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세트(2)
저벅저벅.
배희연이 바로 청일 백화점에 들어갔다.
“배희연이다.”
“청일그룹의 A급 헌터.”
“우와. 땡 잡았네. 배희연 헌터를 만나다니.”
백화점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모여드는 사람들의 시선,
“어, 음. 역시 많이 유명하시네요.”
“아닙니다.”
중요한 분은 저를 모르시는데요, 뭘.
말로 뱉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미소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한율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 하하. 그래서 유리는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나요?”
“대표실입니다.”
“……네?”
“대표실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청일그룹 대표의 사무실이다. 배희연의 말대로 출입이 어려운 공간이었으니 치료는 물론 마법을 가르치는 데에도 적합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천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
한율과 배희연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고, 천천히 문이 닫히자 입을 꾹 다문 채로 전방, 엘리베이터 문만 바라봤다.
“…….”
“…….”
어색한 침묵.
그 침묵을 깨트리고 싶어도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그냥 엘리베이터 문만 바라볼 때, 그를 대신해 배희연이 어색한 침묵을 깨트렸다.
“유리 아가씨를 치료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넵.”
“……그렇군요.”
“…….”
“…….”
“아, 빠르면 한 달, 늦어도 석 달 안에는 치료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넵.”
“…….”
“…….”
다시 침묵.
띵동.
한율이 알림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환한 미소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나왔다.
“오빠!”
대표실 안쪽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대표실 밖, 소파 옆에 자리하고 있던 이유리가 한율과 같은, 하지만 이유가 다른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흔들었다.
“유리야!”
“으응?”
“잘 지냈어?”
“어제 만났잖아요.”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지.”
“…….”
고개를 갸웃했던 이유리가 한율의 안내를 담당한 여인, 배희연을 확인하고 쿡쿡 웃었다.
그때였다.
이상남, 그리고 이상민 부자가 대표실에서 나왔다.
“우리 율이!”
“잘 지내셨죠?”
“어제 만나지 않았나?”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죠.”
“하하하! 그렇지!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지. 하하하!”
재미없는 농담에도 유리를 치료해 주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웃어 주는 이상남.
한율은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는 이상남에게서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이상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심이 걷힌 것인지 처음과는 다르게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살짝 숙인다.
한율은 이상민의 인사에 똑같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후, 이유리에게 말했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
“네!”
“그리고 그것도 같이할까?”
그것, 마법.
이유리가 눈을 반짝이더니 치료를 시작하자는 제안에 대답할 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
“……후우.”
휠체어에 앉아 마나 호흡법을 외우던 이유리가 눈을 뜨자 노트를 꺼내 주문을 외우던 한율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물었다.
“어때?”
“만들어졌어요!”
“1서클을 만들기는 쉬워. 문제는 그다음이지.”
“음음.”
정말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율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리를 보며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수업이 끝났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유리의 모습에 한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궁금한 거라도 있어?”
“오빠.”
“어.”
“이제 저도 마법을 쓸 수 있어요?”
“왜? 써 보고 싶어?”
“당연하죠!”
마법이다. 마법.
초능력이 아닌 마법.
“1서클 마법은 몇 개 없어. 파이어, 아쿠아, 윈드, 어스, 매직 미사일, 실드…….”
한율이 자신이 배운 1서클 마법을 설명한 후, 이유리에게 말했다.
“별거 없지?”
“그래도요.”
“그럼 주문을 알려 줄 테니까. 으음, 뭐 배워 볼래?”
“처음은 파이어!”
왜 처음은 화염 마법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한율은 질문하지 않고 파이어 마법의 주문을, 그리고 마나를 움직이는 방법을 설명했다.
“……파이어.”
화륵.
손가락을 하나 편 채로 주문을 외우자 손가락 위로 작은 불꽃이 생성됐다.
“우와우와우와! 우와아아!!”
손가락을 따라 좌우로 움직이는 불꽃.
“우와아아아.”
진짜 마법을 썼다. 이유리는 다시 한번 탄성을 흘렸다.
“마법은 자주 쓰는 게 좋아.”
“자주요?”
“응. 혼자 있을 때, 시간이 되면 계속 마법을 써.”
“이유가 있나요?”
“마나를 소모해야 하니까. 지금 네 몸에는 5, 6서클 마법사가 품을 수 있는 마나가 있어. 그래서 계속 소모해야 하고, 계속 마나 드레인으로 배출? 배출이라고 해야 하나.”
“마나 호흡법은 가끔씩 돌리고요?”
“그렇지. 마나를 다루는 방법을 터득해야 하니까.”
5, 6서클 마법사의 마나를 품고 있다.
“새, 생각보다 많네요.”
“무지 많은 거지.”
마나 호흡법을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 5, 6서클 마법사의 마나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레스트는 탄성을 흘렸었다.
“어디 보자…….”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폰을 집은 한율이 시간을 확인하고 이유리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에……. 하나 배웠는데.”
“시간 많잖아. 어차피 한 달은 매일매일 볼 텐데.”
치료를 위해 매일매일 만나야 한다. 이유리는 발가락에서 멈췄던 어제와는 달리 발목까지 움직이던 것을 떠올려 빙긋 미소를 그렸다.
“오빠.”
“응?”
“고마워요.”
“나도 보수 받고 하는 건데 뭘.”
“그래도요.”
이유리는 미소를 잃지 않았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율, 그리고 이유리가 대표실을 나왔다.
“벌써 끝났나?”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이상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이유리가 아주 조심스럽게 발목을 돌렸다.
“오늘은 발목까지요.”
“……후우.”
발가락에서 발목, 그러니까 발 전체는 큰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상남이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고, 이상민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내일 다시 올게요.”
“벌써 가려고?”
너무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이상남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울상을 지으며 바라보는 이유리.
“저녁 8시입니다만?”
“그래도 밥은 먹고 가지.”
“유라가 준비해 뒀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가야지.”
이상남과 이유리가 바로 실망을 지웠다.
“한율 씨.”
이상민의 부름.
“편하게 부르세요.”
“알겠네. 그럼 한율 군. 가기 전에 제작 중인 갑옷을 보고 가지 않겠나.”
“음? 사흘 정도 걸리지 않나요?”
“부탁했네.”
“아하!”
사장의 권력을 사용했다.
단번에 시간이 단축된 이유를 깨달은 한율이 회의실에 남아 있던 사람들과 함께 장비 제작실로 이동했다.
“아! 윈드 워리어!”
1호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는 담당자.
“아니라고!”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친 한율이 확답을 받기 위해 다시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시야에 만들어지는 자신의 장비가 눈에 들어왔다.
“…….”
정말 사장의 권력을 사용했는지 1호실에는 세 명의 각성자가 테이블을 둘러싼 채로 장비를 제작 중이다.
상반신 마네킹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
눈에 아주 익은 갑옷.
“내일까지 가능하겠나?”
한율이 멍하니 갑옷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상남이 담당자에게 물었다.
“내, 내일까지 말입니까?”
“어렵겠나?”
“아닙니다.”
대표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있을까.
“야근 수당을 세 배로 쳐주겠네.”
“새벽이 오기 전에 끝내 배달까지 해 보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대답한 담당자가 바로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간 담당자는 지원 나온 제작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작업에 들어가려고 했다. 작업을 진행하려는 순간, 어깨를 잡는 한율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제작자님?”
“예, 윈드 워리어.”
“저게 제 갑옷?”
손가락으로 마네킹이 착용한 갑옷을 가리키는 한율.
담당자는 그의 행동이 너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어, 음. 제작자님?”
“네, 윈드 워리어.”
“왜 디자인이 제 눈에 매우 익숙해 보이는 걸까요?”
“그야. ‘윈드 워리어’에게 가장 편한 디자인이 이것이니까요.”
“…….”
열에 일곱, 헌터 대부분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디자인이 아니라 한율에게 편한 디자인.
“아직 미완성이지만 감정해 보시죠.”
이름: 강석호의 윈드 워리어 갑옷(미완성)(280).
설명: 제작 능력자, 강석호가 만든 갑옷. 미완성이다.
효과: 피해 13% 감소. 방어 마법 효과 13% 증가.
“…….”
좋다. 미완성인데도 10%가 넘는 것은 물론, 방어 마법 효과도 증가시킨다.
어떻게 보면 이중 피해 감소 효과를 지닌 갑옷이라는 건데.
문제는 디자인.
디자인이다.
왜 하필…….
“끄으응.”
동생이 부탁하고, 아버지가 부탁해서 새로 제작한 갑옷이 전역복과 꼭 닮은 게 아니라 그냥 전역복이다.
“……제작자님?”
“예, 윈드 워리어.”
“그놈의 윈드 워리어가 왜 갑옷 이름에도 붙어 있을까요?”
“그야. 윈드 워리어라는 별명이 붙으신 한율 님의 갑옷이니까요?”
“…….”
죽일까?
절반 정도는 진심으로 생각했던 한율이 바로 디자인 수정을 요구하려 할 때였다.
“무료다.”
뒤에서 들려오는 이상민의 목소리.
무료.
다른 말로는 공짜.
“……무료?”
“치료비라고 생각하게.”
“…….”
“그것에 대한 보상은 따로 지급할 생각이니 기대하고.”
치료+가르침의 보상이 아닌 치료에 대한 보상.
“마음에 드나?”
“네. 지적할 게 하나도 없네요. 역시 청일그룹.”
한율은 자본주의의 힘에 굴복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
한율이 떠나고, 이유리가 떠난 대표실.
먼저 이유리와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던 이상남이 대표실 소파에 앉아 있자 이상민이 서류 업무를 멈추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한율에게 후원을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후원(後援).
뒤에서 도와준다는 뜻의 후원.
자연스럽게 펜을 내려놓은 이상민이 책상 서랍을 열었고,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서류를 한 장 꺼내 이상남이 앉아 있는 소파, 그 맞은편 소파에 앉아 서류를 내밀었다.
“준비해 뒀습니다.”
“역시…….”
일반인을 초능력자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상민은 한율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후원 계획을 세웠다.
만약 자신의 능력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이 사실이 발각되면 한율은 물론 그에게 마법을 배운 이유리 또한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 제안할 거냐?”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며칠 내로 제안할 생각입니다.”
“언제까지?”
“힘을 기르는 것은 물론 길드를 창설할 때까지. 그때까지 후원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