운영하는 객잔이 있습니까?”
“진원이라는 객잔이 있습니다.
“셋, 아니 다섯만 남고 모두 진언 객잔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십시오.”
“…….”
무력만 따지자면 언소월은 방계를 포함해 가문에서 가장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천재적인 군사였고 다른 도술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다양한 술법을 구사하는 술법사였다.
물론 그것만으로 스무 명이나 되는 무인들이 언소월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배려를 할 줄 알았다. 신분을 보지 않고 오로지 사람을 바라보며 상대에 맞춰 예를 갖췄다.
“알겠습니다.”
언양은 바로 명령을 받아 무인들을 진원 객잔에 보냈다.
“가셔도 됩니다만.”
언소월이 호위 임무를 넘겨받은 부대장, 언양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어색한 미소를 그리는 것도 잠시,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그린 언소월이 다시 몸을 돌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십 장이나 되는 전서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이가 있었고, 파손된 무구를 수리하기 위해 거대한 수레를 끌고 있는 이가 있었다.
명령을 받은 것인지 빠른 속도로 본부를 빠져나가는 무인들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사람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언소월이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본부로 달려갔던 문지기가 새하얀 남자 문관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군사부 사군사 직책을 맡고 있는 제갈궁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진주언가의 언소월이라 합니다.”
“편지를 가져왔다고 들었습니다.”
“2급 편지입니다.”
“……암호 편지입니까?”
“아뇨. 술법 편지입니다.”
“봉인 해제자는?”
“접니다.”
“……아. 아아. 이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를 구한 제갈궁현이 언소월, 그리고 언가의 무인 다섯을 군사부로 안내했다.
문서를 확인하자마자 찢어 버리는 이가 있었고, 문서를 분류해 한쪽은 보고, 한쪽은 파기를 하는 이가 있었다. 열심히 붓을 놀리는 이도 있고 거대한 지도 앞에 모여 회의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문지기가 한 것처럼 양해를 구한 제갈 궁현이 홀로 지도 앞에 모여 있는 군사들에게 걸어갔다. 그는 똑같은 새하얀 문관복을 입은 노인에게 보고했고, 보고를 받은 노인은 적색, 회색, 그리고 흑색 문관복을 착용한 노인들과 함께 언소월에게 다가왔다.
“군사부 소속, 동(東)군사 직책을 맡은 제갈진이라고 합니다.”
“진주언가의 언소월입니다. 여기 편지입니다.”
제갈궁현이 상급자에게 보고하러 가는 사이, 그 사이 내공(마나)을 부여해 봉인을 해제했다. 언소월은 바로 문서를 넘겨받았고, 감사 인사를 전한 제갈진은 다른 군사들이 볼 수 있도록 양팔을 쭈욱 편 상태로 편지를 펼쳤다.
처음에는 무덤덤했던 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언 공자.”
“예. 제갈진 동군사님.”
“편지 내용을 읽어 보았습니까?”
“아뇨. 술법이 걸려 있어 읽지 못했습니다.”
“흐음,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
가족들에게 모든 내용을 공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중요한 내용은 미리 전달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 활동하는 것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본부에는 무인이 많다.’
정사마 연합 본부를 지키는 일이다. 그러니 2급 기밀 문서를 읽고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 이유는 둘 중에 하나다.
강시와 관련된 내용이거나…….
“술법사의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까?”
“…….”
언소월이 물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군사들이었지만 바로 상대방이 누구인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 대의 언가의 저주는.”
“기술이 아닌 능력 중 하나, 뛰어난 지혜였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군사들.
군사들의 칭찬에 민망한 표정을 지었던 언소월이 다시 미소를 그리고 말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내용을 듣지 않고 말입니까?”
“이미 다른 술법사가 있는데도 저에게 편지를 맡긴 것을 보면 이야기는 대충 정리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허허허. 그건 그렇군요.”
요괴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자 술법사를 모집하기 위해 수많은 가문, 그리고 문파가 움직였다. 당연히 진주언가에서도 술법사를 모집했고 말이다.
“그럼 군사부의 이름으로 진주언가의 술법사, 언소월 공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
드래곤의 도움을 받아 낸 레스트가 언데드 드래곤을 쫓아 바쁘게 움직이고.
무림 본부에 도착한 언소월이 실력을 기르고 다른 거래자들의 요청에 따라 물건을 구입하며 보낼 때, 한율도 매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끄아아악.”
한율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그의 경호를 맡은 헌터들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진짜 더럽게 힘들었다.”
등급이 높은 소수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호 팀 또한 무공을 배워 실력이 상승했고, 한율 또한 6서클 마법사로서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 헌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등급이 낮은 다수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등급이 낮다고 해도 몬스터는 몬스터이기 때문에 놈들의 공격은 매우 위험했다.
여기서 끝이냐. 아니다.
“왜 하필 벌레냐고.”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는 장소 바로 옆에 게이트가 나타났기에 국가 소속 헌터들에게 맡기는 대신 그들에게 연락해 의뢰를 받고 게이트에 진입했다.
C등급 게이트였으니 그냥 몸을 푼다는 느낌으로 들어갔지만 상황은 달랐다.
그것도 무척이나 달랐다.
“벌레들이 기어 나오는 거. 꿈에서도 나올 거 같습니다. 선배님.”
“야. 너는 그마나 낫지. 나는 근접이어서 걔네 체액을 뒤집어썼다. 한율 님이 도와줘 몸을 씻기는 했지만.”
찝찝한 것은 찝찝한 것이었다.
강제된 라바 게이트.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이해할 수 있었다.
진화하지 못하는 애벌레 게이트.
끔찍했다.
크기는 얼마나 큰지 건장한 남성조차 위를 올려다봐야 할 정도.
독성이 가득 담긴 체액을 뿜었고, 죽어서도 체액을 뿌려 적을 공격했다.
“몸이 반 토막 났는데도 꿈틀거리던 애벌레.”
“우웩!”
휴식을 취하던 헌터 중 한 명이 헛구역질을 했다.
“도련님.”
청일 그룹 소속 헌터가 한율을 불렀다.
“예?”
“정신 건강에 너무 해로운 게이트입니다.”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이대로 게이트 소멸 작업을 진행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하지만 의뢰를 받았는데요?”
“그러니까요.”
“…….”
그러니까요.
왜 받았냐.
그 뜻을 이해한 한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태산을 바라봤다.
“동의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니까요.”
그러니까요.
왜 동의했을까요.
그 뜻을 이해해 실소를 터트리고만 한율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다섯 번 중 한 번이다. 하지만 게이트 자체가 너무 끔찍하다 보니 헌터들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그만하죠.”
“후우.”
“하아.”
“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헌터들이 고개를 돌려 한율을 바라봤다.
“여기서 쉽니다.”
“……집에 안 돌아갑니까?”
“의뢰 받았잖아요.”
“아.”
의뢰를 받은 이상, 그 의뢰는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해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번 게이트는 지원이 필요한 게이트가 아니었다.
“하아. 왜 찬성했지.”
가족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 한숨을 푹 내쉬며 스마트폰을 꺼내는 헌터.
“하, 하하. 하하하.”
내일 또 강제된 라바 게이트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넋을 놓고 있는 헌터.
한율이 그런 헌터들을 따라 잘못된 선택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전화를 하던 헌터는 물론 문자를 하던 헌터, 멍하니 휴식을 취하던 헌터들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한율 또한 자신의 스마트폰이 진동한 것을 느꼈기에 자연스럽게 폰을 꺼냈다.
내용은 단순하다.
B등급 게이트의 출현.
대한민국이 아니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기 위해 방문한 중국에 출현한 B등급 게이트.
아직 A등급 게이트를 소멸시키지 못한 중국의 상황을 떠올린 한율이 고개를 돌려 경호 임무를 맡은 헌터들을 바라봤다.
B등급도 있지만 A등급이 더 많다.
헌터들은 무공을 배우고, 그 무공을 자신의 능력에 접목시켜 한 단계 높은 무력을 손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자를 한 번 확인하고 헌터들을 한 번 확인하던 한율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르르릉. 딸칵.
-예. 한율 님.
“아, 오랜만에 연락해서 조금 죄송하네요. 부협회장님.”
중국 헌터 협회의 부협회장, 창웨이.
-아닙니다. 많은 일을 동시에 하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B급 게이트가 나타났다는 문자를 받아서요. 확인해 보니까 B+등급이던데.”
-아, 예. 그런데 그건 왜.
“혹시 인원이 부족하다면 도와드릴까 하고.”
헌터들이 고개를 홱 돌렸다.
-어, 괜찮겠습니까?
“네. 그런데요.”
-예. 말씀하십시오.
누군가는 인상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한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에 그들은 엄지를 척 하고 들었다.
“제가 지금 중국의 의뢰를 받아 C등급 게이트 소멸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여기서 게이트 소멸 의뢰를 하나 더 받으면 조금 힘들 거 같아서 혹시 의뢰 교체가 가능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