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순서(2)
“한율 씨의 차원은 아예 퀘스트를 진행할 수 없으니.”
한율은 퀘스트를 완수하지 못한다. 퀘스트 완료 조건 자체가 게이트나 생성된 이후, 즉 지구의 게이트화가 이루어진 후에야 퀘스트를 완료해 차원의 조각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스트 씨요?”
“응. 레스트 씨.”
“……어, 레스트 씨는 개인으로 활동한데요?”
레스트는 어디에도 소속을 두지 않고 활동하는 용병 마법사다.
용병 마법사라는 직업과는 달리 그가 가진 힘이 매우 강력했지만 그는 홀로 움직이는 마법사였기 때문에 퀘스트 진행 순서에서 한율과 마찬가지로 후위로 물러났다.
“드래곤.”
“음?”
“드래곤의 도움을 받으면 되잖아.”
“……오!”
언데드 드래곤을 쓰러트리기 위해 중간계 수호자, 드래곤의 도움을 받는다.
“그런데 과연 드래곤들이 레스트 씨의 말을 믿고 협력해 줄까?”
땅의 정령왕, 오리에드가 물었다.
“우리가 도우면 돼.”
“우리가?”
“응.”
“어떻게?”
“…….”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가 눈을 깜빡였다. 방법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방법을 떠올리고 대답했다.
“직접.”
“……우리가 내려가자고?”
“으으응.”
나이아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레스트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정령사 중, 정령왕과 계약할 수 있는 정령사는 없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최상급 정령.”
“최상급 정령?”
“응. 최상급 정령에게 우리들의 이름을 빌려줘.”
“…….”
정령왕과 계약이 가능한 정령사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최상급 정령과 계약해 활동하는 정령사는 존재했으니 최상급 정령의 도움을 받아 드래곤들에게 말을 전달하자.
“최상급 정령의 도움을 받아 우리들의 말을 전달한다라.”
땅의 정령왕, 오리에드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 계약을 맺은 최상급 정령을 찾으면 그만이니까.
***
하루에 한 번.
어려워도 사흘에 한 번은 차원의 문에서 만나 회의를 하기로 약속했다.
“순서 변경이요?”
“네.”
민트 초코 우유를 마시던 에리얼이 한율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혼돈의 정령왕에 대해 설명해 드릴게요.”
손에 들고 있던 민트 초코 우유를 원형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에리얼이 한율, 레스트, 그리고 언소월에게 설명했다.
자연의 질서를 어그러트리는 혼돈의 정령.
정령왕의 설득.
혼돈의 정령의 배신.
마지막으로 불, 물, 바람, 땅의 정령왕의 협공을 받아 봉인되는 것까지.
“즉, 현 정령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군요.”
“네. 레스트 씨의 말처럼 현 정령계의 힘으로 혼돈의 정령왕을 토벌하려 할 경우, 정령계는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해요. 하지만 레스트 씨의 차원은 이야기가 달라요.”
“드래곤의 조력을 받는다.”
“네. 최상급 정령사의 도움을 받아 드래곤과 접촉, 드래곤의 지원을 받아 언데드 드래곤을 토벌한다.”
“…….”
침묵이 흘렀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찾아온 침묵이었기에 에리얼이 당황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릴 때, 한율이 레스트에게 물었다.
“언데드 드래곤의 특징을 알 수 있을까요?”
“으음, 언데드 드래곤은 이름 그대로 언데드가 되어 버린 드래곤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자기 자신에게 흑마법을 걸어 불사의 힘을 손에 넣은 것이지요. 오로지 흑마법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신성력? 그런 거에 약하겠네요?”
“그렇습니다. 신성력, 그리고 빛 속성 마법에 매우 취약합니다. 그냥 리치 드래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 라이프 베슬도 따로 존재한다?”
“그렇습니다. 드래곤 하트가 라이프 베슬이라고 합니다.”
“드래곤들이 바라보는 언데드 드래곤은요?”
“반드시 죽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공간에 숨어 차원의 조각을 흡수하는 것이겠지요.”
“추적 방법은?”
“있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레스트가 뒷걸음을 쳐 테이블에서 멀어졌다. 그는 마법을 사용해 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판을 생성하고 그 판 위에 지팡이를 가져다 댔다.
“……그러고 보니 글이 문제군요. 그냥 말로 설명하겠습니다.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법의 종주, 중간계의 수호자라 불리는 드래곤이 돕는다고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의 도움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일단.”
잠시 설명을 멈춘 레스트가 고개를 돌려 에리얼을 바라봤다.
“정령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요?”
“우리 차원에도 중간계 정령이라 불리는 정령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정보를 모읍니다. 물론 일일이 중간계 정령을 찾아야 하니 시간이 매우 부족하지만 중간계 정령들에게 도움을 받아 추적이 가능합니다.”
중간계의 정령의 도움을 받아 언데드 드래곤을 추적한다. 물론 중간계 정령들이 도움을 줄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정령계가 나서는 거군요.”
에리얼의 중얼거림을 들은 레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계의 정령이 중간계의 정령에게 직접 물어 정보를 확보한다.
“그다음 언소월 님.”
“……점술(占術)입니까?”
“예. 저번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점술이라는 마법이 있다고 하셨지요. 매우 애매한 답변을 내놓지만 사용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 매우 애매한 답변을 내놓지만 점술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또는 원하는 미래를 미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법사……. 아니, 도술사죠. 도술사가 없어도 가능하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단 도술사의 기운, 그것도 고위 도술사의 기운이 담겨 있어야 하지만요.”
“구할 수 있습니까?”
“구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는 다르니까요.”
마법이라는 기술이 전파된 이후, 진주언가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오른 상태였다. 술법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마법은 정말 놀라운 술법의 일종이었기 때문이다.
언소월의 답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레스트의 시선이 이번에는 한율에게 향했다.
“어? 저도요?”
“예.”
“어, 음. 우리측에서 지원할 게 있나요?”
“있습니다. 단, 추적 지원이 아닙니다.”
“그러면?”
“산성력이 높은 포션.”
“…….”
“뼈조차 녹여 버릴 수 있는 산성력이 강한 포션을 확보해 주십시오.”
“…….”
한율이 입을 쩍 벌렸다.
“물론 신성력도 사용할 겁니다. 하지만 산성력이 강한 포션도 함께 사용할 겁니다. 이제 제 말을 정리하겠습니다.”
레스트가 고개를 돌려 에리얼을 바라봤다.
“정령계는 제가 살고 있는 차원의 정령사들과 연락을 취합니다. 당연히 연락을 취한 이유는 중간계 정령들의 정보 모으기.”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소월 님의 차원은 애매모호하나 언데드 드래곤의 수색 범위를 어느 정도 최소화시키기 위해 점술 부적을 공급합니다. 며칠 정도 걸릴 거 같습니까?”
“현재 도술사들이 대량의 점술 부적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직접 도술사를 만나 부적을 받아야 하니 대략 닷새 정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왕복 시간입니까?”
“아닙니다. 도술사를 만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입니다.”
복귀한 후에 점술 부적을 레스트에게 판매할 필요는 없다. 차원 거래를 통해, 또는 차원의 문을 이용해 직접 만나 거래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레스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인 후에 한율을 돌아봤다.
“한율 님께서는 제가 따로 연락을 취할 때까지 언데드 몬스터에게 취약한 물건을 확보합니다.”
“즉, 산성력이 강한 약품일 필요는 없다는 거군요.”
“예. 언데드에게 효과가 좋은 무기이면 충분합니다. 단.”
“……상대는 마법의 종주, 드래곤. 언데드가 되었다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니 마나가 섞이지 않는 무기겠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설명을 멈춘 레스트가 한율을 한 번, 에리얼을 한 번, 언소월을 한 번 바라본 후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드래곤을 찾습니다. 물론 에리얼 님?”
“네. 최상급 정령과 계약한 정령에게 연락해 합류하라고 전할게요.”
“감사합니다. 현재 저는 아모스 제국 수도, 제국 도서관에서 가장 가까운 페가수스 여관에 머물고 있습니다.”
“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반년. 반년간 순서를 바꿔 진행합니다. 단, 반년이 지나도 언데드 드래곤의 위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언소월의 차원은 배신의 가능성이 높아 지원군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율의 차원은 3년이 지나야 퀘스트를 완수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퀘스트를 진행할 수는 있다.
“처음에 결정을 내린 것처럼 정령계부터 시작합니다.”
***
아모스 제국의 수도, 마이트.
“…….”
언데드 드래곤과 관련된 정보를 하나라도 모으기 위해, 협력을 구해야 하는 드래곤의 위치를 찾기 위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 아모스 제국을 방문하고 제국 도서관과 가장 가까운 여관에 머무르고 있던 레스트였다.
“으음.”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보이는 반투명한 여인.
공중에 둥둥 떠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반투명한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스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리얼 님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신 겁니까?”
레스트의 질문.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반투명한 여인이 허공에 글을 적어 대답했다.
[네. 어머니께서 보내셨어요. 지금 아래에 계약자가 식사 중이고요.]
“……회의를 마친 다음 날에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래서 헛웃음을 터트렸던 레스트가 최상급 바람의 정령에게 물었다.
“제국 소속 정령사입니까?”
[네. 문제가 되나요?]
“……아뇨. 문제는 없습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든 레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로 옆에 최상급 정령이 있음에도 옷을 벗었다.
클린 마법을 사용해 몸을 깨끗하게 만든 레스트가 다시 옷을 입었다.
“…….”
침대 옆에 비스듬하게 세워 놓았던 지팡이.
레스트는 지팡이를 빤히 바라봤고, 이내 지팡이를 들고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저벅, 저벅.
“…….”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밟아 1층으로 내려오던 레스트가 걸음을 멈췄다.
“으음.”
기사가 있다. 은백색 갑옷, 투구를 착용한 기사들이 1층을 장악하고 있었다.
기사.
그것도 제국의 기사.
레스트의 시선이 가장 가까이 있는 여기사에게 향했다.
여성으로 이루어진 기사단.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백장미 문양.
레스트의 시선이 다시 돌아갔다.
달그락, 달그락.
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식사 중인 사람들 가운데 단 한 명, 단 한 명만이 기사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으으음. 최상급 정령님.”
[네.]
“누굽니까?”
[계약자요.]
“계약자의 신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모스 제국의 삼황녀라고 했어요.]
“……끄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