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84화 (184/200)

용족의 도시 (3)

노예의 도전을 받아준다니.

자신이 패배할 가능성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 용족의 그 오만함과 멍청함에 혀가 절로 내둘러졌으나, 생각해 보니 그렇게 멍청한 짓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 용족과 싸워 이길 만한 놈이었으면 애당초 노예로 잡혀 오지도 않았겠구나?’

노예로 붙잡혔다는 것은 일단 검증된 약자라는 뜻이다. 툭하면 용족의 대가리를 망치로 으깨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털보 드워프 론해머도, 입만 살았지 실상은 허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이다.

아무튼 노예는 약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으니 도전을 받아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흐흐흐.”

내가 낮게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자, 론해머는 수북한 턱수염을 벅벅 긁으며 물었다.

“갑자기 뭔가? 뭐가 아니라는 건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아니라는 말인가?”

“.......”

이 아저씨 피곤하네.

나는 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줄 생각 따위는 없었으므로, 역으로 내가 질문을 던졌다.

“노예가 용족에게 도전해도 된다는 거 말인데요. 혹시 노예가 승리하면 뭐 해코지 같은 건 없습니까? 다른 용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적당히 만만한 용족을 하나 붙잡아서 두들겨 패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동족이 당하는 꼴을 놈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냐는 거지.

“그 미개한 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나?”

아, 역시 바로 보복하는 건가.

“수치스러운 동족을 비웃느라 바쁘겠지.”

“......수치스러운 동족?”

“나약한 노예한테 패배한 용족 말일세. 비난의 화살은 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해낸 노예가 아니라 수치스러운 동족에게 향한다는 거지. 용족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면서 말이야.”

“으음.”

의외로 승부에 정정당당한 타입인가?

아니면 단순히 노예를 너무나도 멸시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근데 굉장히 확신에 찬 어조로 말씀하시는데... 근거가 있나요? 전례가 있다든지?”

“......있었지. 용족에게 도전해서 승리했었던 드워프 노예가.”

“진짜요?”

론해머는 돌연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네. 살갗이 익어버릴 정도로 햇볕이 뜨거웠지. 노예들은 신축 공사 현장에 동원되어 이틀째 밤샘 작업을 하고 있었네. 정말... 고된 작업이었어.”

그는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듯 입을 열었다.

“결국 열사병과 탈수로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네. 하지만 감독관은 휴식은커녕 물 한 모금 주지 않았어. 그래서 누군가가 용기 내어 요청했지. 물 좀 주시면 안 되겠냐고. 그런데 감독관이 어떻게 한 줄 아나?”

“물을 안 줬겠죠, 뭐.”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론해머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오히려 가혹하게 채찍질을 하더군. 물을 요청했던 노예가 피투성이가 되고 바닥에 쓰러져도 멈추지 않고 죽일 기세로 말일세! 결국 보다 못한 정의로운 드워프 하나가 감독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지.”

“오? 그래서요?”

“며칠 뒤에 수많은 용족이 보는 앞에서 결투가 벌어졌어. 노예가 도전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판이 커진 거지.”

정식 결투 같은 건가?

아무래도 용족에게 도전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싸우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고 싸운달까.

아무튼 나도 저런 절차를 밟게 될 가능성이 컸으므로 계속해서 론해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도전 상대인 감독관이 말하더군. 자신을 죽여도 아무런 처벌이 없으니 어디 재주껏 덤벼보라고. 그래서 드워프는 덤볐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대장장이 망치를 들고, 재주껏! 놈의 머리를 쾅쾅 두들겨 개박살을 내버렸지!”

론해머는 흥분해서 흙바닥을 쾅쾅 내리쳤다.

“뇌수가 터져 나와도 분노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어. 다른 용족들도 제지하지 않더군. 노예한테 뒤지는 용족은 뒤져도 싸다면서 욕설을 퍼부을 뿐. 크크,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

“자, 잠깐!”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설마... 용족에게 도전해서 승리했다는 드워프 노예가... 론해머 씨 당신이었습니까?”

용족을 죽여버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게 허풍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동료로 영입해서 함께 행동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무슨 소린가? 나는 싸움을 할 줄 모르네만.”

“아니, 미친. 그럼 왜 꼭 자기 무용담인 것처럼 얘기하신 겁니까? 사람 헷갈리게.”

“나는 내 얘기라고 한 적이 없네만? 구경꾼이었지. 아무튼 이 이야기의 결론은 노예가 승리해도 뒤탈은 없다는 것일세.”

론해머도 보면 볼수록 어딘가 나사가 몇 개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이야기의 결론은 마음에 들었다.

“흐음... 그럼 아무 걱정 없이 도전해도 된다 이거네요.”

“......설마 자네. 용족에게 도전할 생각인가?”

“안 될 것도 없죠.”

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자, 론해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조용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엘프 노예 에린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야, 너 죽고 싶어? 용족이 어떤 놈들인데. 그 빌어먹을 드래곤의 피를 타고나서 하나 같이 마법에 뛰어나다는 거 몰라? 웬만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거든? 살고 싶으면 그냥 얌전히 노예답게 굴어!”

“뭡니까? 아까는 저보고 배짱 없다고 구시렁거렸으면서.”

같이 탈출하자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더니 나더러 평생 노예로 굽실거리며 살라고 악담을 퍼부은 게 불과 몇 분 전이다.

“용족을 피해서 탈출하는 거랑 싸우는 거랑 같아?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좀 있는 편인데, 보니까 너는 족장 회의 참석자는커녕 일개 감독관도 못 이겨.”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퍽이나.

나는 유창한 엘프의 언어로 대꾸했다.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의 눈. 즉시 회복 마법사를 찾아가십시오. 이것은 긴급상황.”

“......이게? 까불지 말고 누나 말 들어라. 다 네가 동생 같아서 그러는 거야. 그러지 말고 누나랑 같이 탈출이나 하자니까? 도전한다는 걸 보니 너도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

“싫습니다. 저는 그런 시시한 일에는 관심 없어요.”

나는 탈출충의 제안을 다시 한번 거절했다.

아니, 그리고 뭘 자꾸 누나래? 새파랗게 어린 게.

내가 에린을 아니꼽게 응시하고 있자, 론해머가 껄껄 웃으며 설득하듯 내게 말했다.

“허허, 이건 나도 에린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겠군. 이곳이 싫다면 차라리 탈출을 시도하게나. 용족에게 도전해봤자 이길 가능성도 희박하고, 설령 이긴다고 해도 자네의 처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말일세.”

“예? 처지가 변하지 않는다고요? 족장 회의에 참석하는 놈에게 도전해서 이기면, 족장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생긴다고 그러셨잖아요?”

라크쉬르 같은 거 아니었어?

나는 용족을 이기고 두들겨 패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저 족장 회의에 참석해서 헤츨링의 정보를 얻고 싶을 뿐.

그런데 이겨도 내 처지는 그대로라니?

“자네는 노예잖나. 하찮은 노예가 그런 최고 의사 결정 기구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뭐야. 그럼 제가 이겨봤자 아무것도 얻는 게 없는 겁니까?”

“있긴 있지. 자네의 주인이 족장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생기겠지. 노예가 얻는 모든 소득과 명예, 영광은 오롯이 주인의 차지이니.”

“아.”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러니까 내가 족장급 용족에게 도전해서 승리하면, 그건 곧 나의 주인인 앨리스가 승리한 거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솔직히 그렇긴 하다. ‘내가 부리는 하찮은 노예조차 이렇게나 강한데, 당연히 주인인 나는 더 강하지 않겠냐?’를 시전할 수도 있고.

아무튼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승리해봤자 나는 여전히 노예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앨리스의 지위가 올라가니까. 내가 얻든 앨리스가 얻든 어쨌거나 해츨링에 관한 정보만 얻으면 그만이다.

“흐흐흐... 그럼 뭐 괜찮겠네요. 주인의 성공은 곧 나의 성공이니까.”

좋아, 용족에게 도전해야겠어.

“주인의 성공은 곧 자네의 성공...? 그런 한심한 소릴 하다니. 자네는 천성이 노예로군? 쯧.”

“으휴, 뼛속까지 노예근성에 찌들어있네. 그러지 말고 누나랑 탈출이나 하자니까? 누나는 엘프라서 일단 숲까지만 가면 용족도 따돌릴 수 있어.”

또다시 나를 향한 비난이 이어졌지만 이번에도 데미지는 전혀 없었다.

진짜배기 노예들의 아우성 따위, 백작인 내게는 먹혀들지 않는다 이거야!

“예예, 마음대로들 생각하시고요. 근데 도전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쪽도 장갑으로 뺨을 후려갈기면서 결투를 신청하는 건가?”

“......뺨을 때린다고? 뭔가? 듣기만 해도 야만스러운 그 방법은. 그냥 평범하게 말로써 도전장을 내밀면 된다네. 물론 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겠지만.”

론해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명분? 그런 것까지 필요합니까?”

“생각해 보시게. 어느 날 갑자기 웬 고블린 하나가 자네에게 도전해온다면 어떻겠나?”

“글쎄요? 뭐 괘씸하겠죠. 주변 사람들한테 쪽팔리기도 하고.”

“용족도 마찬가지라네. 하찮은 노예에게 도전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매우 불쾌하게 여기지. 고작 노예를 이겨봤자 자신이 얻는 이득도 별달리 없으니 말일세. 그래서 무언가 명분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은 도전을 받아주지 않고 무시해버리는 경우도 있지.”

과연.

아무 이유 없이 도전하면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다는 거군.

“흐음, 명분이 필요하다라... 아오, 거 되게 번거롭네.”

“대단한 명분까지는 필요 없다네. 사소해도 상관없어. 그냥 상대가 도전을 받아줄 구실로 삼을만한 정도면 되니까. 아까 내가 이야기했던 드워프처럼.”

“오, 그렇군요.”

물을 안 줘서 분쟁이 발생했었댔지?

그런 사소한 이유로도 도전이 가능하다면 별로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그럼 역시 잔챙이부터 족치는 게 좋겠군.’

노예 주제에 대뜸 족장급 용족에게 한 판 붙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애당초 그들은 내 도전을 받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나로서도 놈들이 얼마나 강한지도 아직 잘 모르고.

일단은 잔챙이를 몇 놈 조지면서, 실력 파악도 하고 내 이름값도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용족을 몇 쓰러트렸다는 소문이 돌면 족장급도 내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기는 어렵겠지.

그런 궁리를 하던 중, 감독관이 구덩이 근처로 다가와 우리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휴식 끝! 당장 노역을 재개해라.”

그러자 힘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쉬고 있던 노예들이 주섬주섬 삽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더러 노예근성에 찌들어 있다고 비난하던 론해머와 에린은 누구보다 빠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였다.

“젠장. 노역 시간은 영겁의 세월처럼 길게만 느껴지는데 왜 휴식 시간은 이리도 짧게 느껴지는지.”

“아저씨 바보야? 실제로 짧으니까 그런 거지. 일은 온종일 시켜놓고, 휴식 시간은 찔끔 주고. 이 생활도 지긋지긋해. 하루빨리 탈출하든가 해야지 정말....”

그들의 몸은 능숙하게 삽질을 해댔지만, 입은 복화술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작은 목소리로 불평해댔다.

내가 이 숙련된 두 명의 노예를 어이없다는 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구덩이 위에서 감독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봐, 인간 노예! 뭐 하고 있는 거지? 노역을 재개하라고 명했다. 당장 일어나지 못하겠나?”

“아, 예.”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냥 저놈한테 도전하면 되잖아?’

생각해 보니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고작 노예 감독관이나 하는 녀석이니 별로 강하지도 않을 테고.

“어이, 인간 노예! 내 말이 안 들리나?”

감독관의 언성이 높아졌다.

론해머 역시 안절부절못하며 거들었다.

“자, 자네 왜 이러나? 감독관의 명을 거역할 셈인가...? 당장 일어나게!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단 말이네!”

“아, 몰라. 저는 파업합니다.”

“히익...! 자, 자네 미쳤나!”

나는 대충 아무 소리나 지껄이며 이걸 명분으로 삼기로 했다.

“아니, 감독관님. 이런 열악한 근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일을 합니까? 노조 위원장으로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감독관이 얼굴을 왈칵 찌푸리며 되물었다.

“......노조? 그게 뭐지?”

“노예 조합이요. 방금 제가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충분한 휴식 시간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더는 일 못 하니, 그런 줄 아십쇼.”

“휴식 시간을 더 달라...? 하, 오늘 처음 들어온 노예라 너그럽게 대해줬더니 주제넘은 소릴 지껄여대는군. 죽고 싶나?”

그가 품에서 채찍을 꺼내 들었다.

“죽고 싶진 않지만... 고작 그 채찍으로 저를 죽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제대로 한 판 붙죠.”

“......뭐라고? 감히 노예 따위가 내게 도전하겠다는 거냐?”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시네. 예, 도전한다고요.”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감독관은 이내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핫! 이게 얼마 만이었더라? 노예가 용족에게 도전하는 일이. 좋다!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네놈의 주인에게 노예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좋군.

용족의 도시에서도 악명 한번 떨쳐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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