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88화 (188/200)

족장 회의 (3)

결투는 별도의 장소로 이동하지 않고 본관 앞에 있는 광장에서 하기로 정해졌다.

온 도시를 헤집어가며 싸우면 재산 피해가 발생하니 광장을 벗어나면 장외패라는 룰을 추가했는데, 웬만한 축구장보다 넓어서 별문제는 없을 듯했다.

“바로 시작할까? 아니면 준비할 시간을 좀 줄까?”

실버 부족장 아리샤이나가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베풀어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자비이니 네놈이 편할 대로 해라. 싸움이 시작되면 일말의 자비도 없을 테니.”

“음... 잠시만요.”

나는 상하차로 몸까지 풀고 온 사람이었으므로 딱히 더 준비할 건 없었지만 타임을 요청했다.

‘그래도 명색이 부족장이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게 좋겠지.’

잔챙이를 상대했을 때처럼 주먹만으로 싸우거나 여유를 부리는 건 만용일 듯했다. 이번 상대는 나름대로 강력한 녀석이니까.

나는 앨리스에게 다가가서 검을 요청했다.

체스터 백작가에게 선물 받은 내 검은, 노예의 신분으로는 무기를 소지하고 다닐 수 없어서 그녀가 맡아두고 있는 상태였다.

“주인님, 제 검 좀 주세요.”

“검으로 싸우려고?”

그녀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긴말하지 않고 내게 검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검을 잡으니 손아귀에 묵직하고도 서늘한 감각이 느껴져 썩 만족스러웠다.

그 모습을 바라본 은발의 용족이 입을 열었다.

“검사였나? 주먹을 쓴다고 들은 것 같은데.”

“예? 아니,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세상에 많고 많은 무기를 놔두고 주먹으로 싸우는 머저리가 어디 있다고. 그동안은 검을 못 가지고 다녀서 주먹으로 싸운 겁니다만.”

웬만한 몬스터도 무기를 사용하는 세상이다.

마법사를 제외하면 무기는 무조건 쓰는 게 좋다. 물론 나는 마법사인데도 사용하지만.

“그래? 그렇다면 너는 이곳에 오기 전에 기사였었나 보네. 평범한 인간이라면 육탄전만으로 용족의 전사 계급을 이길 수는 없었을 테니. 말투가 건방진 것도 딱 기사 같아.”

그녀는 나를 기사라고 추정하면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흐음, 기사쯤은 거뜬하다 이건가?’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야말로 원조 기사 킬러다.

이제는 용족 킬러가 될 참이고.

“그래, 준비는 끝났나?”

“예, 뭐.”

“그럼 시작해볼까? 고작 인간을 상대로 초반부터 전력을 다하기에는 체면이 상하니 선수는 네게 양보해주지.”

아니? 스스로 사망 플래그를 세우다니?

“그 말, 후회하지 마세요.”

나와 싸우기 전에 저런 말을 한 녀석치고 멀쩡히 살아 돌아간 녀석은 한 놈도 없다. 백 퍼센트 확률로 죽거나 패배했다.

나는 스트렝스를 사용해 육체를 강화하면서 그녀를 살폈다.

‘......아무래도 티안브리스보다는 한 수 아래 같은데.’

아까 앨리스가 깽판을 쳤음에도 그녀를 대하기 어려워하던 모습을 보면 대충 감이 왔다. 자기가 힘으로 누르기 어려운 상대니까 큰소리치지 못한 거겠지. 즉, 아무리 잘 쳐줘도 티안브리스와 동급이다.

그렇게 견적을 낸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화륵! 마나를 불어넣자 검신을 타고 시뻘건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 검은...? 화염을 소환하는 마검인가?”

은발의 용족이 조금 놀란 듯한 눈치로 물었으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화염?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무엇이지?”

뭐긴.

“번개를 소환하는 검이지!”

─번쩍!

─꽈릉!

마른하늘에서 한줄기 벼락이 내리꽂혔다.

[금일 사용 가능한 ‘콜링 썬더’ - 8회]

잘 쳐줘야 티안브리스와 동급이라지만, 그래도 충분히 강력한 상대다. 내 트레이드 마크인 말 걸어놓고 기습하기를 안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큿?!”

불의의 일격에 부족장이 잠시 휘청거렸다.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보였는데 버티다니. 뭔가 보이지 않는 쉴드 같은 걸 미리 써둔 상태였나? 뭐, 상관없다. 어차피 한 방에 쓰러질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한 방만 쏠 것도 아니었으니.

─번쩍! 번쩍! 번쩍!

─꽈릉! 꽈릉! 꽈릉!

깜빡이는 하늘에서 생성된 벼락이 부족장을 향해 연속적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그녀도 반응했다.

슈우웅. 그녀의 머리 위로 은빛 장막이 생성되며 벼락을 막아냈다. 하지만 여러 번을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는지, 장막에는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번쩍! 번쩍!

─꽈릉! 꽈릉!

나는 콜링 썬더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한번 잡은 주도권을 내주고 싶지도 않았고, 이제는 콜링 썬더 말고도 강력한 공격 마법이 많으므로 굳이 아낄 필요가 없어서다.

“크읏...! 이 비열한 인간! 기습을 하다니...!”

“뭔 소리야? 당신이 그런 말 하면 안 되죠. 선수를 양보한다며?”

자기가 먼저 공격하라고 말해놓고서는 왜 나를 비난하는 건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비난하는 와중에도 무언가 다른 마법을 쓴 모양인지, 그녀의 팔과 다리가 작은 회오리에 휩싸였다.

‘저건 뭐지? 처음 보는 마법인데... 그렇다면!’

“자, 벼락 한 번 더 갑니다! 맞기 싫으시면 그 너덜너덜한 쉴드는 해제하고 새롭게 다시 치세요!”

“이익...! 감히 나를 능멸하는 거냐?”

라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잽싸게 머리 위로 은빛 장막을 새로 생성해냈다.

“몸은 솔직하시네요? 하지만 나는 솔직하지 못한 놈이지!”

사실 이번 공격은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가거든!

─파사사삭!

순식간에 그녀가 서 있는 땅바닥에서 무수한 얼음 가시들이 솟아났다.

[금일 사용 가능한 ‘아이스 스파이크’ - 2회]

‘......! 뭐, 뭐야 저 속도는?’

멍청하게 내가 쓴 마법에 내가 놀란 것은 아니고, 부족장의 속도에 놀란 것이다. 그녀는 마치 날다람쥐라도 된 것처럼 사뿐하고 날쌘 몸놀림을 선보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걸 피하다니. 아무래도 그녀의 팔다리를 감싸고 있는 작은 회오리는 속도를 강화시켜주는 마법인 듯했다.

“네 녀석... 마검사였나? 설마 마법을 쓸 줄은 몰라서 공격을 허용했다만... 이제 더 이상의 요행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보는 내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이리저리 날쌔게 뛰어다니며 마법을 날려 보냈다.

─쐐애액! 투콰콰콰! 휘리릭!

온갖 종류의 바람 마법이 내게 쇄도했다.

나는 마법으로써 마법을 상쇄하기도 하고, 쉴드로 버티거나 화염이 실린 검으로 베어버리며 그것들을 받아냈다.

‘아니, 미친! 이 이기적인 딜교환은 뭔데?’

막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게 일방적인 딜교환이라는 것이다. 나는 마법과 검을 동시에 다루는 특성 덕분에 늘 상대 마법사보다 빠른 이동속도를 자랑했고, 이를 무기 삼아 상대를 찍어 누르는 방식으로 싸워왔다.

하지만 이렇게 나를 속도로 압도하는 마법사를 만나보니, 내가 그동안 유리한 조건 속에서 싸워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상대가 너무 빨리 움직이는 탓에 유효한 마법을 날리기가 어려운데, 상대는 내게 마음껏 화력을 뿜어댔다.

그녀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얼굴에 웃음기가 짙어졌다.

“용케도 버티는구나! 하지만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너도 느꼈겠지? 실버 일족의 위대한 속도를? 깔깔깔!”

바로 저 웃음이다. 저 깔깔거리는 기분 나쁜 웃음 때문에 내가 저 여자를 골라서 도전한 거다.

‘불사조를 소환해서 따라다니게 시킬까? 광역으로 불을 질러대면 아무리 빨라도 다 피할 수는 없을 텐데.’

아니, 그건 좀 곤란하다.

용족이 그득하게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 용족의 고유 마법을 사용하면 한도 끝도 없는 의심을 사버리게 될 것이다. 조만간 방문한다는 드래곤이 나의 비밀을 캐내려고 인체의 신비전을 열지도 모르지.

“무얼 하고 있느냐? 나를 꺾고 드래곤에 관한 정보를 얻겠다고 하지 않았나? 방어만 해서 나를 쓰러트릴 수 있겠어? 어서 공격해보아라. 깔깔깔!”

어쭈? 이것 봐라?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마법을 써주마.

─사아아

순간, 하늘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광장을 벗어나면 장외패인거 아시죠?”

“......뭐? 갑자기 무슨─”

곧, 새하얀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눈송이들은 광풍과 뒤섞여 눈보라를 만들어냈고, 사방팔방으로 거세게 휘몰아쳤다.

제법 널찍한 광장이었지만, 눈보라는 광장을 전부 뒤덮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휘날리는 하얀 눈송이들이 햇빛을 가리며 광장에 어둠이 드리웠다.

[금일 사용 가능한 ‘블리자드’ - 1회]

“이것도 피해 보시지!”

제아무리 빨리 달릴 수 있어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눈송이들을 피할 수는 없다. 눈보라 속에서 달려봤자 오히려 빙결만 가속화될 뿐.

그녀에게는 얼린 결말을 맞이하기 싫으면 광장 바깥으로 벗어나서 피하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물론 그러면 장외패를 당하겠지만.

“과, 광역 마법? 마검사가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의 마법을...?”

아연한 얼굴의 실버 부족장은 당황한 듯 잠시 멈춰 서 있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장외를 유도할 생각이었나? 좋은 시도였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돌연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요란하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바람은 점점 거세져서 이윽고 그녀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회오리를 생성해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녀를 향해 몰아치던 눈보라의 방향을 역으로 바꿔버렸다. 블리자드는 상하좌우 할 것 없이 반대 방향으로 뿔뿔이 흩날렸다.

“감히 바람을 다루는 실버 일족에게 눈보라로 공격하려 하다니! 장외는 네가 당하게 될 것이다!”

블리자드의 눈송이는 산산이 흩어지며 와해되어버렸지만, 그녀가 일으키는 돌풍은 여전히 격렬했다.

─콰오오오오!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결국 그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격렬한 바람에 의해 나는 한 발짝 한 발짝씩 뒤로 밀려났다.

그저 거센 바람일 뿐이었기에 살상력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 붙잡을 게 없다...!’

맨땅에 서 있는 나로서는 다리에 아무리 힘을 꽉 주고 버텨봤자 한계가 극명했다. 고작 지면과 내 발바닥 사이의 마찰력만으로 버텨내기에는 너무 강렬한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푸욱! 나는 일단 급한 대로 검을 바닥 깊숙이 꽂아 넣고 그것을 붙잡아서 버텼다.

“크윽...!”

그칠 줄 모르는 돌풍은 급기야 내 몸을 공중에 뜨게끔 만들었다. 붙잡고 있는 검이 땅에서 뽑히는 순간 나는 종잇장처럼 저 멀리 날아가 버리리라.

나야 말을 타고 달리는 기수가 치켜든 깃발처럼 공중에 떠서 펄럭거리고 있었지만, 실버 부족장은 아니었다. 돌풍의 중심에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맞바람을 생성해내서 버티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제자리에 굳건하게 서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한다고? 장외패로?’

그럴 수는 없지!

─파츠츠츠....

손에서 가느다란 두 줄기의 전류가 생성됐다. 한 줄기는 나선으로 코일처럼 내 몸통에 둘둘 둘러졌고, 다른 한 줄기는 실버 부족장을 향해 뻗어나갔다.

[금일 사용 가능한 ‘일렉트로마그넷’ - 3회]

“......?!”

제아무리 거센 돌풍이라도 전류의 흐름을 바꿀 순 없었다. 순식간에 그녀에게 도달한 전류 줄기는, 내 몸에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몸에 빙빙 둘러졌다.

이윽고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전류 줄기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검을 붙잡은 채 공중에 떠 있던 내 몸의 방향이 그녀를 향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나와 그녀 사이에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인 인력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인력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 역시 내 쪽으로 주춤주춤하며 끌려오기 시작했다.

“네놈...! 무슨 술수를 쓴 것이냐!”

그녀는 내 쪽으로 끌려오지 않기 위해 강풍을 이용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나는 우리 둘을 감싸고 있는 전류의 회전 속도를 올렸다. 그러자 자력이 더욱 강력해지며, 검을 붙잡고 있는 손아귀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윽, 손바닥 찢어지겠다...!’

나는 스트렝스로 강화된 상태로도 더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극한까지 버틴 뒤, 검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강풍은 여전했지만, 나는 바람의 흐름을 거스르며 그녀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오, 오지 마!”

그녀는 대포알처럼 날아오는 나를 보며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그리고,

─퍼억!!

체중과 자력에 의한 가속도까지 더해진 플라잉 펀치가 그녀의 복부에 작렬했다.

“크헉?!”

손목을 넘어서 거의 팔뚝까지 들어갈 정도로 강렬한 펀치였지만, 그녀는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나가떨어지지 못했다. 우리 사이의 인력이 계속 작용하고 있는 탓이다.

그녀는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그녀와 찰싹 붙어버렸기 때문에, 그 떨림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곧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장내에 휘몰아치던 돌풍도 사그라들었다.

‘숨은 쉬는 걸 보니... 기절한 건가?’

그래, 그래도 명색이 부족장인데 주먹 한 방에 죽어버리는 것도 이상하지.

아무튼 나는 기절한 여자를 껴안고 있는 변태 같은 취미 따위는 없었으므로, 일렉트로마그넷을 해제했다.

털썩. 서로 간에 작용하던 인력이 사라지자 그녀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음.”

승급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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