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89화 (189/200)

족장 회의 (4)

일주일 후.

“저 녀석이야?”

“실버 부족장 아리샤이나를 꺾었다는 인간 노예가?”

앨리스와 함께 도시를 걸어가고 있으려니, 길가에 있는 용족들이 우릴 보며 수군거렸다.

“그래, 모든 부족장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도전하고 승리했다더군.”

“생긴 건 평범해 보이는데...?”

“평범한 얼굴 뒤에 드래곤 못지않은 광기를 숨기고 있다고 하더군. 눈을 마주친 상대에게 반드시 도전하는 미친 녀석이라고 하니 주의해라.”

“뭐? 고작 그런 이유로? 정말 미친 녀석인가 보군.”

‘다 들린다 이 새끼들아.’

섬세하지 못한 녀석들. 그런 흉을 볼 거면 당사자한테는 안 들리게 하든가.

하지만 나는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저 녀석들의 말마따나 내가 미친 녀석이라 그런 것은 아니고, 이제는 더 이상 용족을 때려잡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실버 부족장과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앨리스는 족장 회의에 참석할 권한이 생겼다. 애당초 내 목적은 드래곤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앨리스를 그곳에 꽂아 넣는 것이었으므로,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제 다음 단계를 진행해야 하는데 괜히 말썽 피울 필요는 없겠지. 나는 아직 노예의 신분이기도 하고.’

내친김에 골드 승급전까지 해볼까도 싶었지만, 드래곤이 방문할 때까지는 이 도시에서 지내야 하니 참기로 했다. 굳이 원수를 늘려서 좋을 건 없을 테니까.

약간 특이한 점은, 내가 용족 사회의 대빵 중 하나인 부족장을 꺾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예의 신분이라는 것이다. 용족은 절대 다른 종족을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오랜 규율이라나 뭐라나.

‘뭐, 신분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평생 여기에서 살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래서 내가 노예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나를 향한 시선과 태도에는 변함이 있었다.

앨리스가 속한 레드 일족은 나를 매우 기꺼워하며 살갑게 굴었고, 골드 일족도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나머지 일족은 나를 아니꼬워했지만.

브론즈와 실버야 내가 두들겨 팼으니 그렇다 쳐도, 블루는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힘을 보여줘서 그런지 나를 싫어한다고 해도 대놓고 멸시하는 녀석들은 사라졌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신분은 힘이란 말이지.

그런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도시 중앙에 있는 본관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저곳에서 족장 회의가 열린다.

“저기... 나 긴장돼. 내가 들키지 않고 잘할 수 있을까?”

목적지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앨리스가 초조한 듯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본관 옆에 있는 으슥한 공터로 앨리스를 끌고 갔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대답했다.

“왜? 저번에 보니까 티안브리스 흉내를 기가 막히게 내던데. 부족장들 사이에서 인페르노까지 써가며 분위기도 휘어잡았고. 그때처럼만 하면 문제없어.”

솔직히 나는 앨리스라는 걸 미리 알고 있어서 그렇지, 모르는 채로 만났으면 나도 그녀를 티안브리스라고 착각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 그건 부족장이 얼마나 강한지 몰랐을 때였잖니? 너랑 싸우는 모습을 보니까 엄청나게 강한 것 같던데... 이, 이제는 무섭단 말이야!”

“뭐가 무서워? 들키지만 않으면 싸울 일도 없는데. 그리고 솔직히 너도 그 녀석들과 비빌 정도는 돼. 네 인페르노에 쩔쩔매던 거 기억 안 나?”

이건 그냥 격려해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앨리스가 부족장들보다는 아랫급이긴 해도, 인페르노라는 회심의 카드가 있지 않은가? 혹여라도 그 지옥의 업화에 닿으면 누구든지 공평하게 잿더미로 산화한다.

물론 인페르노에도 파훼법이 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불이 붙은 신체 부위를 신속하게 절단하면 된다. 하지만 보통은 몸에 불이 붙으면 그걸 끄려는 시도부터 하기 때문에, 타이밍을 놓치고 산화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뭐, 절단할 수 없는 부위에 불이 붙을 수도 있고.

“그, 그래두 긴장되는걸....”

“그동안 잘해왔으면서 갑자기?”

누구보다 이 일을 즐겼던 건 앨리스였다.

큰소리 빵빵 치면서 다른 용족과 노예들에게 윽박지르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아무래도 부족장들이 득실거리는 회의실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건 그녀로서도 부담이 큰 모양이었다.

“너는 그냥 조용히 녀석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돼. 거기에서 들은 내용을 나한테 전달만 해줘. 물론 만약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네가 나서서 물어봐야겠...... 아니, 아니다.”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가 같이 들어가는 게 낫겠다.”

“네, 네가?”

앨리스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래, 너 혼자만 보내는 건 걱정돼서 안 되겠어.”

“하지만 너는 노예잖니? 노예는 회의에 참석할 수 없구. 그래서 나한테 이 일을 부탁한 거잖니.”

“괜찮아. 몰래 들어가면 되니까.”

“몰래...? 그 많은 부족장들의 눈을 속이고? 그게 가능한 거니?”

안 될 것도 없지.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능해. 나는 왕이니까.”

“......왕??”

“그래, 은신의 왕.”

클로킹.

─스스스스....

***

내 앞에서 걷고 있던 앨리스가 뒤를 흘끔 돌아보며 물었다.

“......거기 있는 거 맞지?”

“맞아.”

안도한 얼굴로 다시 앞을 바라본 그녀는, 몇 발자국을 더 걸은 뒤 또다시 뒤를 흘끔 돌아봤다.

“......따라오고 있는 거 맞지?”

“맞아, 잘 따라가고 있... 아니, 그만 좀 물어볼래? 벌써 수십 번은 물어본 것 같네.”

“하, 하나도 안 보이니까 그렇지!”

“그건 그래. 나도 내가 안 보인다 야.”

나는 은신 마법 클로킹을 사용한 채 앨리스와 함께 본관으로 들어와 회의실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이 클로킹은 효과가 몹시 확실해서 지척에 있는 상대조차 내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는데, 그건 나한테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내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곳저곳 부딪혔다.

“아무튼 이제 곧 회의실이니까 나한테 말 그만 걸어.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

“으응... 그래두 네가 같이 오니까 마음이 좀 놓인다.”

그렇게 앨리스와 함께 걷다 보니 머지않아 대회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벌컥!

“.......”

앨리스는 힘차게 문을 열어젖힌 뒤 한동안 말없이 회의장 내부를 노려보았다.

이건 뭐 기 싸움을 하자는 건 아니고, 뒤에 따라오던 나도 입장할 수 있도록 일부러 시간을 끄는 행위였다.

내가 냉큼 안으로 들어가서 앨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신호를 보내자, 그녀는 소리 나게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러자 회의실 안에 있던 청발의 사내가 못마땅하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일전에도 나와 앨리스에게 태클을 걸었던 녀석이었다.

“......꼭 그렇게 요란하게 입장해야 직성이 풀리나, 티안브리스?”

“흥, 내가 정말로 요란하게 입장할 생각이었다면 이따위 문은 불태워버렸을 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된다느니 무섭다느니 하며 앓는 소리를 하던 앨리스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 까칠하게 대꾸했다. 얘 이거 즐기는 거 맞다니까.

“......늦게 온 주제에 당당하군. 어쨌든 어서 자리에 앉아라. 회의를 시작해야 하니.”

그는 붉은색 테이블을 권했다. 머리가 붉은 용족들이 앉아있는 걸 보니, 아마 레드 일족의 지정석인 모양이었다.

“난 됐어, 의자가 불편해 보이네.”

“회의하는 동안 서 있겠다고?”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싫어해.”

“제길. 나도 너와 말을 섞을 때마다 피곤하군. 네 마음대로 해라. 대신 출입문 쪽에 서 있으면 바라보기가 힘드니 레드 일족의 뒤편에 가서 서라.”

“그 정도 부탁은 기꺼이 들어주지.”

“.......”

앨리스... 제법인데?

지하 묘지에서 슬라임이나 먹고 살던 그녀가 정말로 부족장이 앉는 고급 의자가 불편해서 자리를 거절한 건 아니다. 그녀가 거절한 이유는 그곳에 앉으면 나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져서다.

클로킹은 술자의 모습만 감춰줄 뿐 소리나 냄새를 비롯한 그 외의 기척은 감춰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용족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편이 안전하다.

어쨌거나 앨리스가 레드 일족의 뒤편에 가서 서자, 청발의 용족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후우...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일단은 워린레이크 님에 관한 건이다.”

오? 처음부터 드래곤에 관한 이야기야?

이거 시작이 좋군.

“조만간 그분께서 찾아오실 예정이니 상납할 재화를 마련해야 한다. 기존의 관례대로 각 부족에서 금과 보석 위주로 성의를 표해라.”

조만간이 언젠데?

나는 앨리스의 허리를 콕콕 찌르며 속삭였다.

[정확히 언제 오는 거냐고 물어봐봐.]

“히으윽!?”

“......? 뭐냐, 티안브리스. 그 야릇한 소리는?”

허리를 찔린 앨리스가 돌연 신음을 흘리자, 그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 그분께서는 정확히 언제 방문하시지?”

“아마 다음 주 중일 거다. 물론 종잡을 수 없는 분이니 확실한 것은 아니다만... 그쯤이 될 것 같군.”

다음 주? 그럼 코앞이잖아?

최종 퀘스트가 가시권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드래곤을 만났다고 해서 바로 녀석의 목을 따고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얼마나 강한지 전력 파악부터 해봐야겠어.’

솔직히 인간이 혼자서 드래곤을 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드래곤은 진작 이 세계에서 멸종했겠지. 하지만 녀석은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300살 먹은 헤츨링이라고 하니 거기에 가능성을 걸어보는 것이다.

“다들 일주일가량의 시간이 있다고 여유 부리지 말고 서둘러서 준비해라. 만약 그분께서 예정보다 일찍 오셨는데 선물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진노하실 테니.”

순간, 장내에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 물론이지. 우리 브론즈 일족은 회의가 끝나는 대로 당장 준비하도록 하겠다.”

“우, 우리도 평소보다 많은 성의를 표현하겠다.”

그 거만하기 짝이 없던 용족이 ‘드래곤의 진노’라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 벌벌 떠는 모습을 보니, 과연 드래곤이 대단한 존재이긴 한 모양이다.

동족들이 겁에 질려 황급히 대답하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청발의 사내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상납품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고... 다음은 마물 토벌에 관한 문제다. 다들 지난번 회의 때 레이븐 산맥 밑자락에 출현한 마물들을 토벌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겠지.”

마물이 출현했다고?

뭐, 흑마법사 하나가 산으로 숨어들었나 보네.

“물론이다. 워린레이크 님이 오시기 전에 그런 불결한 것들은 싹 쓸어버리기로 결정하고 전사 계급을 몇 파견했잖나?”

“그들이 전멸했다.”

“......!”

“그, 그게 무슨 소리지...?”

당황으로 장내가 소란스러워진 가운데, 블루 부족장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다. 아무래도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조악한 언데드가 아니라, 지옥에서 건너온 진짜 마물이 아닐까 싶더군. 세르시아교 본단에서도 병력을 파견한 걸 보면 말이지.”

“세르시아교 본단이라면... 엘디니아 왕국의? 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기까지 병력을 보냈다고?”

“그래, 심지어 성녀까지 행차했다더군. 그만큼 심각한 사안이라는 뜻이겠지.”

이번에는 나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성녀까지? 진짜 뭔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 혹시?’

짐작 가는 게 하나 있었다.

일전에 성녀의 꿈속으로 들어갔을 때 세르시아가 내게 했던 말이 있다. 인간계에서 차원의 틈들이 발견됐고, 그중에는 지옥과 연결된 것도 있다고.

그래서 나는 차원의 틈을 통해 악마가 넘어오면 내가 막아줄 테니 힘 좀 밀어주면 안 되겠냐고 세르시아에게 제안했었는데, 단박에 거절당했었다. 만약 악마가 넘어오면 자신이 신도들을 보내 처리할 테니 신경 끄라면서 말이다.

‘진짜로 마물들이 넘어온 건가? 그렇게 만만한 놈들이 아닌데... 징그럽기도 하고.’

거대한 지옥의 꼽등이가 터지면서 실지렁이 같은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던 역겨운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상체와 하체가 뒤바뀐 리버스 늑대인간은 또 어땠는가? 녀석은 나의 진심 펀치를 맞고도 끄떡없는 맷집을 자랑했다.

이렇듯 지옥의 마물들은 하급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인간이 감당하기엔 벅찬 상대다.

“......어쨌거나 우리 쪽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대로 놔둬도 인간들이 해결하겠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으니. 워린레이크 님이 오시기 전에 처리하려면 우리가 나서야 한다.”

“하지만 파견했던 전사 계급이 전멸했다면서?”

“그러니 전사보다 더 강한 용족이 나서야겠지.”

회의를 주도하던 청발의 사내는 앨리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떤가, 티안브리스. 네가 나서는 것이?”

“......내가?”

“그렇다. 너도, 너의 인간 노예도 부족장에 준하는 실력을 지녔지 않은가? 너희들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네 노예 때문에 아리샤이나가 부상 당해서 전력에 공백이 생겼으니 그걸 책임져줬으면 좋겠군. 물론 다른 용족들도 파견해서 너희를 지원토록 하겠다.”

“흥, 그 녀석이 약해서 패배한 걸 왜 내가 책임져야 하지? 나는 귀찮은 일 따위는─ 흐악?!”

콕콕콕콕콕콕!

[한다고 해! 한다고 해!]

나는 마치 재봉틀의 바늘처럼 손가락으로 앨리스의 허리를 찔러대며 속삭였다.

“......? 오늘따라 이상한 콧소리를 자주 내는군, 티안브리스.”

“무, 뭐! 무슨 소리를 내든 네가 무슨 상관이지? 아무튼 알겠다. 내가 노예와 함께 가보도록 하지.”

이래 봬도 나는 세르시아 교의 성자다. 무려 성녀까지 포함된 교단군이 왔다는데, 적어도 성자된 자로서 얼굴은 비추는 게 도리겠지.

라기보다는 사실 드래곤이 올 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심심해서 가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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