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선공개된 무공(1)
“…….”
“알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으니.”
너무 궁금하다. 하지만 단호한 한율의 목소리에 호기심을 거둔 알렉스가 오크의 갑옷을 다시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고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S급 헌터, 아흐만을 바라봤다.
“이제 그쪽 차례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아흐만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한율을 바라봤다.
“저 또한 알렉스 헌터와 마찬가지로 대화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만. 이 중 하나는 알렉스 헌터가 언급한 아공간 아티팩트이니 한 가지가 되겠군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마법 중에 언어와 관련된 마법이 있습니까?”
“……언어요?”
신경을 쓰고 있는 주제, 언어.
찰나에 불과하지만 순간적으로 표정이 무너졌다. 한율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봤고, 사람들의 시선이 아흐만에게 향해 있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있기는 합니다만.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흐만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행동으로 보였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그는 알렉스가 두 번째 주제를 언급할 때처럼 물건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감정해 보시겠습니까?”
낡은 서적.
익숙한 언어가 우측 상단에 세로로 적혀 있는 낡은 서적.
“……감정.”
이름: 화룡도법(330).
설명: 화룡도의 주인이 집필한 무서.
‘미친…….’
속으로 욕설을 뱉은 한율이 홀로그램을 치우고 아흐만을 바라봤다.
“무서라면.”
“무공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
아흐만의 대답을 들은 한율이 다시 화룡도법이라는 비급을 바라봤다.
“……음, 양해를 구하고 살피기 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언어와 관련된 마법은 분명 존재합니다. 실제로 저도 습득하고 있죠.”
“하지만이라는 말이 나올 것 같군요.”
“하, 하하. 예. 하지만 그 언어와 관련된 마법은 언어를 번역하는 마법이 아닙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름에도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마법. 마나를 이용해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언어, 아니 통역 마법이죠.”
“……그렇군요.”
아흐만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비급을 회수하기 직전, 한율이 다시 입을 열어 그의 회수를 막았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법입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이 또한 3개월 후.”
또 3개월이다.
“오크의 갑옷, 그리고 무공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제 삼아 비밀리에 국가 회의를 열고자 합니다.”
알렉스의 상담이 끝나면 바로 실드를 해제하려고 했지만, 바로 아흐만의 상담이 시작되어 방음 처리를 위해 생성한 돔 형태의 실드가 유지 중이었다.
“할 수 있다는 것이군요.”
“네.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3개월 후에 회의에서 밝힐 것이고요.”
오크의 갑옷에 이어 또 다른 차원의 증거인 ‘비급’이 세상에 드러났다.
“흐음, 먼저 번역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가는요?”
“……예?”
“대가.”
“대가가 필요합니까? 번역을 하면 자연스럽게 이 화룡도법이라는 무서를 배우실 텐데요.”
“저는 마법사입니다. 마탑 소속 헌터 중에 도를 사용하는 사람도 없고요.”
“……어.”
330이라는 높은 가치의 비급이다. 하지만 그 비급을 배울 사람이 없었다.
이대한은 해괴한 방패술(?).
문수원은 추법과 권각술.
김세혁은 궁술.
송아연은 빙(氷)과 수(水) 마법사.
언소월, 또는 그의 수하들 중에 칼(刀)을 다루는 사람이 있다면 아흐만의 제안을 받아들여 번역과 동시에 필사본을 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소월의 수하들 또한 언가의 권법을 터득한 권법가.
레스트?
마법사다. 그것도 동료를 두지 않고 홀로 활동하는 마법사다.
에리얼?
정령이다. 그것도 정령왕이다.
“그렇군요. 필사본을 제작해도 그 필사본을 통해 화룡도법이라는 무공을 배울 사람이 없군요.”
“네. 없죠.”
“……혹시 칼을 다루는 헌터를 고용할 계획은 없으십니까?”
“없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한 한율이 되레 아흐만에게 물었다.
“새로운 헌터가 가입해도 칼을 쓸 것 같지는 않네요.”
“…….”
얼음 여왕.
캡.
라이트닝.
이글아이.
정령사.
마법사.
새로운 헌터가 가입한다면 아주 익숙한, 하지만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무기와 이능력을 사용하는 헌터가 가입할 가능성이 컸다.
“……바라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디 보자.”
전투 마법사가 아닌 제작 마법사로서의 길을 걷기에 이번에 실시한 실습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인도 또한 마법사 지망생을 파견했고, 그는 시간이 지나 인도 지부를 관리하는 마법사가 될 것이다.
“흐음.”
빚으로 남겨 필요할 때 인도의 지원을 받는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타국의 지원이 필요하면 이번에 제대로 빚을 진 중국의 지원을 받으면 그만인데.
“영초, 영약, 몬스터 사체로 하죠.”
“일반적인 거래군요. 가격은…….”
“3개월 후에 계산을 하죠. 번역본 또한 3개월 후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회의군요.”
대체 회의 주제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사람을 안달 나게 만드는 것일까.
아흐만이 눈을 감았다. 고민하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던 그는 결정을 내린 것처럼 화룡도법을 한율에게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3개월 후, 화룡도법 번역본을 받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3개월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
“어디 보자. 정리하면.”
자국의 도움을 받아 국가 회의를 개최한다. 그것도 각국의 고위급 인사들뿐만이 아니라 각국을 대표하는 헌터들도 참가하는 국가 회의를 개최한다.
국가 회의에서 능력을 밝힌다.
고민했지만 무공이라는 기술을 어디서 얻었는지 변명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국의 협력을 받아 무공을 공개한다.”
처음에는 마법처럼 진행하고자 했지만 도움이 필요한 각국의 고위급 인사, 그리고 대표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금처럼 자신의 능력이 ‘차원 거래’가 아닌 ‘마법’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이유?
귀찮아서.
차원 거래라는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거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밝혀지면 수많은 과학자들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고, 수많은 방송국에서 취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귀찮게 할 것이 분명했다.
하루 온종일 헌터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과학자들에게 시달리고, 기자와 방송국에게 시달릴 생각은 없다.
‘기업이 움직일 가능성도 있지.’
다른 차원의 물건을 판매해 이익을 보고자 하는 기업이 과연 없을까.
단순하게 보면 레스트의 차원은 판타지, 언소월의 차원은 무협, 에리얼의 차원은 정령계다.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해도 분명 사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고, 기업은 그런 사람들의 소유욕을 이용해 이익을 얻고자 자신에게 달려올 것이다.
“각국의 대표들에게만 알린다. 그들이 공개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헌터의 전력 강화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존나 귀찮네.”
그냥 관둘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A급 게이트, 아룡의 대지 소멸 작전에 참가해 A급 게이트의 무서움, 정확하게는 가디언을 통해 S급 게이트의 무서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공을 공개한다고 해서 무공을 배운 헌터들이 S급 게이트 소멸 작전에 참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무공을 배운 S급 헌터들이 S급 게이트에서 큰 활약을 보일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
“해야지.”
한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침대 옆 선반 위에 올려놓은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무공 공개 준비를 위해 숙소를 나와 어딘가로 향했다.
***
진주언가, 개인 수련장.
“……하아.”
이게 뭐하는 짓인지.
깊은 한숨을 내쉰 아름다운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녹음기에 이어 한율이 보낸 괴상한 기계.
“캠코더라고 했지.”
녹화(錄畫)하는 기계.
“그림을 기록하는 기계라…….”
신기한 물건이 너무나 많았다.
녹음기.
캠코더.
한 달 전, 실례를 무릅쓰고 음(陰)의 영초를 보관하기 위해 얼음 마법을 유지하는 방법을 조언했을 때, 그때 한율이 보내 준 냉동고라는 물건도 그렇고.
고개를 좌우로 저은 언소월이 천천히 목검을 들었다.
이미 캠코더는 자신을 녹화하고 있었다.
“시간은 충분히 주셨으니까.”
하루에 두 개씩 기록하면 될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무공을 습득하고, 이해하고, 펼치는 것에 있지만 그것은 언소월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룡도법 같은 경우에는 오래 걸리지만.’
언가의 저주와 함께 찾아온 축복인 뛰어난 오성(悟性).
이류(二流) 무공은 하루면 이해하고 펼칠 수 있고, 일류(一流) 무공은 일주일이면 이해하고 펼칠 수 있다.
화룡도법과 같은 무공은 몇십 년은 걸리겠지만 이해하고 깨달음을 담아 펼치는 것이 아닌 무공서에 따라 그대로 무공을 펼치는 것은 2개월이면 충분했다.
“후우.”
작게 숨을 고른 언소월이 자세를 잡았다.
한율이 캠코더라는 기계를 보내며 무공을 펼치는 것을 녹화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언소월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공을 이해하고 펼친다면 요괴가 아닌 무인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힐끔 캠코더를 훔쳐보며 시작을 알린 언소월.
그는 캠코더 앞에 서서 무공을 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