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97화 (197/200)

최종 퀘스트 (2)

대악마의 강림은 실패했다.

누구도 예상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의 군주를 강림시키려 했으나 비참하게 얼어 죽어버린 욕망의 군단장이 안타까워서 묵념의 시간을 가진 건 아니다. 인간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채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게 돼버린 욕망의 대악마가 불쌍해서 묵념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냥 시팔 말이 안 나와서다.

드래곤 버스를 한번 타보나 했는데,

망했다.

“아하하....”

그냥 실성한 듯 웃음만 나왔다.

”아하하... 그래... 내가 버스는 무슨....”

강자에게 편승해 거저먹으려던 얍삽한 심보에 대한 업보인가?

그래서 세상이 내게 벌을 주는 것인가?

최종 퀘스트를 방해하면서?

“응~ 계속 방해해봐. 드래곤 죽여서 깨면 그만이야~ 아하하.”

미친 사람처럼 말했지만 진짜 이젠 이 방법뿐이다.

아니, 이게 원조다.

나는 애당초 드래곤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이 산맥과 용족의 도시로 온 거였으니까. 중간에 대악마가 꼬리를 살랑대며 날 유혹해서 그렇지, 원래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며 퀘스트를 완료한다는 것이 내가 세운 계획이었다.

‘그래, 굳이 멘탈 흔들릴 일도 아니지 뭐.’

가만 생각해보니 그랬다.

내가 왜 낙담해야 한단 말인가?

그냥 원래 계획대로, 내 스스로의 힘으로 퀘스트를 깨면 되는 거다.

‘......그렇다면 그놈을 어떻게 조질지 고민을 한번 해봐야겠─’

그때, 뒤편에서 퍼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웅! 후웅!

고개를 돌려 보니, 워린레이크가 열심히 날갯짓해가며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쿠웅! 얼음 조각들을 흩날리며 지면에 터프하게 착지한 녀석은, 곧장 인간형으로 모습을 바꾸며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벌써 이곳에 와있는 거지? 분명 다른 인간들과 함께 슬금슬금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을 터인데.”

“아, 그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이 새끼가? 그럼 왜 물어본 건데?

워린레이크는 내 말을 가볍게 잘라내고는, 욕망의 군단장을 향해 턱짓하며 물었다.

“네 뒤에 있는 그 마물은 뭐지? 그놈도 내 브레스에 휘말린 건가?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욕망의 군단장입니다.”

나는 가감 없이 설명했다. 이제 대악마 강림 건은 완전히 물 건너 가버렸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해도 별문제 없다.

“......욕망의 군단장? 네가 말하길 군단장은 절망, 공포, 탐욕 이 셋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뭐. 한 놈이 더 있었나 봅니다.”

“죽으라는 녀석은 안 죽고 엉뚱한 녀석이 죽었군. 쯧.”

워린레이크는 군단장의 사체에서 시선을 거두며 혀를 찼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죽으라는 녀석이 안 죽었다니?”

“말 그대로다. 감히 내게 금화를 요구하던 그 뚱뚱한 녀석은 확실히 죽었지만, 나머지 두 녀석은 상처를 입고 도망쳤다.”

“아니.”

이거 은근히 열받네?

그냥 싹 다 죽인 거라면 억울하지나 않지, 정작 싸우던 세 놈 중에서 두 놈은 놓쳐놓고 엄한 욕망의 군단장을 죽여서 내 일을 망쳐버린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걸 그냥 도망가게 놔두셨습니까? 쫓아가서 확실히 마무리하지 않으시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약자가 내게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것을 즐긴다.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한이지.”

고작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적을 살려 보내준다고? 불안하지도 않나?

요절하기 딱 좋은 마음가짐이었다.

물론 마음가짐이 어떻든 간에 이놈은 내가 요절시켜줄 예정이지만.

“녀석들이 다시 내 영토에 침입한다면 얼마든지 끝장내 줄 용의가 있다만, 굳이 내가 밖으로 찾아다니면서까지 그러고 싶진 않군. 오랜만에 힘을 많이 썼더니 피곤하기도 하고.”

워린레이크는 뻐근하다는 듯 목을 이리저리 꺾어댔다.

“아, 예. 그러시군요.”

어쨌거나 말하는 투로 미루어보건대 살아남은 군단장은 산맥 밖으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상처도 제법 큰 듯하니, 나도 일단은 그쪽에는 관심을 끄고 이 드래곤을 잡을 방법이나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자, 그럼 안내해라. 용족의 도시로. 가서 좀 쉬어야겠다.”

“......??”

“대답.”

“아니, 워린레이크 님도 그 도시의 위치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심지어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딱 한 번밖에 가보지 않았지만, 이 녀석은 여러 번 가봤을 테니까.

“알고 있다만. 그래서?”

그래서라니. 장난하나.

“알고 계신데 왜 굳이 안내가 필요하신지?”

“하, 인간의 왕이나 귀족은 옷을 입을 줄 몰라서 하인의 시중을 받나? 따박따박 말대꾸하지 말고 안내해라. 네게 받은 정보가 도움이 됐기에 이번에는 너그러이 용서해주겠다만,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으니. 알겠나?”

아, 그냥 대접받고 싶다는 건가.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그냥 순순히 안내해주기로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드래곤을 잡으려면 나도 용족의 도시로 가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음... 알겠습니다. 안내해 드리죠.”

***

용족의 도시로 돌아오고 이틀이 흘렀다.

비록 대악마의 강림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산맥에는 여전히 상당수의 마물이 잔존해있어 다들 바빴다.

성녀를 위시한 교단군은 마물을 토벌하며 차원의 틈을 찾아내 봉인하는 작업을 펼치고 있었고, 용족은 그냥 별다른 계획 없이 무지성으로 눈에 보이는 마물을 제거하고 있었다.

심지어 앨리스마저 틈만 나면 족장 회의에 불려가느라 바빴다. 지금 이 도시에는 드래곤이 머물고 있기 때문에 족장 회의가 하루에도 몇 번씩 열리곤 했다.

그렇게 다들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바빴지만, 나는 여관방에 틀어박혀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물론 그냥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니고, 어떻게 드래곤을 잡아야 할지 머리카락이 빠지도록 고민하는 중이었다.

‘정면에서 맞붙는 건 승산이 거의 없고....’

거의 없는 게 아니라 그냥 0이다.

녀석이 인간형인 상태라면 어떻게 비벼보기라도 하겠는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거나 자신이 위기에 처하면 본체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내가 직접 목격했듯 본체로 현신한 워린레이크는 답도 없다. 본체인 상태라면 똑같은 마법도 위력이 평소보다 강해지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건 악마 군단장조차도 가차없이 쓸어버린 브레스다.

“흐음, 그냥 인간형일 때 확 기습해버려? 근데 한 번에 숨통을 끊지 못하면 오히려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

─벌컥!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중, 방문이 벌컥 열리며 족장 회의에 불려갔었던 앨리스가 들어왔다.

“어, 왔냐.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부른 거였는데?”

“그놈의 드래곤 때문이지 뭐. 으휴.”

앨리스는 넌덜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맞은편으로 와서 앉았다.

“왜? 뭔데 그래?”

“나는 용족이 세상에서 제일 성격이 더러운 종족인 줄 알았는데 드래곤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구. 요구 사항도 많고 얼마나 거들먹거리는지... 자기가 대악마의 강림을 막아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더 심해졌다니까? 자칭 세계의 수호자라나 뭐라나.”

“세계의 수호자? 크윽...!”

너무나도 원통해서 심장이 쿵쿵 뛰고 시야가 팽글팽글 돌며 어금니는 꽉 깨물어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면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면서!

게다가 그 쥐는 나한테 엄청 중요했다고!

내 계획은 망쳐놓고 그놈은 명성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두 배로 억울한 것이, 진짜로 그놈을 죽이지 않고서는 내가 고혈압으로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자칭하는 걸로 끝이 아니야. 자기 덕분에 우리 모두가 살아있는 거라면서 자기를 세계의 수호자로 인정하고 섬기라는 거 있지?”

“얻어걸린 거 가지고 아주 뽕을 뽑으시는구만...? 근데 뭐 상관있나? 용족은 이미 드래곤을 섬기면서 녀석의 노예처럼 살다시피 하고 있었잖아.”

원래부터 그래왔으니 이유가 하나 추가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을 듯했다.

“용족은 그렇지만 문제는 인간이지.”

“인간? 설마 인간한테도 같은 조건을 요구한 건가?”

“으응, 대악마가 강림했으면 먼 곳에 살고 있는 인간들도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을 테니 자기한테 은혜를 갚아야 한다구 하더라. 벌써 각 왕국으로 사절단을 보냈어. 금은보화를 내놓지 않으면 자기가 복수할 거라고 전하라면서.”

미친.

그게 어딜 봐서 사절단이야? 협박단이지.

“와, 이거 웃기는 놈이네. 군단장을 두 마리나 놓쳤으면서 벌써부터 공물을 요구하다니. 적어도 남아 있는 마물은 다 처리하고 말하든가. 그리고 고작 그런 일로 복수하면 지가 대악마랑 다를 게 뭔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러나저러나 착취당하고 목숨을 위협받는 건 매한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안 그래도 그 얘기가 나왔었어. 도대체 왜 아직까지 마물 청소를 끝내지 못했냐면서 막 화내더라구.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일 자기도 마물 토벌에 나서겠다더라. 아직 회복도 다 안 됐는데 귀찮게 됐다면서 얼마나 툴툴거리는지....”

“......뭐?”

나는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아직 회복이 다 안 됐다고?”

군단장과 싸운 뒤에 워린레이크가 피곤하다고 말하긴 했었지만, 나는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회복 타령을 하는 걸 보니 실제로 뭔가 소모 값이 컸던 모양이다.

“응, 그렇다고 하던데? 내일 또 힘을 써야 하니 오늘은 더 일찍 쉬어야겠다면서 회의 도중에 나가버렸어.”

“흐음... 그렇단 말이지....”

하긴. 인간도 마나 탈진에 빠지면 완전히 회복하기까지는 꼬박 하루 이상이 걸리는데, 인간보다 마나량이 훨씬 방대한 드래곤은 더 오래 걸리겠지.

물론 워린레이크도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싸운 건 아니었던 듯했지만, 어쨌거나 마나통이 크면 회복도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하다.

녀석은 당분간 풀 컨디션이 아닌 상황.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기회를 노려야 한다.

“......혹시 워린레이크의 거처가 어딘지 알아?”

“그러엄, 당연히 알지. 그 깐깐하고 괴팍한 드래곤을 대접하려고 족장들이 얼마나 난리인데. 본관 최상층에서 머물고 있어. 그래봤자 거의 잠만 자는 모양이지만.”

“본관이라면... 족장 회의가 열리는 건물?”

“맞아. 그런데 그건 왜? 설마... 거기로 찾아가서 암살할 생각이니?!”

앨리스는 내가 드래곤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고, 족장 회의에 자유롭게 참석하는 그녀의 도움을 받으려면 오픈하는 편이 좋아서 그냥 알려줬다.

나는 당황하며 묻는 앨리스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암살이 가능하다면 안 할 이유도 없지.”

“그, 그건 불가능할 거야. 블루 일족이 본관의 상층부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거든.”

블루 드래곤이라고 블루 일족이 지키는 건가.

“그래? 그래도 나한테는 그게 있잖아. 은신 의 왕, 클로킹. 은신 마법을 쓴 채 숨죽이고 조용히 이동하면 경비들을 지나칠 수 있지 않을까?”

“경비뿐만이 아니야! 무슨 보안 마법 같은 것도 잔뜩 걸려있댔어! 용족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아서 드래곤이 직접 걸었다고 하더라구! 아무리 너라도 거길 잠입하는 건 너무 위험해!”

앨리스는 그녀답지 않게 흥분한 어조로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아니, 알았으니까 진정해. 각이 보이면 그러겠다는 거지, 위험을 무릅쓰고 무조건 잠입해서 암살하겠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나도 내 목숨이 소중해.”

***

그날 밤.

나는 은신 마법 클로킹을 사용한 채, 드래곤이 묵고 있다는 건물인 본관을 찾아왔다.

‘입구에는... 별거 없군.’

드래곤은 최상층에 머물고 있고 경비는 상층부부터 삼엄해진다고 했지만, 입구는 내가 일전에 족장 회의에 몰래 참석하기 위해 왔을 때와 다름없이 허접한 문지기만이 하품을 쩍쩍해대며 서 있었다.

물론 아무리 허접이라고 해도 닫혀있는 문을 내가 열어버리면 눈치를 못 챌 리가 없었으므로, 그냥 정문이 아닌 창문을 통해 건물로 잠입했다.

‘엄청 허술하네. 하긴, 누가 감히 드래곤을 노리고 잠입하겠냐마는.’

어쨌거나 성공적으로 잠입한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계단을 타고 위층을 향해 올라갔다.

─사박, 사박.

족장 회의실이 있는 4층까지는 무난하게 올라갈 수 있었으나, 나는 곧 멈칫해야만 했다.

‘흐음, 여기서부터 상층부인가?’

5층으로 향하는 널찍한 계단에 무려 여섯 명에 달하는 용족이 일렬로 서서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뒤로는 하늘색 빛을 띠는 얇은 장막이 펼쳐져 있었는데, 아마 저게 앨리스가 말했던 보안 마법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저걸 뚫고 지나가는 것은 무리 같아 보였기에, 나는 쿨하게 포기하고 4층에 있는 어떤 작은 방을 하나 골라서 들어갔다.

의자와 탁자 몇 개가 포개어져 쌓여있는 것이, 아마 사무용 가구 창고인 듯했다. 나는 가구 더미 뒤편으로 가서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

내가 워린레이크를 잡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단연코 마법의 최종 형태라 불리는 브레스 때문이다. 녀석이 그 어마무시한 브레스를 다루는 이상 내가 놈과 싸워 이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그놈이 브레스를 못 쓰게 만들면 되는데.

나는 이곳에 워린레이크를 암살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브레스를 훔치러 왔다.

‘......찾았다.’

눈을 감고 집중하니 건물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꿈을 꾸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민할 것 없이 바로 꿈속으로 들어갔다.

─화아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