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한유라(1)
5월 21일 토요일.
토요일, 일요일을 휴일로 지정했기에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던 한율이 고개를 돌렸다.
목숨을 걸고 몬스터와 싸우는 헌터 생활 때문인지, 각성하며 신체 능력과 감각이 상승해서인지 작은 소리에도 고개를 돌리게 됐다.
달칵, 끼이익.
방을 나오는 여동생 한유라.
익숙한 청일고 교복이 아닌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한유라를 빤히 바라보던 한율이 물었다.
“어디 감?”
“학교. 놓고 온 거 있어서.”
“올 때 메론나.”
“메론나는 개뿔. 옷이나 갈아입어.”
“……?”
다시 예능 방송을 시청하려던 한율이 고개를 돌렸다.
“엉?”
“나갈 준비 하라고.”
“……왜?”
“쇼핑하게.”
“네가 쇼핑하는데 내가 왜 따라가냐?”
“내 쇼핑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빨리 갈아입고 와. 쇼핑 끝나면 마트 가서 장 볼 거니까.”
“……에에. 오늘?”
“…….”
귀찮음을 얼굴에 가득 채우고 묻는 한율에게 한유라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방을 가리켰다.
“에휴.”
열심히 돈을 벌면 뭐 하나.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면 뭐 하나.
동생 하나 이기지 못하는데.
……뭐, 정확하게는 져 주는 거지만.
져 주는 거라고!
“옷을 사 입냐! 빨리 나와!”
“어! 지금 나가!”
한율이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뭐냐?”
“뭐가?”
한유라가 방을 가리키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옷을 가리키자 한율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아.”
깜빡했군.
탄성을 흘린 한율이 허리를 숙여 고무링을 조이고, 찍찍이 이름표를 떼 주머니에 넣었다.
“됐지?”
“……하아아아.”
이번에는 한유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유라는 다시 명령을 내리는 대신, 벽시계를 힐끔 훔쳐보고 집을 나왔다.
청일고는 동대문구에 위치한 고등학교.
버스를 이용해도 되었지만, 두 사람은 산보를 하듯이 천천히 걸어 청일고로 향했다.
“근데 웬 쇼핑?”
“장비.”
“내 거?”
“어. 계속 전역복 입고 다닐 거야?”
“엉.”
“……어?”
“돈 없어.”
“그렇게 벌면서 돈이 없어?”
“재룟값.”
“재료?”
“마법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영초라는 재료가 필요해. 그래서 돈 없음.”
“……그냥 자연스럽게 배우는 거 아니었어?”
“말했잖아. 재료가 필요하다고. 정확하게는 영초, 영약 흡수라는 조건이 붙어 있지.”
정확하게는 영초, 영약 판매다.
걸음을 멈춘 한유라가 고개를 살짝 들어 한율을 바라보다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에이씨. 그럼 아이쇼핑.”
“그냥 집에서 쉬…….”
“이미 약속 잡았거든!”
***
청일 고등학교에 도착하니 누구와 약속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유라 친구 이유리라고 해요.”
“유리?”
“네. 이름이 비슷해서 친해졌어요.”
눈웃음을 치며 대답하는 소녀.
잠시 소녀를 내려다보던 한율이 미소를 그렸다.
“유라가 괴롭히거나 하지 않고?”
“야!”
“쿡쿡쿡.”
한유라가 소리치고, 이유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가져올 거 있으니까.”
“오야.”
한율은 대답했고, 한유라가 유리의 뒤에 서서 그녀와 함께 입구를 통과하자 뺨을 긁적였다.
이유리.
처음 만난 한유라의 친구는 다리가 불편한지 휠체어를 타고 있는 소녀였다.
“감정……. 역시 안 되나.”
휠체어가 아닌 소녀에게 감정 시스템을 사용했던 한율이 혀를 찼다. 당연히 물건만 감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어서 그런지 확인할 수 없었다.
“뭐, 그건 둘째치고.”
청일고 입구에 세워진 검은 차량.
검은 차량을 바라보던 한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경호원?”
“…….”
“이유리 양의 경호원입니까?”
덜컥, 끼이익.
자연스럽게 보조석 문이 열리며 검은 양복을 착용한 사내가 차에서 내렸다.
“실례했습니다. 최일현이라고 합니다.”
“한율입니다.”
“……각성자십니까?”
“네.”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는 창문인 것도 있지만, 기척을 죽이고 있던 것도 있다.
한율은 선글라스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호기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 가는지 알 수 있을까요?”
“……모르십니까?”
“네. 쉬고 있는데 쇼핑한다고 끌려 나와서요.”
“…….”
최일현이 잠시 한율을 바라봤다. 이유리 부모님들이 누구인지 알고 동생에게 부탁해 약속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백화점입니다.”
“백화점?”
“네. 청일 백화점을 방문합니다.”
청일 백화점.
HG, 그리고 오성과 함께 3대 헌터 백화점 중 한 곳.
“청일 백화점에 유리 양 부모님께서 관리하는 가게가 있는 건가요?”
“…….”
정말 모른다. 그래서 잠시 말문이 막혔던 최일현이 대답하려 할 때였다.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몸을 살짝 튼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답했다.
“유리 아가씨에게 직접 들으시는 것이 좋겠군요.”
“…….”
갑작스러운 최일현의 행동에 한율이 고개를 돌렸다.
재잘재잘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는 한유라, 이유리.
“그래야겠네요.”
***
“허미…….”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꺾어야 꼭대기가 보이는 청일 백화점.
“더럽게 크네.”
“쿡쿡쿡.”
한유라와 함께 차에서 내린 이유리가 그런 한율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와 보셨어요?”
“어. 돈 없어.”
“하하하하!”
이유리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한유라가 쪽팔린다는 듯이 얼굴을 가렸다. 최일현도 마찬가지였다. 소리 내어 웃지는 못했지만, 입가가 씰룩거렸다.
“유라가 솔로 플레이하신다고 하던데.”
“마법사라는 것은 들었지?”
“네. 레비오사가 아니라 파이어볼을 사용하는 마법사라고 들었어요. 억울한 군저씨. 쿡쿡쿡. 오빠가 억울한 군저씨라는 것은 듣지 못했지만요.”
“이 오라비가 많이 쪽팔린가 보네.”
“그럼 안 쪽팔리겠냐!”
짜악!
한율이 장난하는 것처럼 실망한 표정을 짓자 한유라가 짝 소리 나게 등짝을 때렸다.
“하하하하!”
“뭐, 어쨌든 그런 마법사인데. 요게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그럼요?”
“영초, 영약을 흡수해야 해.”
“……마나가 필요하다?”
레스트와 대화를 나누며 만든 설정이 마법을 배우는 데 마나가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영초와 영약을 흡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응. 그래서 하루에 저축할 수 있는 게 500만 원 정도?”
하루 수익이 2천만 원이라고 하면 1천만 원은 영초 및 영약을 구입하는 데 쓰고, 500만 원은 개인 통장, 500만 원은 가족 통장에 저축하고 있다.
“……그래도 솔로 플레이한다면 많이 버실 텐데.”
“그렇지. 문제는 헌터 생활한 지 한 달도 안 되었다는 거지.”
“으음, 그럼 대략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이?”
“칠천에서 팔천 정도?”
매일 30마리씩 잡는 게 아니었다. 최소 30마리씩 사냥했고, 불규칙적이지만 예상보다 많은 양의 마석을 확보하는 날도 있었다.
“칠천에서 팔천…….”
잠시 고민하던 이유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율을 올려다봤다.
“필요한 거 있으세요?”
“필요한 거?”
“네. 팔천 정도면 갑옷 부위 중 하나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흐음…….”
이번에는 한율이 신음을 흘리며 고민에 잠겼다.
필요한 거?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없다.
“무기도 괜찮아요.”
“무기?”
굳이 꼽는다면…….
“총?”
“네?”
“굳이 찾는다면 김치지.”
“김치? 먹는 김치?”
“케이세븐(K-7).”
“……?”
이유리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경호원, 최일현이 한율을 바라보면서 설명했다.
“군부대에서 사용되는 자동화기입니다. 한국에서 자체 제작된 몬스터 토벌 전용화기여서 김치라고 부릅니다.”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이유리가 최일현에게 물었다.
“삼촌. 우리 백화점에서 김치도 팔아요?”
“아뇨. 총기는 총포점에서 따로 판매해서.”
“어, 음. 그럼 오빠.”
이유리가 한율을 불렀다.
“갑옷은 어때요?”
“팔천이면 한 부위밖에 못 산다며.”
“그렇……죠.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이 전역복이 백색 마석을 흡수한 전역복이어서.”
“아…….”
한유라.
그녀는 신분을 감추고 입학한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친구였다.
다리가 불편해 모두가 자신을 피해 다닐 때, 먼저 다가와 자신을 도와준 친구였으며.
우연과 우연이 겹쳐 신분이 발각되어 동급생은 물론 교사들까지 무언가를 바라고 다가올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지켜 준 친구였다.
그래서 그녀가 부탁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없어요?”
“없어. 그냥 아이쇼핑이나 하자.”
“……으으음.”
무언가 못마땅한 듯 이유리가 신음을 흘렸지만, 한율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렇게 청일 백화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반복해서 앓는 소리를 내던 이유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빠!”
“어.”
“영초, 영약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글치.”
처음에는 원하는 대로 총기를 선물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율과 한유라가 아이쇼핑을 한창하고 있을 때, 최일현에게 가격을 물어보고 포기했다.
매일매일 500만 원씩 저축하는 한율에게 K-7이라는 총기는 너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보자. 할아버지가 유라 오빠가 손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20% 할인까지 오케이 하셨으니…….”
혼잣말이다. 하지만 한창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혼잣말을 뱉었기에 들을 수 있었다.
한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휠체어를 밀고 있는 한유라를 바라봤다.
이유리의 할아버지는 청일그룹 회장.
“동생?”
“왜.”
“회장님하고 아는 사이였어?”
“유리네 집에 한 번 놀러 간 적이 있어. 그때 만났지.”
“…….”
말문이 막혀 멍하니 한유라를 바라보던 한율이 고개를 돌려 최일현을 바라봤다.
“회장님께서 유라 아가씨를 친손녀처럼 아끼십니다. 모르셨습니까?”
“…….”
***
영약을 판매하는 청일 백화점 5층.
“유라야.”
“왜.”
“나는 회장님 손녀가 방문하면 1층에 사람들이 모여 인사하는 걸 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연락했대. 시선 끌기 싫다고.”
“그래서 지켜보는 사람은 많은데, 다가오는 사람은 없는 거구나.”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
“어.”
“흐음.”
양복을 입고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고, 사복을 입고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화점 직원, 그리고 경호원들을 확인한 한율이 다시 흥미를 잃고 핸드폰을 만지는 한유라를 확인하고 잠시 자신의 동생을 빤히 바라봤다.
“유라야.”
“또 왜.”
“유리는 왜 청일고에 입학한 거냐?”
“…….”
열심히 손가락을 놀리던 한유라가 액정을 끄고 한율을 올려다봤다.
“뭔 소리?”
“아니. 재벌 3세? 아니 재벌 4세인가? 어쨌든 재벌가 아가씨잖아.”
“유리?”
“어”
“그렇지. 재벌 아가씨지.”
“그럼 비싼 사립고, 그것도 경비가 철저한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 거 아냐?”
“……아아.”
이해했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한유라가 벽에 등을 기대고 이유리를 바라봤다.
“나도 궁금해서 물어봤거든.”
“어.”
“평범한 학교생활을 해 보고 싶었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