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장 회의 (1)
“......너도 용족을 잡았다고?”
“......너두 용족을 잡았니?”
노역 아닌 노역을 마치고 만난 앨리스와 나는 서로를 향해 똑같은 말을 했다.
“아니, 나야 원래 드래곤의 정보를 얻으려고 뭐든 할 각오를 하고 온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고... 넌 왜 싸운 건데? 시비라도 붙었어?”
내가 의아한 듯 묻자, 앨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두 드래곤에 대해 알아보려고 그랬지. 도시 중앙에 커다란 건물이 하나 있거든? 거길 들어가려고 했더니 각 부족의 족장과 측근들만 출입할 수 있다면서 막는 거 있지?”
아무래도 중앙에 있는 커다란 건물은 일종의 영주성 비슷한 장소로써 족장 회의가 열리는 곳인 듯했다.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건 부족장과 측근들 뿐이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냐고 물으니까, 그 건물에 출입할 자격이 있는 용족과 싸워서 이기면 된다고 그러더라구. 힘이 곧 신분이래나 뭐래나.”
“뭐, 뭐야. 그럼 앨리스 네가 잡았다는 용족이 설마...?”
설마 벌써 족장급 용족을 꺾고 자격을 따낸 건가? 우리 앨리스가 해낸 건가!
“응, 문지기랑 싸웠어.”
“......?”
아니.
“미, 미친. 문지기를 왜 잡아?”
“왜냐니? 문지기도 그 건물에 출입할 자격이 있잖니? 그래서 그 녀석을 제압하고 들여보내달라고 했더니 더 많은 문지기가 튀어나와서 나를 막더라구.”
“야이, 당연하지! 건물을 관리하기 위해 출입하는 문지기랑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입하는 부족장이 같겠냐고!”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나 했더니만.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앨리스가 뾰로통한 어투로 물었다.
“뭐야! 그럼 너는 어떤 용족을 잡았는데?”
“나? 나는 노예 감독관.”
“노예가 노예 감독관과 싸웠다구?”
“그래, 나를 향한 존경심을 이끌어냈지. 흐흐.”
내가 그동안 싸워본 용족이라고는 티안브리스뿐이었는데, 그녀만큼 강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았으나 브론즈답게 시시한 녀석이었다.
‘......용족은 생각보다 별거 아닐지도?’
노예 감독관도 그렇고 앨리스가 손쉽게 제압했다는 문지기도 그렇고, 어쩌면 티안브리스가 특출나게 강한 거였지 용족은 그저 그런 종족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아니면 우리가 너무 강해진 건가?
어쨌든 방심은 금물이다.
“존경심...? 또 전기로 괴롭혔구나? 으휴, 어떨 때 보면 정말 변태 같다니깐.”
“아니, 내가 언제 이유 없이 그러는 거 봤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야. 너도 알다시피 드래곤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면 족장 회의에 참석해야 하잖아? 거길 참석하려면 용족을 밟고 올라 가야하고. 차근차근 가는 거지.”
“하지만 너는 노예잖니? 노예도 참석할 수 있대?”
“나는 안 되지만 너는 되지. 노예가 부족장급을 꺾으면 주인이 자격을 얻게 된다더라.”
일단 내가 자격을 얻어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용족의 고위급 인사들과 어울리며 정보를 캐내는 건 앨리스의 몫이다.
“그러니까 네 역할이 중요해. 알겠어?”
나는 그녀를 향해 당부하듯 말했다.
앨리스야 뭐 당연히 신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전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뭐랄까, 이건 일종의 첩보 임무 비슷한 성격을 띠는데, 앨리스는 이런 종류의 간사한 일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엄. 나만 믿으라구. 아니면 내가 족장에게 도전할까? 그게 더 간단하지 않겠니?”
“족장? 글쎄... 그건 좀 위험할 것 같은데?”
비록 노예 감독관이나 문지기는 허접했을지라도 족장까지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내 생각에 각 종족을 이끄는 수장이라면 적어도 티안브리스 수준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티안브리스의 열화 버전인 앨리스가 상대하기엔 벅찰 가능성이 크다. 물론 앨리스는 인페르노라는 회심의 무기가 있지만, 그걸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티안브리스에게 뒤처진다.
“아무래도 내가 싸우는 게 나을 것 같다. 너는 그냥 어깨에 힘이나 주고 다녀.”
“그치만 나두 싸우고 싶은데... 여기는 엄청 단순한 곳이라서 힘을 보여주면 다들 굽실굽실하더라구.”
그새 갑질에 푹 빠지셨구만?
“그래, 뭐. 만만한 놈 있으면 두들겨 패든가. 족장급만 조심하면 웬만해서 네가 질 일은 없겠지.”
“정말이니? 그럼 나도 내일은 길 가다가 눈을 마주치는 녀석이 있으면 혼내줘야지. 헤헤.”
“......?”
***
도시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의 족장 회의실.
어둑어둑하지만 널찍한 그곳에는 색이 칠해진 여러 개의 테이블이 원을 그리듯 배치되어 있었다. 금색, 빨강, 파랑 등 각 종족을 상징하는 색깔의 테이블이었지만, 유독 파란색 테이블만큼은 다른 색상을 모두 합친 것만큼이나 많았다.
어쨌거나 그곳에서는 부족 별 지정석에 앉아있는 용족들의 정례 회의가 한창이었다.
“......해서 가까운 인간의 마을을 습격, 스무 명의 노예를 새로이 잡아들였다. 혹시 관심 있는 부족은 공동 노예 숙소로 가서 가격을 흥정하도록.”
회의는 파란색 테이블의 중앙에 앉아있는, 블루 부족장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있었다.
부족장이면서 의장이기도 한 그는 문서를 한 장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다음은... 레이븐 산맥 남쪽에 출현한 마물에 관한 건이다. 아무래도 한번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흥, 악마의 하수인 따위.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 있나? 보나 마나 능력도 없는 주제에 탐욕만 그득한 인간 마법사 하나가 악마와 계약을 맺은 거겠지.”
은색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자가 코웃음 치며 말하자, 다른 용족들도 그녀에게 동조하고 나섰다.
“그녀의 말이 옳다. 마물은 잡아봤자 노예로 쓸 수도 없지 않은가?”
“레이븐 산맥의 남쪽이라면 우리보다는 인간의 거주지와 더 가까울 텐데? 가만히 놔둬도 인간들이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겠지.”
다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의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머지않아 워린레이크 님께서 우리의 도시를 방문하실 거다. 이래도 그냥 놔두자는 건가?”
“......!”
“워, 워린레이크 님이 오신다고?”
의장은 모두가 경악하는 모습이 퍽 마음에 들어 옅게 웃음을 흘렸다.
블루 드래곤 워린레이크는 용족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였고, 그 절대자는 같은 속성의 용족인 블루 부족을 편애했다. 워린레이크의 이름을 들먹이는 건 블루 부족장인 자신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그렇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그분께서는 악마가 풍기는 사악한 기운을 극도로 불쾌히 여기신다. 그러니 그분이 오시기 전에 우리가 청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그, 그러는 게 좋겠군.”
사실 그 포악한 드래곤은 비단 악마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무시하고 괄시하는 성향이 도드라졌지만, 개중에서도 악마를 가장 혐오했다. 나이가 어려 악마를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을 텐데, 왜 그토록 혐오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전사 계급을 몇 보내서 처리하는 걸로 하지. 다들 동의하나?”
“좋다.”
“동의한다.”
워린레이크가 싫어하는 요소를 남겨두고 싶은 용족은 없었다.
그 드래곤은 조금만 기분이 상하면 용족이라 하더라도 가차 없이 죽여버리는 포악한 성미를 자랑했기에, 회의에 참석한 모든 구성원은 군말 없이 동의했다.
의장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게 마지막 장이었다.
“......이건 안건은 아니고, 모두에게 전달하고 싶은 정보다. 며칠 전에 티안브리스가 돌아왔다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조용히 지낼 줄 알았던 그녀가 미쳐 날뛰고 있다더군.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노예가 날뛰는 거지만.”
쾅! 의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으르렁거렸다. 테이블의 색은 동색이었다.
“메두사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그 미친 인간 말이로군!”
“메두사의 후예? 그런 종족도 있었어?”
“나도 모른다! 그냥 그놈이 그렇게 말하고 다닐 뿐!”
“모르면 모르는 거지, 왜 화를 내고 난리야?”
은발의 용족이 미간을 좁히며 따지듯 말하자, 갈색 테이블을 내리쳤던 사내는 다시 한번 테이블을 때렸다.
“그놈에게 당한 우리 브론즈 부족원이 벌써 넷이다! 눈을 마주친 상대에게 도전한다는데, 유독 우리 부족에게만 도전하는 걸 보면 브론즈를 무시하는 게 틀림없다! 심지어 어제는 전사 계급마저 당했다고!”
“꺄하핫! 그래도 인간치고는 제법 안목이 있나 보네? 쉬운 상대를 잘 골랐어.”
은발의 여성이 배를 움켜쥐고 깔깔 웃었다.
“뭣? 네년도 지금 브론즈를 무시하는 거냐?”
“솔직히 그렇잖아? 우리 실버 부족은 항상 너희가 용족의 수치라고 생각했거든. 봐봐. 어제 전사 계급이 패배했다며? 브론즈 전사는 인간 노예에게 지는 게 선발 조건인가 봐?”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죽고 싶─”
서로를 향한 언성이 높아져 가던 그때,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만들 해라. 브론즈나 실버나 다 거기서 거기인 것들끼리 서로가 잘났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보기 흉한 것도 없으니.”
일침을 가한 사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은 금색이었다.
“흉하다고? 우리 실버가? 한번 붙어 볼래?”
“오냐, 이 기회에 서열을 가려보자!”
“풉, 나는 브론즈 실버와는 겸상하지 않는다. 그게 골드의 품격이지.”
장내는 곧 브론즈, 실버, 골드 부족이 벌이는 언쟁으로 인해 난장판으로 돌변했다.
그것은 몹시도 꼴불견이었기에, 의장은 질색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 어째서 너희 세 부족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싸울 거라면 회의가 끝나고 싸워라.”
“.......”
“.......”
회의실을 가득 채웠던 소란이 잦아들자 의장은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전사 계급이 노예에게 패배했다는 건 가벼이 여길 사안이 아니다. 그런 실력이 있다면 이 도시를 탈출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지. 이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도시의 성문을 지키고 있는 용족도 전사 계급이다. 메두사의 후예를 자처하는 그 노예 녀석이 마음만 먹었으면 그들의 경비를 뚫고 진작 탈출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실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도주하지 않고 계속 노예 생활을 고집하고 있었다. 오히려 점점 더 강력한 용족에게 도전하면서.
대체 왜?
“뭘 그런 걸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그래봤자 인간이잖아. 제까짓 게 날뛰어봤자지.”
“쉽게 말하지 마라. 점점 올라와서 마침내 전사 계급마저 꺾었으니, 녀석의 다음 도전 상대는 아마 이 회의에 참석한 우리들 중 하나가 될 테니까.”
의장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지만, 은발의 여성은 여전히 생글거리며 대꾸했다.
“그래서 뭐? 설마 인간에게 도전받을까 봐 두려운 거야? 어이없어, 정말. 나는 그 녀석이 우리 실버 일족에게 도전했으면 좋겠는걸? 물론 안목이 있는 녀석이라 이번에도 브론즈에게 도전하겠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인간 노예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티안브리스다. 너도 그녀를 잘 알 텐데.”
드디어 은발 여성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티, 티안브리스? 티안브리스가 배후라고?”
“그렇다. 노예의 주인이 그녀이니, 당연히 이번 일의 원흉도 그녀겠지. 노예와 함께 치고 올라와서 결국은 족장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따내는 게 그녀의 목표가 아닐까 싶군.”
“하, 하지만 그 오만한 년은 원래 이런 일에 관심 없었잖아? 자신만의 하이브를 세우겠다는 미친 소리를 하고 떠났었는데, 갑자기 왜....”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지. 워낙 괴팍한 녀석이니. 어쨌거나 자격 획득을 위한 마지막 도전은 그녀가 직접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너는 티안브리스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나?”
“그, 그건....”
회의 내내 시종일관 건방진 태도를 고수하던 은발의 용족이 당황하며 머뭇거리자, 동색과 금색 테이블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녀는 발악하듯 소리쳤다.
“이익...! 티안브리스는 몰라도 그년의 인간 노예쯤은 가뿐하게 이길 수 있어!”
***
‘흐음.’
오늘도 어김없이 공동 노역장으로 출근한 나는, 짐 더미에 기대고 앉아서 빈둥거리며 동료 노예들이 짐마차를 몰고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노역은 마차에 짐을 싣는 일인데, 감독관을 조져버린 덕분에 나는 웬만한 사역은 열외라서 이렇게 빈둥거리는 것이다.
‘노예 생활도 할 만하네. 그래도 마차가 오면 짐을 싣는 시늉 정도는 해줘야겠지. 그건 그렇고... 오늘의 노역이 끝나면 누구에게 도전하지?’
지난 며칠간 착실하게 용족을 잡아 왔으니, 슬슬 족장 회의에 참석하는 녀석에게 도전해서 자격을 따내도 될 것 같았다.
‘그동안은 브론즈만 잡아 왔으니까.......’
실버.
기왕이면 실버에게 도전해야겠다.
승급전 하는 느낌도 나고 좋잖아? 게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