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83화 (183/200)

용족의 도시 (2)

뜨겁게 내리쬐는 땡볕.

노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삽질로 인해 발생하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퍼석! 퍼석!

인간도, 엘프도, 드워프도 모두 공평하게 삽을 한 자루씩 들고 구슬땀을 흘리며 땅을 파는 모습은, 마치 종족을 뛰어넘는 평등의 장이 실현된 것 같기도 했지만 이건 그냥 노역이었다.

“아니, 내가 왜 이딴 짓을 해야 하는 거야?”

나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작은 목소리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물론 나 스스로 노예로 신분을 속이고 잠입했으니, 어느 정도의 고생을 할 각오는 돼 있었다. 당연히 노예 생활이 편할 리가 없겠지. 그건 나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척 쓸모없는 짓이었다. 그냥 다 같이 모여서 땅을 파고 메꾼다.

그렇다.

땅을 ‘파고’ 다시 ‘메꾼다’.

이게 무슨 한심한 짓이란 말인가?

지금 내가 파고 있는 이 땅도, 이미 아까 한번 판 뒤에 다시 메꾼 땅이다. 감독관한테 왜 이딴 헛짓거리를 시키는 거냐고 몹시 묻고 싶었지만, 노예가 감독관에게 먼저 말을 걸면 먼지 나게 처맞아서 아직 못 물어봤다.

“뭔가 보람찬 일이라면 또 몰라. 왜 도대체 이딴 쓸모없는─”

그때, 뒤편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쉿! 입조심 하시게.”

뒤를 돌아보니, 땅딸막하지만 근육이 우람한 털보 드워프가 손가락을 들어 입을 가리고 있었다.

“감독관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불평하고 싶어도 조금만 더 참으시게. 잠시 후면 휴식 시간이니, 내가 그때 들어주지.”

뭔가 노예한테 이런 표현을 하긴 좀 그렇지만, 베테랑 노예의 기운이 느껴지는 자였다. 그는 내 옆에 자리 잡고 매우 능숙하게 퍽퍽 삽질해대며 말을 이었다.

“못 보던 얼굴이군. 신입인가?”

그의 시선은 삽이 닿는 땅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입은 무슨 복화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말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오랜 노예 생활 끝에 어떠한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닐까 싶었다. 뺑끼의 달인 같은.

나도 그를 따라 다시 삽질을 해대며 대답했다.

“아, 예. 오늘 이 도시에 처음 왔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자네처럼 대담하게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오직 신입 노예밖에 없거든. 어쨌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지. 나는 론해머라고 하네.”

“엘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론해머를 흘끔 쳐다봤다.

드워프를 직접 본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짧고 굵은 신체적 특성 때문에 강인하다는 인상을 줬다. 인간이 직사각형이라면 드워프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엘이라. 짧아서 부르기 편한 이름이로군? 앞으로 노역장에서 자주 보게 될 테니 잘 지내보자고.”

“좋죠.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노예끼리 잘 부탁하고 말고 할 게 있겠냐마는 어쨌거나 호쾌한 듯해서 첫인상이 괜찮은 사내였다.

용족의 압제를 받으며 고된 노예 생활을 한 자들은 무기력하고, 피폐하고, 패배 근성에 찌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동지가 생겼으니, 나는 당장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저기, 론해머 씨. 근데 이 땅은 왜 계속 파고 메꾸기를 반복하는 겁니까? 뭐 토지 개간이라도 하는 건가요?”

“아무 이유 없다네.”

“......예?”

내가 황당하다는 듯 반문하자,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감독관의 눈치를 살핀 후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일세. 노예에게 달리 시킬 일이 없으면 휴식을 주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맨땅을 파게 하지. 지독하고 더러운 용족 놈들....”

“아.”

그런 거였군.

진짜 지독한 놈들이네.

나치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써먹었던 방법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 의미 없고 하찮은 단순 노동을 반복시켜서, 스스로가 하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게끔 만드는 거다.

“하지만 어쩌겠나. 우리 신세에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하지만 언젠가는 이 비열한 용족 놈들을 내 손으로....... 헙! 허업! 으쌰!”

“......?”

론해머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이상한 기합 소리를 내며 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어느새 다가온 용족 감독관이 구덩이 위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어이, 인간 노예. 죽고 싶은가? 농땡이 피우지 마라. 신입이라고 봐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다.”

감독관은 내게 그렇게 경고하고는, 다른 노예들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잠시 휴식! 구덩이는 벗어나지 마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예들은 삽을 내려놓고 즉시 자리에 눕거나 앉았다.

“어이쿠, 드디어 휴식 시간이군. 엘, 자네도 얼른 앉지 그러나?”

“.......”

이건 뭐 넉살이 좋은 건지.

가만 보니 좀 특이한 사람 같기도 했다.

“아니, 감독관이 왔으면 좀 알려주시지.”

“하하하, 미안하게 됐군. 워낙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도 당황해버렸지 뭔가. 내 다음부터는 꼭 알려주겠네.”

“예, 뭐.”

나도 그를 따라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웬 젊은 엘프 하나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이봐, 론해머 아저씨. 옆에 있는 인간은 신입이야?”

“허허. 왔는가, 에린. 칠십 먹은 할망구가 지금 누구더러 아저씨라는 건가.”

“나는 인간이나 드워프의 나이로 따지면 스물도 안 되거든?”

뭐야, 이 엘프는 말이 통하네?

엘프는 언어가 따로 있다.

미친 엘프 아스왈드가 고장 난 통역기를 부득부득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엘프는 아예 이쪽 말을 할 줄 아는 듯했다. 아카데미 교수보다 더 지적인 노예라니. 신기하군.

“야, 너 이름이 뭐야?”

그녀는 내게 다가와 털털하게 반말로 물었다. 그래서 나도 털털하게 반말로 대답했다.

“엘.”

“나랑 이름이 비슷하네? 나는 에린.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누나라고 불러.”

굉장히 모순적인 여자였다.

겉으로는 어려 보이니 론해머한테는 아저씨라고 부르고, 실제로는 나이가 많으니 나한테 누나 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어쨌거나 그녀 역시 내가 반말을 한 것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양인지, 나와 론해머 사이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너 누나랑 같이 여길 탈출할래?”

“......탈출??”

“그래, 내가 노예 숙소에서 10년째 땅굴을 파고 있는데 너도 끼워줄게. 너도 여기서 평생 썩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대신 도시 밖으로 나가면 길 안내 좀 해줘. 나는 이곳에 온 지 너무 오래돼서 바깥 지형을 까먹었거든.”

그녀는 영광으로 알라는 듯 콧대 높여 말했지만, 나는 탈출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스스로 걸어들어온 거니까.

“아, 나는 됐어.”

“왜?”

“괜히 위험한 행동을 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나는 해가 지면 주인에게 돌아가야 해서.”

“주인이 있었어?”

그녀의 얼굴에 실망감이 서렸다.

“사노였네.”

“사노였군.”

드워프 론해머도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뭡니까, 그 반응은? 론해머 씨까지.”

“아, 별거 아닐세. 우리는 공노라서 말이지.”

“공노?”

“자네처럼 따로 주인이 있는 게 아니라 도시에 소속된 노예를 말하네. 자네는 공동 노역이 끝나도 주인에게 봉사해야 하지만, 우리는 일과가 끝나면 숙소에서 쉴 수 있지. 여러모로 공노가 사노보다는 급이 높다고나 할까.”

론해머는 약간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아니, 어이없네.

뭔 노예끼리도 급을 나누고 자빠졌어?

“노예면 다 똑같은 노예지 그런 게 어딨습니까?”

내가 따지듯 묻자, 그는 가슴을 탕탕 치며 호기롭게 대답했다.

“어허, 다 똑같다니? 섭한 소릴 하는군. 우리 공노는 비록 몸은 굴복했을지언정 마음만은 굽히지 않았지. 자네처럼 특정 주인을 향한 충성심 따위는 없다 이 말이네.”

“됐어, 론해머 아저씨. 뼛속까지 노예근성에 절어버린 사노에게 그런 말이 들리기나 하겠어? 탈출할 배짱도 없는 녀석 따위, 평생 굽실거리며 살라지.”

엘프 노예 에린마저 가세해 나를 비난하는 투로 말했지만, 데미지는 전혀 없었다.

‘나는 너희와 달리 언제든 탈출할 수 있다 이거야. 흐흐흐.’

이 도시에서 나가고 싶을 때, 앨리스와 함께 당당하게 걸어 나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결계도 없는 도시라서 여차하면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도망칠 수도 있고.

마음이 여유로우니, 진짜배기 노예들이 뭐라고 비난하든 여유롭게 받아넘길 수 있었다.

“예예, 뭐 마음대로들 생각하세요. 그건 그렇고... 이 도시에 진짜 드래곤이 찾아오기도 한다던데...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워린레이크를 말하는 거군? 알다마다.”

“오?”

“그놈이 도시에 방문한다는 소식이 돌면 그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용족들이 예민해져서 날뛰곤 한다네. 우리의 노역 강도도 올라가지. 빌어먹을 용족 놈들!”

부대에 사단장이 방문하면 병사가 뺑이치는 것과 비슷하군.

어쨌거나 론해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신의 망치가 완성되면, 내 기필코 용족 놈들의 대가리를 깨부수고 다닐 것이야.”

“......신의 망치? 그건 또 뭔데요?”

“드워프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무기지. 드워프가 제작해낼 수 있는 무기의 끝! 신에 필적하는 힘을 내는 궁극의 망치! 그것만 있다면 놈들의 골통은 부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걸세.”

과연. 제작에 특화된 종족인 드워프답게 뭔가 특별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가.

그런 무기가 있다면 탐이 안 날 수가 없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 망치는 언제 완성되죠...?”

“그건 나도 모르겠군.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뭐야. 조만간 완성될 것처럼 말하시더니 시작도 안 했다고요?”

“나는 대장장이 일을 할 줄 모르거든.”

론해머는 널찍한 어깨를 으쓱했다.

“예? 드워프는 모두 뛰어난 대장공 아니었습니까?”

“허, 이 친구 이거 아주 편협한 사고방식을 지닌 친구로군? 드워프라고 다 대장공이라고 생각하는 그거, 종족 차별일세. 우리도 다 각자의 개성이 있단 말일세. 내게 대장 기술이 있다면 왜 이런 단순 노동이나 하고 있겠나? 대장간에서 일하고 있겠지.”

아니, 뭔 또 종족 차별이야.

자기야말로 공노라고 사노인 나를 차별했으면서.

“후... 뭐, 알겠습니다. 그럼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하죠. 그 드래곤은 이 도시에 자주 방문하는 편입니까? 또 언제 오죠?”

“글쎄. 워낙 제멋대로라서 뭐라 확답하기가 어렵군. 어떨 때는 한 달 만에 오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몇 년이 지나고 오기도 하니 말일세. 그런데... 드래곤에 대해서는 왜 묻는 겐가?”

죽이려고.

“그냥 궁금해서요. 드래곤이라는 게 워낙 희귀하고 엄청난 존재 아닙니까? 그거라도 한번 보면 이 노예 생활이 덜 억울할 것 같아서.”

아무리 동병상련의 처지라지만 아직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므로 대충 둘러댔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해봤자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아, 그런가? 하지만 그런 기대는 접어두게나. 내가 이곳에서 노예 생활을 한 지 15년이 넘었지만 나도 아직 드래곤을 구경조차 못 해봤으니.”

“왜요?”

내가 되묻자, 론해머는 무슨 그런 한심한 질문을 하냐는 듯 대답했다.

“왜냐니? 자네는 드래곤이 이곳에 방문하면 노역장을 시찰하면서 수고하라고 격려라도 해줄 줄 알았는가? 놈은 극진한 대접을 받기에도 바빠. 심지어 일반 용족조차도 놈과 대면할 수 없는데, 우리 같은 밑바닥 노예에게 그런 기회가 있을 리가.”

하긴, 그렇겠군.

국왕도 평민은 만나보기 힘들지 않은가?

뭔가 특별한 행사라도 있지 않은 이상에야 국왕을 만날 수 있는 건 귀족뿐이다.

“흐음, 그럼 드래곤을 만날 수 있는 용족은 누굽니까? 여기에도 귀족 같은 게 있나?”

“귀족은 없지만 족장 회의가 있다네. 큰일은 족장 회의에서 결정되니 거기에 참여할 정도라면 드래곤도 만나볼 수 있겠지.”

족장 회의라.

의회나 위원회 같은 건가?

그러고 보니 도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용족에게서도 들어본 단어다. 노예를 차출해서 공동 노역에 내보내야 한다는 결정이 족장 회의에서 내려졌다고 했었다.

“족장은 뭔데요?”

“말 그대로 부족을 이끄는 장일세. 어떤 드래곤의 피를 물려받았느냐에 따라 부족이 나뉘거든. 블루 드래곤의 후예이면 블루족, 레드면 레드족. 이런 식이라네. 아, 그래. 자네는 주인이 있댔지? 자네의 주인은 무슨 족인가?”

“레드 드래곤의 후예랬으니 레드겠네요.”

“레드? 쯧, 기왕이면 블루였으면 좋았을 텐데.”

론해머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워린레이크가 블루 드래곤이라서 이 도시의 실세도 블루족이거든. 족장 회의에도 가장 많은 숫자가 참여하고. 레드는 좀 약한 편이지. 물론 우리 같은 노예야 주인이 누구든 간에 결국은 노예지만.”

레드는 약한 편이다라.

이거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그럼 앨리스를 밀어주기가 수월할 테니 말이지.

“족장 회의에 참여하려면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

“뭐, 당연히 싸움 아니겠나. 힘을 숭상하고 난폭한 녀석들답게 강함으로 서열이 정해지거든. 언제든 도전을 받아주는 호전적인 놈들이니, 기존에 족장 회의에 참여하던 용족과 싸워 이기면 자리를 꿰차고 들어가는 걸세.”

간단한데?

앨리스보고 도전하라고 하면 되겠군.

“와, 되게 단순하네요.”

“그래, 단순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야. 심지어 노예의 도전도 받아주니 말 다 했지. 싸움에 미친 미개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예? 노예가 도전해도 된다고요?”

“되긴 하네만... 어느 노예가 용족에게 도전하겠나? 패배해서 죽음을 맞이할 게 뻔한데.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그런 짓은 안 하지.”

하지만 나는 모두가 인정하는 미친놈인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