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퀘스트 (1)
절규와도 같은 성녀의 절박한 외침을 들은 워린레이크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대악마의 강림? 그게 무슨 소리지?”
젠장!
하필 이 타이밍에 강림을 하다니!
이것은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내 계획은 이 녀석에게 적의 핵심 무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군단장들의 처리를 떠넘기고, 나는 방해물 없이 쾌적하게 대악마를 처치한 뒤 유유히 빠져나오는 거였단 말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드래곤이 대악마의 강림 사실을 알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 녀석과 막타 경쟁을 펼쳐야 할 수도 있다.
‘근데 그 무지막지한 브레스랑 경쟁이 되겠냐고!’
그래서 일단 잡아뗐다.
“아, 신경 쓰지 마십쇼. 저 여자 머리에 꽃 꽂고 있는 거 보이시죠? 저거 원래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는 여잡니다.”
“미친 여자라고?”
“예예, 생각해 보십쇼. 인간계에 대악마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립니까? 아하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오네.”
물론 성녀한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저 검은 기둥은 뭐지? 이렇게나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지 않은가.”
“예? 그건... 음... 아, 그래. 군단장!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녀석들 기억하시죠?”
“네가 입이 닳도록 강조했던 절망, 공포, 탐욕의 군단장 말인가?”
“예예. 절망, 공포, 탐욕의 군단장이요. 아마 그놈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뭔가 불길한 수작질이라도 부리는 모양입니다.”
“흐음.......”
워린레이크는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저편에 보이는 검은 기둥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보는 편이 좋겠군.”
“예? 아, 아니...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까지야... 좀 기다리다 보면 놈들이 알아서 워린레이크 님을 찾아오지 않을까요? 아까의 그 강력한 브레스는 멀리서도 보였을 테니 말이죠.”
“그렇다고 놈들이 찾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나는 저곳으로 갈만한 능력이 있는데.”
“그, 그것도 그렇긴 하죠.”
역시.
이 녀석이 검은 기둥을 목격한 이상 그곳으로 가는 건 막을 수 없다. 뭔가 그럴싸한 명분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솔직히 나는 말 같지도 않은 억지 핑계를 대고 있었으니까.
“그, 그럼 지금 바로 가시는 겁니까? 본체로 현신해서 하늘을 날아서...?”
“아니. 가는 길에 하찮은 마물들만 있을 터인데 피곤하게 그럴 필요는 없겠지. 나는 상대가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본체로 돌아간다. 군단장이라는 녀석들은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군.”
“......? 아, 예. 그러시군요.”
방금 하급 마물들 따위한테 진심으로 브레스를 날려놓고서는 왜 이제 와서 무게를 잡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피곤하다’고 한 걸 보면 본체인 상태에서는 에너지 소모가 큰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어쨌든 나한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녀석이 하늘을 날아서 이동한다면 나로서는 따라잡을 방법이 없으니까. 아케인 텔레포트가 있긴 하지만, 오늘분은 2회밖에 안 남았고 또 2회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워린레이크는 검은 기둥이 솟아있는 장소를 향해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저렇게 여유로운 거지? 진짜 종잡을 수 없는 놈이네.’
솔직히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끈적거리는 듯한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기둥이 보이면 최대한 빨리 가보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런데 저렇게 느긋하게 걸어가다니.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뭐, 쓸데없이 여유 부려 준다면 나야 고맙지. 그럼 나도 당장 저곳으로 가야겠─’
“성자님!!”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성녀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혹시 조금 전에 미친 여자라고 불렀던 게 들렸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더 늦기 전에 저희도 어서 움직여야 해요! 대악마의 강림은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예? 그게 무슨... 대악마는 이미 강림에 성공한 거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저 검은 기둥이 생긴 거고.”
“아니요. 대악마 정도의 존재는 그리 쉽게 차원을 넘을 수 없다고 해요. 저건 단지 강림 의식이 시작되면서 발생한 것일 뿐, 완전히 강림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러니 서두르면 아직 기회가 남아 있어요!”
그녀는 내 팔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가요! 강림 의식이 끝나기 전에 욕망의 군단장을 처치해야 합니다.”
“예? 아... 그...으래야겠죠.”
나는 엉겁결에 성녀에게 이끌려 가는 와중에 몸 상태를 체크해봤다.
‘......일단 컨디션은 괜찮군. 이 정도면 대악마를 잡을 수 있으려나?’
마나도 넉넉했고 공격 마법도 충분했다. 물론 블리자드와 몇 개의 공격 마법을 소모한 상태였으나,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비롯한 내 주력 마법들은 여전히 횟수가 남아 있었다.
대악마가 정확히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강림한 순간만큼은 군단장보다 약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했으니 처치가 불가능하진 않을 듯했다.
“형제자매님들도 서두르세요! 이 자리에서 모두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저희는 세르시아 님의 명을 완수해야만 합니다!”
성녀가 잔존해있는 교단군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즉각적인 호응이 터져 나왔다.
“물론입니다, 성녀님!”
“가자! 성전을 치르러!”
“와아아아아아!”
“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신이 함께 한다고? 우리 뿐인데?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코빼기도 안 보이는 신이 어떻게 함께하고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의욕은 넘쳐흘렀다. 그들은 곧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세 좋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세르시아 님을 위하여!”
“가세! 형제들! 신께서 우릴 지켜주실 걸세!”
라고 하기에는 방금 드래곤의 브레스에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지 않았나?
“성자님, 저희도 달려요!”
“.......”
내가 달려 나가는 교단군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재촉하던 성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성자님? 왜 멍하니 서 계시는─”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야 뭐 대악마가 강림에 성공하길 바라는 사람이니 너무 일찍 도착하면 곤란한 것도 있었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네? 그게 무슨...?”
“지금 모든 마물은 초비상 상태일 거 아닙니까.”
저 검은 기둥이 치솟은 시점부터 대악마의 강림 의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했으니, 분명히 지금 모든 마물은 위부의 위협으로부터 강림 의식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동원할 것이 분명했다.
가장 하찮은 마물부터 군단장까지 싹 다.
일반적인 마물이야 어떻게든 뚫고 들어갈 수 있다고 쳐도, 군단장이 나타나서 앞길을 막으면 쉽게 통과할 수 없다. 심지어 군단장은 의식을 진행 중인 욕망의 군단장을 제외하고도 셋이나 더 있는 상황. 셋을 동시에 만나면 답도 없다.
“그래도 가야죠! 지금은 조건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욕망의 대악마가 강림에 성공하면 상황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악화될 거예요!”
“아, 알죠. 제 말은 가지 말자는 게 아니라, 조금만 천천히 가는 게 어떻겠냐는 겁니다. 먼저 출발한 드래곤 놈보다는 살짝 늦게끔 말이죠.”
가만 생각해보니 굳이 드래곤보다 빨리 움직일 필요가 없을 듯했다. 어차피 먼저 가봤자 군단장을 만나서 시간을 뺏길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그냥 멀찌감치 떨어져서 드래곤을 뒤따라가다가, 녀석이 군단장을 마주했을 때 그 틈을 노리고 진입하면 이이제이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았다.
“......드래곤을 미끼로 쓰자는 말씀이신가요?”
“예, 바로 그겁니다. 그놈이 생각 없이 내뿜던 브레스에 무고하게 희생당한 우리의 형제자매님들이 얼마나 됩니까? 이 악질 새끼! 우리도 그 악질을 이용해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희생당한 형제자매님들이 편히 눈 감지.”
내가 주먹을 불끈 쥔 채 분개하듯 말하자, 성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네요. 좋아요, 속도를 늦춰서 드래곤을 뒤따라가기로 하죠. 그러는 사이에 대악마가 강림해버릴까 봐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에이,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니까.
***
저 멀리 보이는 하늘에서 무수한 얼음덩어리들이 지면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후두두두두둑!
“그래! 바로 그거다! 아주 훌륭해!”
나는 박수와 함께 찬사를 보냈다.
물론 멀어서 들리진 않겠지만.
워린레이크를 뒤따라가기로 한 것은 몹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녀석은 착실하게 마물들을 쓸어버리면서 검은 기둥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가 인간형으로 사용하는 마법은 내가 아는 최고의 물 속성 마법사인 클로이나 니콜스가 사용하는 고유 마법과 비슷한 수준의 위력을 자랑했다. 솔직히 드래곤이라는 걸 감안하면 대단치는 않은 듯했지만, 어쨌거나 일반 마물을 처리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우리는 딱히 싸울 필요 없이 그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서 뒤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브레스 원툴인 타입인가? 어쨌든 아주 순조롭군. 흐흐흐.”
일단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만 계속 진행된다면 무난하게 최종 퀘스트를 완료하고 ‘억울한 마법사’라는 타이틀은 완전히 졸업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슬슬 검은 기둥에 가까워져 가는데... 군단장은 언제 나오는 거지?’
멀어서 정확히 식별하긴 어려웠지만, 이번에도 워린레이크가 인간형으로 마법을 쓴 걸 보면 군단장급 개체와 싸우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나설 타이밍은 워린레이크가 절망, 공포, 탐욕의 군단장 중에서 최소 두 마리 이상 잡았을 때다.
물론 가장 베스트는 녀석이 세 번째 군단장과 싸울 때 내가 대악마를 처치하러 가는 것이겠으나, 너무 완벽한 타이밍만을 재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두 마리만 잡아줘도 움직일 생각이다.
‘흐음... 아무리 헤츨링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드래곤인데... 군단장 두 마리쯤은 처리할 수 있겠지?’
적어도 내가 보고 느끼기엔 그랬다.
그 압도적인 브레스가 있는 이상 워린레이크가 군단장보다는 확실히 윗줄이다. 두 마리쯤은 녀석이 어렵지 않게 맡아줄 수 있을 테니, 나는 많아봤자 한 마리만 상대하면 될 것이다.
“야, 앨리스. 잠깐만 이리로.”
나는 앨리스를 불러서 이 계획을 공유했다. 신의 뜻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집행해야 한다고 여기는 성녀나 교단군과는 달리, 앨리스는 나와 함께하니까.
“......해서, 우린 그 타이밍에 움직일 거야.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도 군단장을 한 마리 잡고 들어가야 하니까 준비해둬.”
내 설명을 들은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알겠어. 그런데... 내가 도움이 되겠니? 나는 벌써 불사조를 써버렸는걸. 그 이하의 마법은 군단장한테 전혀 안 먹힐 테구.”
“인페르노가 있잖아. 꺼지지 않는 지옥의 업화. 만약 군단장을 만나면 내가 전면에서 싸울 테니, 너는 기회를 엿보다가 인페르노를 갈겨버려.”
“앗, 그렇지 참. 그게 있었구나. 그런데 그게 악마 군단장한테도 먹힐까? 지옥에서 비롯된 불이니 지옥 출신한테는 안 먹히는 거 아니니?”
“......흠?”
그런가?
“글쎄, 먹힐 것 같은데? 우리도 인간계에 있는 불에 닿으면 뜨겁잖아. 그놈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은─”
지옥의 불이 지옥의 존재한테 먹힐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돌연 저편에서 푸른 섬광이 터져 나왔다.
─번쩍!
“......!”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워린레이크와 탐욕의 군단장이 둘 다 본체로 현신해서 대치하고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탐욕의 군단장의 본모습을 알아본 이유는, 인간형일 때와 마찬가지로 본체도 굉장히 뚱뚱했기 때문이다. 그는 워린레이크보다 조금 작을 정도로 거대했는데, 체형이 거의 동그라미에 가까워서 굴리면 굴러갈 것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나는 반색하며 소리쳤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탐욕의 군단장이었다. 아마 워린레이크가 금화를 주는 것을 거부한 모양이었다.
“크오오오오오!!!”
워린레이크도 걸쭉하게 한번 포효한 뒤 대응에 나섰다. 하늘로 날아오르며 군단장의 공격을 피한 그는, 여기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얼음송곳들을 생성해내 지상을 향해 발사했다.
─콰콰콰쾅!
어찌나 거대한 얼음송곳인지, 그것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진동이 느껴졌다.
탐욕의 군단장을 몸을 둥그렇게 웅크려서 그것을 방어해냈다. 방어에 성공했는지 아니면 상처를 입었는지는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워린레이크가 의기양양하게 입을 여는 것을 보니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한 듯했다.
“군단장이라고 하더니 별것 없군. 기대 이하야.”
“내놔!!! 금화!!!”
둘 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그들의 대화는 제법 생생하게 들려왔다.
“흥, 자신 있다면 나를 쓰러트리고 가져가라. 절망과 공포의 군단장은 어디에 있지? 당장 이리로 불러라. 내 본체로 현신한 김에 너희들을 일거에 격멸해야겠다.”
워린레이크가 한껏 멋들어진 대사를 읊고 있을 때였다. 새로운 두 개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우리를 찾았나.”
“여기 있다. 네가 찾던 절망과 공포가.”
절망과 공포의 군단장으로 추정되는 두 마리의 악마가 공중으로 떠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겁대가리를 상실한 녀석들이로군. 감히 드래곤의 영토에 침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내 앞에 스스로 나타나다니 말이야.”
“크하핫! 네놈이야말로 배짱이 두둑하지 않은가. 우리 셋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못 할 것도 없지. 밑에 있는 저 뚱뚱한 녀석은 영 시원치 않더군. 너희들이라고 다를 건 없겠지.”
“저 녀석은 우리 중 최약체! 고작 탐욕에게 우위를 점한 걸로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지 마라!”
아니, 이 새끼들.
키보드 워리어야 뭐야?
언제까지 입씨름만 할 건데? 빨리 싸우라고!
나는 저 녀석들이 빨리 싸우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침 군단장 세 놈이 전부 모였으니, 싸움이 시작되면 내가 강림 의식이 진행 중인 검은 기둥으로 가는 것을 막을 만한 존재는 없을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동안 입으로만 싸우던 녀석들은, 곧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지막으로 외치더니 진짜로 싸우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왜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 불리는지 똑똑히 보여주마!! 크오오오!!”
“모든 생명체는 공포를 품고 있다!”
“절망에게 절망해라!”
“반짝이는 것!! 금화!! 내놔!!!”
말하는 건 상당히 병신 같았지만, 그들이 벌이는 싸움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콰드드드드득! 콰앙! 콰앙! 쿠지지직!
푸른빛과 검은빛이 허공을 수놓았다.
탐욕의 군단장은 그 체구에 걸맞지 않은 엄청난 점프력을 보여주며 드래곤을 향해 육탄 공격을 감행해댔고, 다른 군단장들은 불길한 검은 기운을, 워린레이크는 육탄전과 마법을 동시에 쏘아댔다.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들의 싸움. 그들의 공격은 어느 하나 위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쿠웅! 쿠웅! 쿠웅! 드래곤 못지않게 거대한 탐욕의 군단장이 한번 점프할 때마다 지축이 뒤흔들렸다.
나머지 두 마리의 군단장과 드래곤은 공중에서 서로를 향해 마법을 날려댔기에 대부분은 빗나갔고, 목표물을 잃은 마법이 내리꽂힌 지면에는 어김없이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콰쾅! 퍼엉! 퍼엉!
‘미, 미친...! 다 같이 싸우는 건 좋은데 이래서는 검은 기둥으로 갈 수가 없잖아!’
무지막지한 싸움의 여파에 도저히 검은 기둥으로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싸우는 장소를 피해서 우회할 수도 없었다. 저놈들은 한자리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전장을 바꿔가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움이 심각해지자 성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모, 모두 뒤로 물러나세요!”
그렇다. 전진은커녕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오히려 뒤로 물러나야 할 정도였다.
‘......어쩌지? 텔레포트로 강행 돌파할까?’
그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여기서 검은 기둥까지 가려면 텔레포트를 두 번 연달아 써야 할 것 같았는데, 중간 지점에서 다음 텔포를 준비하는 동안 놈들의 공격에 휩쓸릴 수도 있을 듯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이 승기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니, 워린레이크 저 새끼는 왜 브레스를 안 쏘는 건데? 약간 밀리는 것 같은데 지금 그따위로 여유 부릴 때냐고!’
녀석은 그냥 마법과 육체만 이용해서 싸우고 있었는데, 슬금슬금 밀리는 듯 보였다. 제발 헛짓거리 하지 말고 빨리 브레스로 정리해줬으면 싶었다.
“크오오오오오!!! 이 역겨운 놈들이!”
역시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워린레이크도 본인이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분하다는 듯 크게 포효한 뒤 브레스를 준비했다.
─고오오오오!
그의 입 주변으로 습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싹한 한기가 느껴지며 하늘이 온통 파랗게 물들었다.
─콰콰콰콰콰콰!!
가공할 만한 위력의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브레스는 공중에 떠 있던 군단장들을 순식간에 집어삼켰지만, 워린레이크는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꺾어대며 세상을 뒤덮을 기세로 브레스를 난사했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가 있는 곳까지 영향을 미쳤다.
“우와아악! 브레스 피해요!”
우리는 뿔뿔이 흩어지며 각자의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콰콰콰콰콰콰!!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몰아치고 난 뒤,
곧 세상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끄, 끝났나?”
나는 조심히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드래곤과 군단장이 싸우던 곳을 중점으로, 무슨 겨울 왕국이 펼쳐져 있었다.
“어휴, 큰일 날 뻔했...... 어?”
나는 드넓게 펼쳐진 설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거, 검은 기둥 어디 갔어??”
검은 기둥이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한 나는 곧장 텔레포트를 캐스팅했다.
─번쩍!
─번쩍!
[금일 사용 가능한 ‘아케인 텔레포트’ - 0회]
두 번 암전된 시야가 회복되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떠한 제단 앞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마물이었다.
“.......”
이 마물은 정황상 강림 의식을 진행 중이었던 욕망의 군단장이 분명해 보였다.
즉, 내 계획은 개같이 멸망했다는 거다.
“이... 이... 이....”
백지장처럼 새하얗던 내 머리는, 곧 어떤 생각 하나로 가득 채워졌다.
욕망의 군단장을 죽인 드래곤을 죽인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