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87화 (187/200)

족장 회의 (2)

짐 더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오늘의 도전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곧 저 멀리에서 드워프 노예 론해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를 몰고 왔다네! 짐을 실을 준비를 하시게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론해머가 거대한 마차를 몰고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화물 운송용으로 특수 제작된 마차인 모양인지, 웬만한 트럭보다도 큰 사이즈를 자랑했다.

“......? 뭐, 뭐야. 저건 마차라고 하기엔 좀 어폐가 있겠는데?”

그냥 단순히 커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자고로 마차란 말이 끌어서 마차라 부르는 것인데, 저건 말이 아닌 미노타우로스가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덟 마리의 미노타우로스가 좌우로 네 마리씩 나뉘어 거대한 마차를 끌어오고 있었는데, 매우 생소한 광경이라 신기했다.

“......근데 미노타우로스가 끄는 마차는 뭐라고 불러야 하지?”

우마차(牛馬車)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 아니지. 미노타우로스는 대가리만 소의 형상이고 몸통은 인간이라서, 관찰자의 견해에 따라서 소로 볼 수도 있고 인간으로 볼 수도 있는 몹시 철학적인 생명체였다.

그럼 반우마차? 아니면 반인반우마차?

아무튼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마차는 금세 짐 더미가 쌓여있는 곳에 도달했다.

“오, 확실히 덩치가 커서 힘이 좋은 건가? 금방 끌고 오네.”

미노타우로스의 몸통은 인간형이긴 해도 성인 남성의 두 배가 넘는 덩치를 자랑한다. 게다가 성난 황소처럼 보이는 대가리의 비율이 굉장히 높은 대두라서, 누가 봐도 힘이 좋아 보인다.

하긴, 그러니까 이놈의 뿔이 정력제로 쓰이지. 나도 모험가 시절에 그걸 수집해다가 팔아본 경험이 있다.

“자네는 미노타우로스가 끄는 마차를 처음 보는 모양이로군? 빨리 달리는 데에는 말이 최고지만, 무거운 짐을 나르는 용도로는 이놈들만 한 게 없다네. 길들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흐음, 그래 보이긴 하네요. 이 콧김 좀 봐.”

거대한 황소 대가리에서 콧김이 쒸익쒸익 뿜어져 나오는 것이, 길들이기가 여간 힘들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길들였지?

가만 보면 용족은 몬스터를 다루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듯했다. 예전에 티안브리스도 몬스터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었고.

“아무튼 시작하죠. 빨리 끝내고 쉬게.”

나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짐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화물용 마차는 굉장히 컸지만, 거기에 다 들어갈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자네도 직접 짐을 실으려고? 아니야. 자네는 마차에 올라타지 말고 밑에서 짐을 분류만 해주게. 힘쓰는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예? 왜요? 저도 사지 멀쩡한데.”

물론 사지가 멀쩡해도 고단한 상하차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좋겠지만, 나는 이따가 맞짱을 뜨러 가야 하므로 준비운동 겸 도와줄 생각이었다.

“고마워서 그렇다네. 자네 덕분에 우리 노예들의 노역 환경이 얼마나 쾌적해졌나? 충분한 휴식 시간에, 할당량을 끝내면 일찍 귀가시켜 주기까지. 솔직히 자네가 노역에서 빠진다고 해도 불만을 가질 노예는 아무도 없을 걸세. 우리 노조 위원장께서는 힘든 일을 하면 안 되지.”

노조 위원장?

아, 노예 조합? 대충해본 소리였는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군.

나는 손을 내저으며 시작을 독촉했다.

“아, 저는 괜찮으니 그냥 빨리 시작하죠? 빨리 끝내고 빨리 쉬게.”

“허허, 자네도 참. 알겠네.”

나를 포함한 노예들은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다. 물품을 분류하는 그룹, 그걸 마차 앞까지 옮기는 그룹, 마차에 올라탄 채로 그걸 받아서 싣는 그룹이다.

물품 분류는 노약자가 하기로 했고, 나는 론해머를 포함한 몇 명의 건장한 노예와 함께 마차에 물품을 싣는 일을 하기로 했다.

나는 바로 마차에 올라타서 일을 시작했다.

물론 손이 바쁘다고 입까지 바쁜 건 아니었기에,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도 론해머를 향해 물었다.

“혹시 실버 부족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십니까? 뭐, 그놈들이 즐겨 찾는 장소 같은 게 따로 있다거나.”

“굳이 그런 장소를 찾아다닐 필요가 있나? 이 도시의 어디를 가도 은발을 흔하게 볼 수 있지 않나.”

티안브리스가 적발이었던 것처럼 용족의 머리색은 대부분 그들의 속성과 일치한다. 당연히 실버는 은발이고.

무슨 유전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하는데, 속성과 머리 색이 일치하지 않는 용족은 드래곤의 피가 극도로 옅거나 허접이라고 한다.

“그렇긴 하죠. 근데 그런 녀석들은 평범한 용족이잖아요? 저는 지위가 높은 녀석을 찾는 거라서요.”

“지위가 높은 용족이라면... 부족장이나 그의 측근들을 말하는 건가?”

론해머는 부지런히 짐을 옮기며 되물었다. 역시 노예로 오래 구르며 잔뼈가 굵어서인지 단박에 내가 말하는 바를 이해했다.

“오, 맞습니다. 오늘 노역이 끝나고 바로 그런 녀석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있을까요? 기왕이면 실버면 좋겠지만, 뭐 꼭 그렇지는 않아도 되는데.”

내가 실버 부족을 타겟으로 삼은 이유는 그냥 기분이나 내보려고 그런 거다. 사실 족장 회의에 참석하는 고위급 인사라면 어떤 부족이든 상관없다.

“왜 그런 자들을 찾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시 중앙에 있는 본관으로 가면 만날 수 있지. 일주일마다 정례 회의가 열리는데, 마침 오늘이 그 날이거든.”

“오? 그럼 일이 끝나는 대로 거길 찾아가 보면 되겠네요.”

잘됐군.

나를 위한 용족 뷔페가 차려져 있다니.

거기서 대충 만만해 보이는 녀석으로 아무나 하나 붙잡아서 도전하면 될 듯했다.

“글쎄... 그러면 늦지 않을까 싶군. 회의는 보통 느지막한 오후에 시작해서 한두 시간 이내에 끝나거든.”

“예?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인데요?”

“그러니까 늦는다는 말일세. 아마 지금쯤이면 회의가 마무리 단계일 테니.”

뭐야, 그럼 당장 가야겠는데?

정례 회의는 일주일마다 열린다고 했으니,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일주일 뒤에나 찾아올 것이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짐을 냉큼 마차 깊숙한 곳에 처박아 넣고 론해머에게 물었다.

“저 없이도 괜찮겠죠? 지금 당장 거기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음? 자네가 빠지고 싶다면 빠지는 거지. 문제없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감독관에게는 내가 말해두겠네.”

역시 일처리가 훌륭한 노예군.

앨리스한테 론해머나 사노로 영입하라고 해볼까? 그럼 내 생활이 더 편해질 것 같은데 말이지.

아무튼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서둘러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하차합니다. 론해머 씨도 상하차 수고하세요.”

***

“......나에게 도전하겠다고?”

은발의 여성이 인상을 찌푸린 채 되물었다.

“실버 부족을 이끄는 나, 아리샤이나에게?”

“예? 부족장이셨습니까? 그건 몰랐네.”

알고 도전한 건 아니었다.

그냥 앨리스와 함께 서둘러서 도시 중앙의 본관으로 가니, 마침 용족들이 회의를 마치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은색 머리칼을 가진 용족 중에서 기분 나쁘게 깔깔거리며 웃는 녀석을 고른 건데 그게 부족장이었다.

‘이건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솔직히 반드시 부족장을 꺾을 필요는 없었다.

피곤하게 강력한 녀석과 싸우는 것보다는 그냥 적당히 부족장의 왼팔 격쯤 되는 녀석과 싸우는 게 편하겠지만, 이미 도전장을 내밀어버렸는데 여기서 취소하는 것도 그림이 좀 이상하니 이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아무튼......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화끈하게 한판 붙... 아, 바람 속성이랬지? 그럼 시원하게 한판 붙읍시다.”

“하! 정신이 이상한 녀석이라는 소리를 들어보긴 했다만, 이건 지나칠 정도네. 감히 인간 노예 따위가 부족장에게 도전하는 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느냐?”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왠지 말하는 투가 나의 도전을 거절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 용족은 매우 강인한 종족이라서 걸어오는 싸움은 마다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흥, 그것도 자격을 갖춘 상대에게나 통하는 말이지.”

“저는 그 뭐야. 전사 계급인가 뭔가 하는 것도 이겼는데요? 이 정도면 최소한의 자격은 있는 거 아닙니까?”

“브론즈 족의 전사를 말하는 거냐? 그 한심한 부족의 전사를 이겼다고 해서 감히 내게 도전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버 부족장은 빈틈없는 철벽을 치며 튕겨댔다.

‘거 되게 깐깐하게 구네....’

이것은 나름대로 곤혹스러웠다.

지금 이 자리에 저 여자밖에 없다면 선빵을 날리든지 해서 막무가내로 시비를 걸 수도 있었겠지만, 부족장급 용족들이 한가득 모여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러기가 어려웠다.

경거망동했다가는 다구리 맞을 게 뻔할 테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던 때였다.

지원사격은 의외의 방향에서 날아왔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아리샤이나? 조금 전 회의에서는 저 인간이 도전해오면 좋겠다고 큰소리치지 않았나. 설마 겁을 집어먹은 것인가?”

“어서 도전을 수락해라! 우리 브론즈 일족과는 달리 너희는 인간 따위에게 패배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렸잖나?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군. 어디 한번 증명해봐라!”

느끼하게 생긴 금발의 사내와 우락부락한 갈색 머리칼의 사내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실버 부족장에게 도전을 받아들이길 종용하고 나섰다.

‘......? 이 새끼들은 피아식별을 할 줄 모르는 건가? 뭐, 나야 고맙지만.’

“저 인간 노예는 네게 도전할 자격이 있다. 전사 계급을 꺾었고, 주인도 평범한 용족이 아닌 티안브리스다.”

“그렇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도전을 회피하는 모습이 무척 추하구나, 아리샤이나! 용족의 자부심은 어디에 팔아먹은 것이지?”

“이익! 이것들이...!”

골드와 브론즈 부족장의 이죽거림에 실버 부족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야만스러운 놈들. 적을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언쟁이나 벌이다니. 어쨌거나 도와주는 건 고마운데, 이러다가 엄한 놈들끼리 싸우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그때,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끼어들며 그들을 제지했다. 그의 머리는 파란색이었다.

“다들 그만둬라. 용족의 명예가 실추될 위기인데 너희끼리 다투면 어쩌자는 것이냐? 아니, 인간에게 도전받은 시점부터 이미 명예는 더럽혀졌다고 볼 수도 있겠군.”

“.......”

좀 높은 녀석인가?

이 녀석이 제지하니 유치한 논쟁을 벌이던 용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이긴 했지만.

“원래는 남의 도전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용족의 불문율이지만... 감히 족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곳까지 찾아와 명예를 더럽힌 인간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겠지.”

그는 다른 용족들을 헤치고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설마 나를 공격하려는 건가 싶어 싸울 채비를 하던 순간,

─화르르르르륵!

초록색 화염이 치솟으며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뭐지? 티안브리스, 네가 한 짓인가?”

미간을 좁힌 채 불길을 바라보던 그가 묻자, 앨리스는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대답했다.

“끼어들지 마라. 내 노예는 분명히 실버 부족장에게 도전했으니. 네가 끼어든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

“아무리 너라지만... 이건 조금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나.”

“내가 건방지다고? 건방지게 불문율을 깨고 타인의 도전에 개입하려던 건 너 같은데?”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청발의 사내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앨리스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진짜 개판이네.’

부족장급에게 도전해서 그런 건가?

도전장을 내밀기만 하면 깔끔하게 싸울 수 있었던 기존의 용족들과 달리, 이번에는 뭔 사공들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블루 부족장으로 추정되는 사내는 코웃음 치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티안브리스. 네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너의 우위에 있는 물 속성이다. 이런 알량한 불의 장벽 따위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는 말이지.”

쏴아아아! 그의 손에서 거센 물줄기가 쏟아져 나와 초록색 불의 장벽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는 매우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것이 경악으로 변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치이이익!

물줄기는 불에 닿자마자 기화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게 무슨? 왜 꺼지지 않는 것이지?”

왜긴. 인페르노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사내는 몹시도 당황스러워했고, 분위기는 앨리스에게 넘어갔다.

“그 불길에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을걸? 마지막 경고야. 내 노예의 도전 상대인 실버 부족장 이외에는 누구도 나서지 마라.”

“.......”

기특한 앨리스의 경고 덕분에 어수선하던 장내는 급격히 진정됐다. 결국 실버 부족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하아, 이 내가 고작 인간과 싸워야 한다니... 쪽팔려 죽겠네. 메두사의 후예라고 했나? 그래, 어서 덤벼봐. 어차피 워린레이크 님이 오시기 전에 너같이 불순한 종자는 전부 싹을 잘라버려야 했으니, 이 기회에 청소하는 셈 치지 뭐.”

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워린레이크...? 그 드래곤이 곧 이곳에 온다는 말입니까??”

“......킥. 궁금해?”

“아니, 장난하나. 궁금하니까 물어봤죠.”

“그럼 나를 이겨봐라. 워린레이크 님에 관한 정보는 네가 나를 꺾어서 네 주인이 족장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

어쭈? 감히 나를 도발해? 너는 뒤졌다.

물론 도발하지 않았어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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