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악마의 강림을 방관해라! (1)
─저벅. 저벅.
느긋한 나의 걸음걸이와는 다르게 흑마법사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럴 수는...? 서, 설마! 네놈은 내가 두렵지 않은 것인가?”
“내가 왜 너를 두려워하겠어?”
강자는 약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이 경우에는 내가 강자고 저놈이 약자다.
“어, 어째서? 어째서 공포의 대군주님을 모시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냐! 너도 저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떨거지들처럼 공포에 떨어야 한다!”
그는 내 뒤편에 있는 자유도시 연합의 무장병들을 가리키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아니, 이거 웃긴 놈이네. 야, 공포의 대악마가 강한 거지 네가 강한 거야? 어디서 남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쎈 척하고 있어? 어!”
“이름을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분의 권능을 일부나마 나누어 받은─”
“갈!! 이놈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나 세르시아 교단의 성자야. 너 같은 놈 때려잡는 사람이라고. 교단으로 끌고 가서 말뚝에 매달고 화형 한번 시켜줘야 내가 누군지 아시겠어?”
네 뒷배가 대악마라면,
내 뒷배는 세르시아다 이거야.
“서, 성자? 네놈이 아군조차도 거슬리면 가차 없이 죽인다는 그 미치광이 성자라고...? 그, 그래서 나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었나....”
녀석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뭘 끄덕거리고 있어?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너를 죽이고 싶어지잖아. 하지만 나는 약속을 중시하는 사람이니까 일단 살려줄게.”
“......약속? 우리가 무슨 약속을 했지?”
“무슨 약속이냐니? 내가 질문을 하고 너는 답변을 하기로 약속했잖아? 너한테 가까이 가면 묻는 말에 대답해준다며.”
“그, 그게 어째서 약속이 되는 것이냐!”
“아, 내가 말을 잘못했네. 약속이 아니라 협박이야.”
나는 녀석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죽기 싫으면 묻는 말에 대답해라!”
─위이잉
손끝에서 새하얀 빛이 맺히며 흑마법사를 향해 뻗어나갔다.
[금일 사용 가능한 ‘홀리 리커버리’ - 3회]
사실 이건 엄밀히 분류하자면 회복 마법이지만, 언데드를 비롯한 마물에게는 데미지로 들어가며 태워버린다. 아마 악마의 하수인인 흑마법사에게도 마찬가지겠지.
“......!”
녀석도 황급히 대응하며 검붉은 무언가를 쏘아 보냈는데, 나의 백색 기운은 가볍게 그것을 밀어내며 흑마법사에게 직격했다.
“흐아아아아아─”
내 예상은 절반만 맞았다.
성스러운 빛에 닿은 흑마법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으나, 몹시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뜨, 뜨거워어어어!! 제, 제발 멈춰다오!!”
뜨겁다고? 멀쩡해 보이는데?
혹시 내면이 타오르는 건가?
흑마법사도 어쨌거나 육신은 인간의 그것이므로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무언가가 데미지를 받는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영혼이라든가.
아니면 내 홀리 리커버리가 그냥 힐로써 들어갔는데, 저놈이 아픈 척 쑈하는 거일 수도 있고.
“흐음.”
나는 대화를 위해 일단 빛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녀석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았다.
“끄으...억... 허억....”
“진짜야? 진짜로 고통스러운 거야?”
“그으...렇다... 흐으억.”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걸 보니 정말 데미지를 받긴 받은 듯했다.
“너는 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길래 힐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거야? 쯧쯧.”
“.......”
어쨌든 이 정도면 진실의 마법인 스태틱 쇼크는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으면 좋았잖아. 아무튼... 이제부터라도 성실하게 대답하도록. 알겠어?”
“아, 알겠다. 무, 무엇이든 물어봐라.”
그는 조금 전의 경험이 몹시도 고통스러웠던 모양인지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이며 의욕을 불태웠다.
좋군. 나는 바로 질문의 시간을 가졌다.
“독수리 부리는 왜 노랗지?”
“?? 그, 그게 무슨...?”
“아,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하길래 그냥 평소에 궁금했던 걸 한번 물어봤어.”
“.......”
“자, 이제 진짜 질문.”
나는 녀석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물었다.
“대악마의 강림에 대해 아는 걸 말해봐. 신뢰할 만한 출처에 의하면 욕망을 관장하는 대악마 릴리스를 강림시킬 계획이라던데.”
“허업...! 어떻게 그렇게 상세히 알고 있는 거지?”
흑마법사는 헛숨을 들이켜며 당황했다.
아마 누굴 강림시키려 하는지까지 알고 있어서 놀란 듯했다.
“경고 1회. 질문은 내가 해.”
“마, 맞다. 나의 군단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욕망의 군단장이 자신의 군주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의식을 진행 중이라고 하더군.”
“......뭐?”
짧은 문장이었지만,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다양했다.
“욕망의 군단장이 이미 강림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그럼 그놈은 벌써 이곳에 와 있다는 소리인가? 그리고 너의 군단장은 또 누군데? 그 녀석도 이곳 인간계에 있는 거고?”
“처, 천천히 물어봐라! 일단... 나의 군단장님은 당연히 공포의 군단장이시다.”
“음, 그래. 생각해보니 그건 당연하겠네.”
이 녀석이 섬기는 대악마는 공포의 대악마였으므로, 군단장도 당연히 그 휘하에 있는 녀석일 것이다.
“그래서, 그 공포의 군단장이라는 녀석은 지금 인간계에 있다는 건가?”
“그렇다.”
“욕망의 군단장도 인간계에 있고?”
“그렇다.”
“그럼 지금 이곳에는 군단장이 둘이나 있다는 소리네?”
“그건 아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알기로 현재 인간계에 있는 군단장은 다섯이다. 욕망, 공포, 절망, 증오, 탐욕. 이 다섯 군주의 군단장들이 넘어와 있는 상태이지.”
“뭐? 이런 미친!”
이건 경악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강력한 군단장이 다섯 마리나 넘어와 있다니?
굳이 대악마를 소환할 것도 없이 그냥 이놈들만 나서도 인간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전력 아닌가? 남 일에 무관심하다는 드래곤만 안 건드린다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얘기다.
“뭔데? 그놈들은 왜 죄다 넘어온 건데?”
“다른 군단장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오직 공포의 군단장님뿐.”
보아하니 이 녀석도 모든 걸 알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놈도 쫄따구에 불과하니까.
“흐음... 그거라도 말해봐. 그놈은 왜 왔지?”
“마찬가지로 공포의 군주님을 강림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서 건너오셨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하시더군.”
역시 그렇군.
세르시아의 말에 의하면, 욕망의 대악마만이 꿈을 관장하는 특성 덕분에 비좁은 차원의 틈을 넘어 올 수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런 특성이 없는 다른 대악마는 넘어오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의 군단장님께서는 일단 욕망의 대악마 릴리스 님을 강림시키는 걸 돕기로 하셨다. 릴리스 님이 강림하신 후 힘을 되찾으시면, 다른 대악마들이 넘어올 방법을 찾아 주시기로 했지.”
가능성이 큰 쪽을 먼저 밀어주겠다는 건가.
“강림은 어떻게 진행되는 건데? 너의 군단장은 그걸 어떻게 돕는다는 거고?”
“그것까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다. 강림 의식은 욕망의 군단장이 혼자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지. 다른 군단장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의식에 방해될 만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역할이고.”
그렇다면... 일단은 다섯 마리의 군단장 중에서 오직 욕망의 군단장만이 강림에 필요한 필수 인력이라는 거군.
“위치는? 강림 의식은 어디에서 벌어지지?”
“어딘가의 늪지대라고만 들었다.”
“그건 너무 막연한 대답이잖아. 더 성의있게 말 안 해? 어!”
내가 멱살을 잡고 흔들며 윽박지르자, 녀석이 황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일개 하수인에 불과한 나에게 그런 상세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는단 말이다!”
“흐음, 그래?”
“그, 그렇다. 그곳을 찾아가는 건 자살행위겠지만... 그래도 가보고 싶다면 마물이 많이 나오는 방향으로 가면 되지 않겠나...?”
제법 절박한 모양인지 그는 대안까지 제시했다.
“......좋아. 질문의 시간은 이걸로 마무리하겠어. 수고했고, 이만 보내줄 테니 잘 가라.”
“고, 고맙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
“아니, 아니지. 가는 길은 그쪽이 아니지.”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흑마법사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 그게 무슨...?”
대악마를 강림시키는 데에 필요한 욕망의 군단장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마물도 살려둘 이유가 없다. 내가 강림한 대악마를 습격할 때 놈들은 방해가 될 테니, 그전에 최대한 줄여놓는 게 당연히 좋다.
“지옥으로 보내준다는 소리였어. 흑마법사인 너한테는 업계 포상 아닌가? 감사히 여기도록.”
“이런 개자식─”
─스걱!
***
“이제야 좀 자유롭네.”
나는 용족 토벌대를 만나서 골드 부족장을 떼어놓은 후, 조사할 게 있다며 앨리스와 함께 따로 빠져나온 상태였다.
그 한량 같던 녀석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정보 수집도 대놓고 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도 있게 됐다.
내가 원하는 행동이란, 당연히 강림 의식이 진행되는 장소를 찾아가 보는 거다. 상황을 직접 봐야 대악마를 암살하고 빠져나올 만한지, 아니면 미리 주변을 쓸어서 퇴로를 확보해놔야 하는지 등의 견적을 낼 수 있으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마물이 많이 나오는 방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 근데 좀 쫄리는데.”
“응? 왜?”
내가 돌연 그렇게 중얼거리자, 앨리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악마 군단장 말이야. 이 산맥에 그놈들이 다섯이나 있다고 했잖아? 가는 길에 재수 없으면 그놈들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다섯 군단장 중에서 내가 아는 건 둘이다.
증오의 군단장 벨고프와는 직접 싸워봤고,
절망의 군단장은 천둥의 신이 싸울 때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머지 셋인 욕망, 공포, 탐욕의 군단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일절 없다. 얼마나 강한지, 어떤 방식의 공격을 구사하는지, 심지어는 얼굴도 모른다. 다른 군단장과 마찬가지로 본체로 현신하기 전에는 그냥 인간의 외형을 하고 다닐 거라 짐작할 뿐.
“군단장이 그렇게나 강력하니? 엘, 너도 이길 수 없을 만큼?”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 놈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웬만하면 나 혼자서 이기긴 힘들다고 봐야지. 아니, 너까지 포함해서 이 대 일로 싸워도 어려울걸?”
앨리스도 제법 강력한 전력이지만 그래도 힘들지 싶다.
“그, 그렇게나 강하다구? 그럼 정말 만나면 어떡해?”
“어떡하긴. 이길 수 없는 상대 같으면 피해야지. 아니면 아군을 불러서 다구리 치든가. 세르시아 교단군하고 용족 쪽에 미리 말을 해놨으니 신호를 보내야겠지.”
서로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위기 상황에 놓이면 허공에 마법을 쏴서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솔직히 용족 쪽은 잘 모르겠는데, 세르시아 교단군은 내가 신호를 보내면 무조건 달려올 거야. 그들과 힘을 합쳐 싸운다면 군단장 한 마리 정도는 어떻게든 해볼 수 있겠지.”
신성력을 무기로 사용하는 그들은 인간과 싸울 때보다 마물과 싸울 때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반왕군으로서 내전에 참여했을 땐 별 볼 일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다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구....”
“그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주변이나 잘 살펴. 강림 의식은 늪지대에서 진행 중이라고 했으니까.”
“응.”
물론 용족과 갈라지고 나서 산맥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으므로 벌써 목적지를 발견할 가능성은 적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우리는 주변에 늪지대가 있는지 꼼꼼하게 살피며 산속을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던 중이었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문득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우욱... 뭔가 썩은 냄새 같지 않니?”
“그러게. 지하 감옥에서 비슷한 냄새를 맡아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가보자.”
나는 앨리스와 함께 냄새가 흘러나오는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악취의 근원은 수풀이 무성한 숲속의 어느 공터였다.
“이, 이게 무슨....”
그곳에는 자유도시 연합의 무장병들로 추정되는 시체 수십 구가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는데, 절반 정도는 깔끔하게 목이 잘려있었고 나머지 시체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마치 염산에 담가서 녹여버린 것처럼.
그리고 그 시체들의 중앙에는 내가 지금껏 본 것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호화로운 복장을 갖춰 입은 중년의 배불뚝이 사내가,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무장병의 머리채를 붙잡고 서 있었다.
‘......뭐지? 자유도시 출신의 부유층인가?’
한눈에 보아도 굉장한 부자처럼 보였다.
나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마물에게 습격당하신 겁니까? 그 무장병의 머리채는 왜 들어 올리고 계신 겁니까?”
“......? 아.”
자신의 손에 매달려 힘없이 버둥거리고 있는 무장병을 멍하니 쳐다보던 사내는,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돈을 달라고 했는데... 이 녀석이 돈을 안 주잖아.”
“예? 돈이요?”
“금화 말이야....”
그렇게 대답한 그는, 다시 붙잡고 있는 무장병을 향해 말했다.
“내놔, 금화.”
“크윽... 어, 없다고 몇 번을 말하지 않았소. 누가 마물과 싸우러 오는 데에 금화를 들고 오겠냐는 말이오.”
“죽어, 그럼.”
순간, 그의 손에서 꾸물거리는 검은색의 무언가가 흘러나오더니 무장병을 집어삼켰다.
─치이이이이익!
“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도 잠시.
순식간에 녹아내린 무장병은 이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뭉개진 시체와 같은 상태가 되며 삶의 종지부를 찍었다.
툭. 그것을 바닥에 집어 던진 중년의 배불뚝이 사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반짝이는 걸 좋아해... 금화는 반짝이지... 나는 욕심이 많아서 좋아하는 건 반드시 가져야 해... 그런데 이 인간들은 내가 좋아하는 금화를 주지 않았어... 그래서 전부 죽여버릴 수밖에 없었지....”
이 녀석, 설마?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당신, 탐욕의 군단장입니까?”
욕심이 많고 불길한 힘을 다루며 인간의 외형을 가진 자. 결론은 이것뿐이었다.
“그래... 나는 탐욕의 군단장 퀘른이야....”
자신을 소개한 그는, 돌연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너... 금화 있어...?”
“.......”
이 새끼가?
나는 검집이 매달려있는 허리춤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댔다.
“내놔, 금화.”
그리고 검집 옆에 매달린 돈주머니를 떼어내 탐욕의 군단장을 향해 던졌다.
“아, 당연히 있죠. 자, 여기 있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뭐가 문제인가?
원하는 걸 줘버리면 그만인데.
“고마워... 너도 수고해....”
나는 고마움을 표하는 탐욕의 군단장에게서 유유히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