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사, 삼백 개?(1)
한국에서도 몇 명 안 되는 A급 헌터들의 눈싸움.
흥미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한율이 다시 고개를 돌려 이상남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못돼 처먹은 짓.
이상남은 분명히 말했다. 레온 길드가 못돼 처먹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이상남이 한율의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레이크 현상이 발생한 게이트는 바로 소멸 작업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
레온 길드원들에 의해 진입이 막혀 기자들이 없는 게이트 주변에 자리한 사람들은 모두 능력을 각성한 헌터들이다.
이상남의 목소리를 들은 청일그룹의 헌터들이 고개를 살짝 숙였고, 레온 길드원들이 몸을 흠칫 떨었다.
청일그룹의 A급 헌터, 배희연과 눈싸움을 벌이던 레온 길드의 마스터, 백호준도 마찬가지였다.
인상을 살짝 찌푸렸던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상남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알죠. 분명 게이트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으니 갑작스러운 브레이크 현상이 발생할 경우, 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게이트 연구원들과 함께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였나?”
헌터 협회, 게이트 매뉴얼에 적혀 있는 내용.
“그래. 다크 울프 게이트는 아직 기한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브레이크 현상이 발생했다. 당연히 국가가 파견한 연구진, 그들을 호위할 헌터, 마지막으로 레온 길드가 협력해 게이트를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을 먼저 보내서 확인해 보니…….”
이상남은 설명을 다 하지 않았다. 딱 거기서 설명을 멈추고 레온 길드의 마스터, 백호준에게 다가갔다.
“허허허. 자주 연락을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매우 미안하구먼.”
“……아닙니다, 이 회장님.”
딱딱하게 굳어 있던 백호준이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허리가 다시 펴지는 것을 보니 금방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며칠 전에도 연락을 했었지?”
“…….”
“허허허. 희연아.”
“네. 회장님.”
흑발의 미녀, 검은 양복과 대조되는 새하얀 백색 검집을 허리에 차고 있던 A급 헌터, 배희연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내 분명 비서실에 부탁해 요청을 했던 것 같은데?”
“비서실을 통해 일주일 전에 다크 울프 게이트의 소멸 작업을 진행해 달라고 동대문구 수호 길드인 레온 길드에 연락했습니다.”
“짧아진 기한만큼 줄어든 수익은 청일그룹에서 지급하겠다는 말을 빼먹었나?”
“아닙니다.”
입을 꾹 다무는 백호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가는 이상남과 배희연.
마지막으로…….
“…….”
상황을 지켜보는 한율.
“백 길드장.”
“…….”
“백 길드장?”
“……예. 이 회장님.”
“할 말 있나?”
“…….”
“허허허. 희연아.”
대답 없는 백호준을 바라보며 다시 웃음을 터트린 이상남이 배희연을 불렀다.
“예. 회장님.”
“광고 끊어라.”
몬스터 사체와 마석 판매를 통한 수익보다는 적다.
하지만 헌터들은, 특히 길드에 소속된 헌터들은 광고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명세.
신입 헌터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명세 때문이었다.
“……!”
백호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상남과 처음과 마찬가지로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배희연.
“백 길드장.”
“예, 이 회장님.”
“왜 게이트 소멸 작업에 들어갔는가?”
“죄송합니다.”
변명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올바른 선택지가 아니었다.
“후원 끊어라.”
“회장님!”
복잡한 상황 플러스 배희연과의 신경전.
백호준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버럭 소리치자 그의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차앙!
검을 꺼내 든 배희연이 바로 마나를 소멸시켰지만 말이다.
“허허허. 은퇴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 때문에 그런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린 이상남이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요청받고 진행하던 자체 제작 상품…….”
게이트와 몬스터.
분명 게이트와 몬스터의 등장으로 세상은 변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돈이 가지고 있는 힘’이었다.
***
백호준의 설명은 길었다.
온갖 변명을 다 추가하니 설명이 길어진 것이었지만,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거였다.
“게이트 소멸팀이 욕심부려서 사고가 일어났다?”
한율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이상남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백호준이 고개를 홱 돌렸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청일그룹의 회장, 이상남과 함께 찾아온 인물이다.
중요한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는 중임에도 그의 곁에 서서 대화를 듣고 있어 백호준은 매우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길드원 관리에 실패한 제 책임입니다.”
“에이…….”
손사래를 치는 한율.
백호준은 그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것이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고요.”
“…….”
백호준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고, 무덤덤했던 이상남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이번 사고는 레온 길드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어느 정도가 아니라 백 퍼센트죠.”
레온 길드는 수호 길드라는 이유로 ‘동대문구 한정’이지만 다양한 특혜를 받는다.
하지만 그 특혜는 ‘동대문구의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부여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즉, 천재지변(天災地變)은 그렇다 쳐도 인재(人災)는 발생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거기다 인재 사고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법을 어긴 것도 있고.”
레온 길드원 전원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면…….”
이상남이 말끝을 흐리며 한율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린 후, 담담하게 물었다.
“공표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어렵겠죠.”
“큭큭큭. 그렇지.”
레온 길드를 대체해 동대문구에 발생하는 게이트를 관리할 수 있는 길드는 없다.
만든다고 하면 만들 수야 있다. 몇 개의 길드가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뭉치는 것인데, 그 방법은 너무나 많은 문제를 가져온다.
권력 다툼.
이익 다툼.
최악의 경우, 이번에 발생한 것처럼 더 큰 인재(人災) 사고까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럼 어떡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
한율이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갓 전역한 예비군이었다. 입대하기 전에 사업체를 운영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입대 전에 각성한 헌터인 것도 아니었고.
그때였다. 발언할 수 있는 기회라 판단했는지, 백호준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개별적으로 보상하겠습니다.”
“보상?”
“예. 육체적 피해는 물론 정신적 피해를 본 사람들을 찾아가 직접 사과를 드리고 보상하겠습니다.”
“흐음……. 끝인가?”
또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인가.
백호준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1팀 팀장인 김건우가 그를 대신해 대답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길드원들의 상황을 확인, 문제를 미리 해결하겠습니다. 또한, 수호 길드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도록 반복해서 정신 교육을 진행하며, 순찰 인원을 두 배로 늘리겠습니다.”
사고를 일으킨 길드원들이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 욕심을 부린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돈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는지는 조사를 해 봐야 알 수 있다.
이상남이 고개를 돌렸다.
“자네의 생각도 그러한가?”
“예, 그렇습니다.”
“그럼 모든 명령을 철회하지. 단 하나, 후원은 반년에서 1년 동안 제외.”
“감사합니다.”
보상 문제로 큰 손해를 입을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청일그룹의 후원이 끊기면 몇 달간은 적자를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그 감안할 일이 청일그룹과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잊지 말게나. 대체할 수호 길드가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걸.”
기분 나쁜 이야기?
아니다.
수호 길드로 임명된 레온 길드의 길드원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저지른 일이다. 이번 일이 세간에 공개되면 레온 길드는 수호 길드라는 이름을 버려야 하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해체까지 해야 할 수도 있다.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백호준이 경호팀과 함께 몸을 돌리는 이상남, 정확하게는 그의 옆에 서 있는 특이한 행색의 헌터를 바라봤다.
“한율이라는 헌터입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김건우의 목소리.
“한율?”
“예.”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한유라라는 학생을 바로 옆에서 지켰기 때문에 한율이라는 이름을 알 수 있던 것이었다.
“알아봐. 그 때문에 위험했지만, 그 때문에 위험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으니.”
***
치이익.
불판 위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일으키는 선분홍색 살코기.
“꿀꺽.”
한유라, 이유리, 유세희가 불판 위에 구워지는 돼지고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한율은 열심히 집게를 움직이는 이상남을 바라봤다.
‘회장이…… 그것도 5대 그룹 중 하나인 청일그룹의 회장이…….’
고기를 굽는 회장님이라니.
이상남은 노릇노릇 구워진 고기를 손녀들(?) 앞에 놓인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손녀들이 고기를 입에 넣으면 흐뭇한 미소를 그린 채 더욱더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율이도 먹고.”
“아…… 예.”
고개를 끄덕인 한율이 이상남이 직접 구운 고기를 먹었다.
“허허. 그런데 마법사라니.”
리무진을 타고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이상남이 저녁을 먹자면서 데려온 곳은 청일고 앞, 신호등만 건너면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고깃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후 처리를 위해 대기 시간 길었고, 그 시간 동안 이상남은 손녀들과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 한율에 대해 알게 되었다.
“파이어볼?”
“네. 파이어볼, 매직 미사일, 실드 같은 마법이요.”
“추억이 돋는군.”
한국영과 마찬가지로 리X지 세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중얼거림이다.
“각성한 지 한 달도 안 지났고?”
“네. 5월 1일에 전역했고, 그날 각성했으니…….”
“…….”
이상남이 입을 다물었고, 쌈을 들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던 소녀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건물 내부에서 이상남을 경호하던 몇몇 경호원들도 한율을 측은하게 훔쳐봤다.
복무 중에 각성한 게 아니라 전역 당일 각성을 했다니.
“그, 그런데 오빠.”
정적이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서일까, 화제 전환을 하려는 듯 유세희가 한율을 불렀다.
“오빠는 왜 군복을 입고 있어?”
“백색 마석 알지?”
“응.”
“그거 흡수했어.”
“……군복이?”
“군복이.”
“…….”
다시 이어진 침묵.
유세희가 어색한 웃음을 터트리고 다시 눈앞에 놓인 고기로 시선을 돌리자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따라 식사를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