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85화 (185/200)

용족의 도시 (4)

거대한 구덩이.

나를 포함한 수많은 용족의 노예들이 별 의미는 없지만 어쨌든 열심히 파고 메꾸기를 반복했던 구덩이지만, 노예들은 모두 구덩이 위로 올라가고 안에는 딱 두 명만이 남아있었다.

나 그리고 감독관.

감독관이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는 나의 도전에 응한 덕분이다.

나는 재미있는 놀잇감을 앞둔 어린아이와 같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감독관을 향해 물었다.

“......근데 진짜로 지금 여기서 붙는 겁니까?”

“왜, 막상 용족과 마주 서니 두려운가?”

감독관은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있는 입을 움직여 말했다.

“아니, 뭔가 일시를 정해놓고 본격적으로 붙는 거 아니었습니까? 구경꾼들도 좀 부르고.”

나는 론해머가 얘기해줬던 드워프의 하극상처럼 제대로 된 결투장에서 싸우길 기대했었다.

기왕이면 많은 용족들이 보는 앞에서 승리하고 이름값을 높여서, 감독관보다 더 급이 높은 용족에게 도전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가 형성되길 희망했다.

하지만 이 감독관은 굉장한 쿨가이여서, 즉시 도전을 수락하고 구덩이를 결투장으로 정했다.

“구경꾼...? 저 위에 있지 않은가? 네놈의 비참한 말로를 목격하고 경각심을 느끼게 될 노예들이.”

“.......”

아오.

아무래도 이 녀석은 다른 용족을 부르기는커녕, 이 기회에 나를 교보재 삼아 다른 노예들에게 하극상을 벌이면 어떻게 되는지 각인시켜주고 싶은 듯했다.

앨리스를 족장 회의에 꽂아 넣겠다는 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용족이 보는 앞에서 승리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일단 그건 안 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구경꾼이 있긴 있으니까.’

이 싸움의 구경꾼은 비록 용족이 아닌 노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어쨌거나 노예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면 주인인 용족의 귀에도 들어갈 테니까.

“주목!”

감독관은 구덩이의 경계를 따라 둥그렇게 빙 둘러 서 있는 노예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다들 똑똑히 봐둬라! 용족의 위대함을! 그리고 그 위대한 종족에게 반항하면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꼭 티안브리스가 말하는 것 같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싸움에서 누군가가 최후를 맞이한다면 그건 저 녀석일 가능성이 컸지만, 노예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껏 위축된 그들은, 정말 노예다운 표정으로 흘끔거리며 이쪽을 쳐다봤다.

드워프 론해머 역시 초조한 듯 턱수염을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나를 바라봤고, 엘프 에린은 미간을 좁힌 채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아마 좋은 소리는 아닌 듯했다.

“그래, 무엇을 사용해 내게 덤빌 생각이지? 무기가 필요한가?”

“음....”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노예이기 때문에 비무장 상태다. 늘 소지하고 다니던 검이 없어서, 내 필살기인 검사인 척하고 마법으로 기습하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검을 하나 달라고 할까? 아니, 아니다.’

잠시 고민해보니 필살기를 이런 잡졸에게 사용해서 밑천을 드러내는 것은 낭비 같았다. 그런 건 족장급과 붙을 때 써먹는 게 좋지 않을까.

“무기는 필요 없습니다.”

“호오, 마법사인가? 아니면 무투가?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네놈이 뭘 이용해 공격하든 브론즈 드래곤의 피가 흐르는 내 몸에 상처를 낼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브, 브론즈 드래곤?!”

뭐야 이 족보도 근본도 없는 종족 이름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지만 일단 너무나도 허접해 보였다.

“그런 종족도 있었습니까? 브론즈??”

“왜 그렇게 놀라는 거지? 골드 드래곤과 실버 드래곤이 있으니 브론즈 드래곤도 있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러네?”

제법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근데 왜 하필 브론즈입니까? 드래곤의 종족명은 색깔과 속성에 따라 정해지는 거 아니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골드는 전격 속성이고 실버는 바람 속성이다. 레드와 블루는 말할 것도 없고.

“멍청한 질문이로군. 당연히 땅 속성의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니까 땅 속성인데 왜 브론즈냐고.

기왕 할 거면 브라운을 하던가.

정말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네이밍 센스였지만, 어쨌거나 감독관은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네놈이 우리 종족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특별히 알려주마. 브론즈 드래곤의 육체는 그 어떤 드래곤보다도 단단하다. 마치 대지처럼 말이지. 그리고 그 피를 물려받은 나 역시 마찬가지. 이것이 브론즈의 힘이다. 크크.”

“미, 미친.”

브론즈인거 자랑처럼 얘기하지 말라고!

“아무튼 잡설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만 시작해볼까? 용족의 체면이 있으니 선공을 양보해주지. 어디 한번 와봐라!”

그는 거만하게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흐음, 이런 잔챙이한테 전력을 다 드러내긴 좀 그렇고... 일단 육탄전을 벌이면서 신체가 얼마나 단단한지 탐색해봐야겠군.’

지이잉- 나는 은밀하게 스트렝스를 캐스팅해 육체를 강화했다. 의도적으로 빛이 발생하지 않도록 캐스팅한 탓에 위력은 절반밖에 안 됐지만, 일단은 탐색전이니 이렇게 해보기로 했다.

타앗! 강화된 다리로 지면을 박차며 감독관을 향해 달려 나갔다.

녀석은 내가 움직이자마자 한쪽 팔을 높이 들어 올리고 무언가를 준비했다.

“이 새끼! 선공은 양보한다면서!”

물론 나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나는 어느새 내 전신을 보호하고 있는 전기의 갑옷을 믿고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애당초 서로 간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기에 거리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쿠우우우우....

지면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아득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우우웅!!

소리가 점점 거세지며, 마치 밑바닥에서 무언가 보이지 않는 여러 개의 손이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에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이건?’

중력을 강화하는 마법이었다. 일전에 마법 대회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어서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내가 자리에 멈춰서 바닥을 둘러보자, 감독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왜, 꼼짝 못 하겠나? 서 있기도 벅찬가? 크하핫!”

어디서 개소리를.

물리학에서 말하는 우주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인 강한 핵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중력. 순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중에서 중력은 가장 약한 힘이다.

나는 중력을 거뜬히 이겨내고, 다시 놈을 향해 쇄도했다.

─탓탓탓!

물론 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시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말했다시피 중력이 우주에 존재하는 힘 중에서 최약체라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단순히 저놈의 마법 위력이 낮아서다. 중력도 강하면 꼼짝 못 한다. 블랙홀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아무튼.

“네, 네놈...! 어떻게 나의 중력을 이겨낸─”

어느새 감독관의 지척에 도달한 나는, 녀석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는 대신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뻐걱!

“크허억!”

뼈가 아작나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녀석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

뭐지, 이 새끼?

자신에겐 브론즈 드래곤의 피가 흘러서 육체가 튼튼하다느니 뭐니 하던 놈이 한 방에 날아가 버려서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구경하던 노예들은 더욱 당황했다.

“요, 용족을 이기는 노예라고...?”

“그것도 맨손으로?”

그들은 조용히 숙덕거렸다. 아직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고, 함부로 용족을 험담했다가 곤혹을 치를까 봐서인 듯했다.

아무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감독관을 잠시 바라보고 있으니, 곧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 노예 녀석이....”

그는 광대뼈가 함몰된 모양인지 얼굴의 형태가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얼굴을 또 때리는 것은 너무 고어한 결과가 나올 것 같아 그냥 그대로 돌진해 드롭킥을 날렸다.

퍼억! 녀석은 다시 한번 바닥에 쓰러졌다.

‘아니, 뭐야. 왜 이렇게 약해? 노잼.’

사실상 원펀치로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이놈이 약한 건가? 내가 강해진 건가?

아니면 둘 다인 건가?

‘국왕 시해자’ 퀘스트를 달성한 이후로 거의 꿈속에서만 싸워왔지 현실에서 싸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굉장히 시시한 감이 있었다.

“크으...윽....”

아무튼 나는 눈앞에 쓰러져서 흐느적거리고 있는 감독관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고민했다.

‘......죽일까?’

나는 보통 적을 살려두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놈은 죽여봤자 딱히 얻는 이득이 없을 듯했다. 최종 퀘스트는 조금 졸렬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 시해자’때는 왕을 섬기는 자를 죽이면 능력치를 주는 보조 퀘스트가 따라왔었는데, 최종 퀘스트에는 그게 없었다. 아마 성장할 만큼 성장했으니 이젠 스스로의 능력으로 알아서 해결해보라는 뜻 같았다.

‘그냥 살려두고 꼬봉처럼 부리는 게 낫겠군.’

이래 봬도 이놈은 일단 노예 감독관이다.

이놈을 휘어잡으면 나의 노역 생활이 한층 쾌적해질 것이 분명했다. 괜히 죽여서 다른 감독관으로 교체되게 하느니, 내 편의를 위해 그냥 살려두는 게 더 좋은 선택일 것이다.

물론 누가 보스인지는 확실히 알려줘야겠지.

나는 없던 존경심도 이끌어낸다는 마법 같은 마법을 캐스팅했다.

─파지직!

[금일 사용 가능한 ‘스태틱 쇼크’ - 24회]

승급에 승급을 거치며 이제는 횟수가 엄청나게 늘어나 버렸다. 총알은 넉넉하다는 뜻이다.

“끄아아악!!”

“패배를 인정하십니까?”

“크윽... 내가 인간 따위에게 패배했다고 순순히 시인할 것 같은─”

─파지직!

“으아악!! 인정! 인정한다! 내가 졌다!”

순순히 시인할 것 같냐고 이를 악문 채 말하던 감독관은 불과 몇 초 만에 순순히 시인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파지직!

“끄어어! 무, 뭐냐? 인정한다니까 왜 또─”

“노예 조합장으로서 묻습니다! 노예에게 충분한 휴식 시간을 제공할 것을 약속합니까!”

이건 사실 내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내가 감독관에게 도전한 명분이 이것이었으므로 그냥 겸사겸사해서 요구했다. 이 기회에 불쌍한 노예의 처우를 개선해주면 좋지 뭐.

“조, 좋다. 적어도 내가 감독하고 있을 때는 그, 그렇게 해주마...!”

─파지직!

“끄으아악!? 주, 준다니까 휴식 시간! 그러니 제발 그만─”

“아,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어서.”

“무, 무엇이냐? 어, 어서 물어보거라.”

나는 황급히 대답하는 감독관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당신은...... 저를 존경하게 됐습니까?”

“뭐? 내, 내가 왜 너를 존경한다는 말이냐?”

“음? 이상하네. 이걸 맞으면 존경심이 생길 텐데.”

─파지직!

“끄아, 끄아악!”

“이제 존경심이 좀 느껴지십니까?”

“이익...! 미친 소리 하지 마라! 그럴 일은 결단코 없으니!”

지금까지는 일이 술술 풀렸지만, 이 부분만큼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지막 자존심인 모양인지, 그 뒤로도 몇 번의 전기 충격을 더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관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버텼다.

“끄어어... 내, 내가... 위대한 브론즈 드래곤의 후예인 이 내가... 한낱 인간 따위를 존경할 것 같으냐? 차라리 죽여라!”

위대한 브론즈? 어감이 이상하군.

아무튼 나는 바닥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녀석의 허리춤에 매여있는 수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수통에 담긴 물을 내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지, 지금 뭐하는...?”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흥건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비비 꼬아서 마치 레게 머리처럼 만든 후,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때 보여?”

“......무, 무슨?”

“어떻게 보이냐고. 뱀처럼 보이지 않냐?”

“그, 그렇게 묻는다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만....”

감독관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당신이 브론즈 드래곤의 후예라면, 나는 메두사의 후예다 이거야! 그러니 어서 존경심을 보여라!”

─파지직!

─파지직!

“끄으...아아악!!!”

존경하기 편하도록 내 신분을 밝혀줘서인지, 아니면 양손에서 더블로 캐스팅된 스태틱 쇼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에게 마침내 변화가 일어났다.

“조, 존경한다! 아, 아니 존경합니다! 메두사의 후예시여...!”

음, 존경받는 사람의 기분이란 이런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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