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드래곤(1)
레스트가 눈을 가늘게 뜬 상태로 눈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최상급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탓인지 하늘색에 가까운 푸른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2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정령사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아모스 제국의 삼황녀.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황성을 벗어나지 않는 황족.
황제의 기사단이 직접 선별한 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의 주인.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기사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레스트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기사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천천히 포크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올린 제국의 삼황녀, 리시아만 바라봤다.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네. 아모스 제국의 삼황녀, 리시아입니다.”
“용병, 레스트입니다.”
“…….”
“…….”
표정 변화는 없다.
리시아뿐만이 아니다. 여관을 점거한 기사단, 화이트 로즈 소속 기사들 또한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이미 내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
7서클 용병 마법사.
국가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몬스터와 관련된 의뢰를 받아 활동하는 용병 마법사.
세상이 알고 있는 자신의 정보를 떠올린 레스트가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여관을 점거한 기사들 때문인지 자신이 내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도망쳤다. 누구는 2층으로 도망쳤고, 누구는 그대로 여관을 빠져나갔다.
“방음 마법을 사용해야 합니까?”
“아뇨.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아모스 제국 도서관 주변에 있는 페가수스 여관에서 레스트라는 마법사를 찾았다. 그게 세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레스트의 시선이 최상급 바람의 정령, 세실에게 향했다.
[이걸 지금 알려야 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요.]
“그건 그렇군요.”
언데드 드래곤을 토벌하기 위해 드래곤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레스트는 고민 끝에 대답을 미룬 세실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리시아 황녀를 바라봤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던 레스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리시아 황녀에게 설명했다.
“드래곤을 찾으러 갈 생각입니다.”
“……네?”
“드래곤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드래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정령왕, 에리얼 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요청을 받아들인 에리얼 님께서는 제게 최상급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를 보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자, 잠시만요.”
리시아 황녀가 황급히 손을 들어 레스트의 입을 막았다.
“드, 드래곤이요?”
“네. 드래곤.”
“……중간계의 수호자이자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드래곤이요?”
“예. 중간계의 수호자라 불리는 마법의 종주, 드래곤입니다.”
“왜요?”
“말씀드렸다시피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
최상급 정령의 부탁을 받았을 때, 리시아 황녀는 생각했다.
아주 흥미로운 사건에 휘말리겠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한 것은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중간계의 수호자, 드래곤.
정령들의 왕.
그런 존재들이 엮인 사건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리시아 황녀만이 아니다. 화이트 로즈 기사단 소속 기사들 또한 예상 밖이었는지 입을 쩍 벌린 채로 레스트를 바라봤다.
“세, 세실? 저 말이 사실이야?”
[응. 사실이야. 레스트 님은 현재 어머니, 그리고 다른 왕님들과 협력해 사건을 해결하고 있어.]
“……왕?”
[응. 왕.]
“인간들의 왕?”
[아니. 정령들의 왕.]
정령은 자신과 계약한 계약자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리시아 황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레스트를 바라봤다.
“……여기서 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요?”
“상관없습니다. 협력은 최상급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니까요.”
“…….”
드래곤, 그리고 정령왕이 엮인 일이다. 그러니 여기서 대화를 멈춰야 했다.
“먼저 이야기를 듣고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으음, 상관없습니다. 단 자리를 옮겨야 할…….”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다. 그러니 여관이 아닌 다른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자리 이동을 제안하려던 레스트가 갑작스레 입을 닫고 여관 문을 바라봤다.
끼이익.
여관의 문이 열렸다.
화이트 로즈 기사단은 여관 내부만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여관 밖에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스르릉.
자연스럽게 검을 꺼내 드는 화이트 로즈의 기사들, 그녀들이 여관을 찾은 이들을 확인하고 몸을 흠칫 떨었다.
황금색 갑옷, 투구를 착용한 기사들이 여관에 발을 디뎠다. 그들은 잠시 무기를 꺼내 든 화이트 로즈 기사단을 바라보다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벅저벅.
다시 들려오는 사람의 발소리.
레스트가 문을 빤히 바라봤고, 리시아 황녀가 문을 빤히 바라봤다.
저벅저벅.
한 소년이 발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황금색 갑옷, 투구를 착용한 기사들처럼 금색 관복을 착용한 금발의 소년.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금발의 소년이 레스트, 그리고 리시아 황녀의 앞에 멈춰 섰다.
“신성 연합의 대표, 테이가 제국의 삼황녀, 그리고.”
고개만 꾸벅 숙여 리시아 황녀에게 인사를 건넨 테이가 몸을 틀어 레스트를 바라봤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것도 잠시, 테이가 ‘허리’를 숙였다.
“영웅, 레스트 님을 뵙습니다.”
***
제국의 황녀에게는 고개를 숙였다.
이해는 한다.
국가는 아니지만 모든 교단의 대표라 부를 수 있는 신성 연합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신성 연합 대표가 7서클이라고 해도 용병에 불과한 마법사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만.”
“레스트 님께서는 대륙에 닥쳐 온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러니 영웅입니다.”
“…….”
“뭐, 신성 연합 한정이지만요.”
빙긋 웃으며 말을 한마디 덧붙인 테이가 의자 두 개만 놓인 테이블을 확인하고 잠시 고민하자 그 뒤를 따르던 태양의 교단 소속 성기사가 의자를 가져왔다.
“앉으십시오, 성자님.”
성자.
신성 연합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 테이를 바라봤다.
“태양의 성자, 테이.”
“조금 창피한 이야기지만 리시아 황녀님이 말씀하신 대로 태양의 성자라 불리고 있습니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답한 테이가 다시 레스트를 바라봤다.
“영웅의 도움이 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거대한 어둠을 품은 불사의 존재가 진화의 돌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불사의 존재를 소멸시키고 진화의 돌을 회수하기 위해 여행하는 영웅이 움직이고 있다. 이 정도입니다.”
“……필요한 이야기는 전부 들었군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레스트가 눈동자만 움직여 성기사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한 것인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생각보다 위험한 임무라는 생각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이가 있다.
‘흐음.’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각국의 마스터, 그리고 대마법사들의 지원을 받을 생각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드래곤들의 협력을 받은 이후에 진행하고자 했다.
지금 자신이 벌이는 일 자체가 드래곤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
리시아 황녀 측은 물론 성자, 테이 측 사람들까지 고개를 돌려 레스트를 바라봤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
“이게 몬스터의 뼈를 녹인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몬스터 중에는 재료로도 쓸 수 없는 몬스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몬스터는 전부 이 약품을 사용해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유리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살피던 한율이 과학자에게 물었다.
“마나가 섞였네요?”
“예. 정확하게는 마석이 섞였습니다.”
“마나, 또는 마석을 사용하지 않은 약품은 없을까요?”
“예?”
“효과가 떨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오로지……. 과학 기술이라고 해야 하나?”
과학 쪽은 아는 게 없어 단어 선택에서 잠시 막혔던 한율이 다시 과학자에게 물었다.
“마석, 마나를 사용하지 않은 산성 약품이요. 없을까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효과가 10분의 1에 불과합니다만.”
“볼 수 있을까요?”
“으음, 예. 따라오십시오.”
과학자가 몸을 돌렸다. 그는 한율을 안내해 어느 연구실로 향했고, 연구 중이던 과학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손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막고 유리 냉장실 앞으로 이동했다.
“아페스라는 약품입니다.”
“아페스?”
“몬스터, 게이트의 등장 이후, 미국의 아페스라는 과학자가 개발한 산성 약품입니다. 게이트와 몬스터가 등장한 이후부터 마석 가공 연구가 완성되기 전까지 몬스터 처리 약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흐음.
무릎을 살짝 굽힌 한율이 냉장고 안에 담긴 유리병, 정확하게는 그 유리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빤히 바라봤다.
마나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거요.”
“예. 한율 님.”
“만들기 어렵나요?”
“어렵지는 않습니다. 슬라임이 재료여서.”
“…….”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고 있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위로 들어 올린 한율이 과학자에게 물었다.
“슬라임이요?”
“예. 슬라임입니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데요?”
“슬라임은 사망하고 24시간 후, 마나를 배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특수한 약품을 사용해 냉동시킨 후에, 뜨거운 물에 천천히 녹여야 하지만요.”
“그렇군요.”
특수한 약품, 그리고 슬라임이라는 재료가 필요하지만 분명 레스트의 요청대로 마나가 담기지 않은 산성 약품이었다.
“이 아페스를 구입하고 싶은데 얼마나 구입할 수 있을까요?”
“구할 수는 있습니다만.”
“한 병에 얼마죠?”
“3만 원입니다.”
“…….”
비싸다고 해야 할까 싸다고 해야 할까.
몬스터의 사체를 처리하는 약품이었기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던 한율이 물었다.
“얼마나 구할 수 있을까요?”
“으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율에게 양해를 구한 과학자가 걸음을 옮겼다. 그는 비어 있는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마우스를 흔들었고, 검은 화면에 아름다운 사진이 나타나자 키보드 위에 양손을 올려 비밀번호를 쳤다.
비밀번호를 적어 화면을 바꾼 그는 어느 프로그램에 들어간 다음 좌측 상단에 커서가 깜빡이는 검색란에 ‘아페스’라는 단어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