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족의 도시 (1)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산맥.
레이븐 산맥이다.
산맥의 형태가 마치 까마귀가 날갯짓하는 것 같다고 하여 레이븐 산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솔직히 새가 날갯짓하는 모습은 다 비슷비슷하므로 조금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엄청나게 크군. 내가 지금껏 본 산 중에서 가장 큰 것 같은데?”
우리 일행은 산맥의 초입에서 찢어졌다.
나와 앨리스만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고, 피들스턴과 마차는 인근에 있는 자유 도시로 떠났다.
용족의 도시는 산 중턱에 있다.
사실 그곳도 어쨌거나 도시이니만큼 마차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긴 하겠지만, 우리 일행의 유일한 용족인 앨리스를 도시에 내려주고 마차만 하산하는 것은 도중에 공격당할 위험이 크므로 그냥 일찍 헤어진 것이다.
나는 거대한 산맥에서 시선을 거두고 앨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얼른 가자. 한참 올라가야겠네.”
“응.”
다행히 싸대기가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용족 행세도 좋지만, 매번 뺨을 맞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가 단둘이 있을 때는 평소대로 행동하라는 옵션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앨리스와 함께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대하기도 하지만 제법 가파르고 험준한 산이었는데, 나도 앨리스도 모험가 출신이다 보니 이 정도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기, 엘. 이제 조금 있으면 그곳에 도착할 텐데 더 해줄 말 없니? 내가 주의해야 할 거라든지... 잘 모르는 곳에 간다고 생각하니 왠지 긴장되네.”
“음.”
나도 아는 건 많지 않았다.
티안브리스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귀동냥하듯 수집한 정보가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굉장히 단편적이었다. 인간이 노예로 부려지는 도시에 직접 가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거길 가본 인간의 대부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겠지.
“나도 잘은 몰라. 마차에서 해준 이야기가 내가 아는 전부거든.”
“그,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어쩌려구?”
“걱정 마. 너는 어쨌든 용족의 모습을 하고 있잖아? 적당히 눈치껏 행동하면 웬만해서는 네가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위험한 건 인간인 내가 위험하지.”
솔직히 좀 쫄렸다.
그 용족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들어간다니.
내가 ‘국왕 시해자’를 달성하기 이전에는 확실히 티안브리스가 나보다 한 수 윗줄이었다.
물론 나는 퀘스트를 완수함으로써 그때보다 더 강해졌고, 티안브리스는 용족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한다고 했으니 어지간한 용족보다는 지금의 내가 강하겠지.
하지만 쪽수에는 장사 없는 법이다.
만약 내게 비상 탈출기인 텔레포트가 없었다면, 그런 위험한 곳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옵션 따위는 고려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앨리스 너는 그냥 뭐, 수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행동하면서 워린레이크라는 드래곤에 대해 알아보면 돼.”
“그럼 너는? 같이 다니는 거 아니었니?”
“물론 같이 다니면 좋겠지만,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아직 잘 모르잖아? 같이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으니 미리 말해두는 거야.”
용족의 도시도 인간의 그것처럼 자유로운 분위기라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 뭔가 자기들만의 괴상한 생활 양식이나 문화 같은 거라도 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같이 다닌다고 해도 나보다는 네가 정보를 얻는 게 편할걸?”
한낱 노예 나부랭이가 용족의 위대하신 지배자 드래곤에 관해 물으면 대답은커녕 죽빵부터 날아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니 나와 앨리스가 함께 다닌다고 하더라도, 용족 중에서도 상위 개체에 속하는 앨리스가 주도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으응, 알았어. 워린레이크라는 드래곤에 대해 물어보면 된다는 거지?”
“그렇지. 대신 너무 티 나게 대놓고 물어보지는 말고. 만약 너 혼자 다닐 때 우연히 그 드래곤을 만나게 된다면 당장 나한테 와서 알려.......”
드래곤을 만나면 내게 알려달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너 근데 혹시 드래곤도 복제할 수 있나?”
“응? 글쎄... 인간 형태일 때는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앨리스도 확신은 못 하는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하긴, 드래곤을 만나본 적도 없을 텐데 확신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그럼 본체는? 본체일 때가 진짜인데. 드래곤의 권능이라는 브레스도 그때만 사용 가능하고.”
“그, 그건 어렵지. 그 커다란 걸 어떻게 흉내 내겠니? 인간보다 수백 배는 클 텐데. 트롤 정도면 몰라두.”
“흐음, 역시 그런가.”
그렇게 큰 기대는 안 했다.
솔직히 그게 가능하다면 밸런스 망겜이지.
물론 드래곤은 인간 형태일 때도 강하다.
브레스는 쓰지 못해도 마법은 쓸 수 있으니까. 다만 본체일 때에 비해서는 캐스팅 속도가 조금 느리다고 하는데, 그건 드래곤 기준에서나 느린 거지 인간이 보기에는 무척 빠르다고 한다.
그런 드래곤의 인간형을 앨리스가 복제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거기에는 크나큰 애로사항이 하나 있다.
‘......마법을 유도해서 보여줄 수가 없지.’
앨리스는 복제하려는 대상이 마법을 사용하는 광경을 목격해야 마법도 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이전에도 앨리스에게 보여주려고 티안브리스에게서 고유 마법을 유도해내기 위해 개고생했던 것이다.
심지어 불사조는 강력한 마법이라, 두 번이나 보여주고 나서야 어렵사리 복제에 성공했었다.
용족을 상대로도 그렇게 고생했는데,
상대가 드래곤이라면 어떻겠는가?
드래곤을 상대로 앨리스의 편의를 봐줘 가며 마법을 유도해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딴 짓을 했다가는 나부터 죽겠지.
즉, 만에 하나 앨리스가 드래곤의 인간형을 복제하는 데에 성공한다고 해도 마법까지 복제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마법을 쓰지 못하면 복제하나 마나지. 그냥 욕심부리지 말고 원래 계획대로 하는 게 낫겠어.”
***
부지런히 산을 올라가길 반나절.
마침내 용족의 도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야, 생각보다 깔끔한데?”
나는 의외의 도시 전경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힘을 숭상하고 단순, 무식, 과격하다는 게 내가 생각하는 용족의 이미지였다. 그래서 그들의 도시 또한 무슨 야만 부족이 모여 사는 것처럼 미개하고 거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깔끔하게 꾸려져 있었다.
물론 도시를 감싸고 있는 담벼락 때문에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담벼락은 심플하면서도 미려해 보였다.
“그런데 저 담벼락이 의미가 있니? 저 정도 높이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넘을 수 있을 것 같은걸.”
“그만큼 자신 있으시다는 거겠지.”
외부에서 도시를 공격해올 일이 없다는 자신감. 공격해와도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노예가 담을 넘어 탈출한다고 해도 금세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
뭐 그런 것들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자고. 그 전에....”
나는 바닥에 누워 몸을 뒹굴뒹굴 굴려댔다.
“무, 뭐 하는 짓이니?”
“노예가 꼴이 너무 깨끗해도 이상하잖아. 일부러 흙 좀 묻히는 거야.”
“앗, 그런 거라면 나도 도울게!”
앨리스는 바닥에 발을 비벼 흙을 잔뜩 묻힌 뒤, 그 발로 나를 퍽퍽 밟아댔다.
“아니, 미친. 너 어째 좀 즐기는 거 같다?”
“무, 무슨 소리니? 노예가 맞은 흔적두 좀 있어야 자연스럽지. 나는 다 널 돕기 위해서 그런 거라구.”
“음.”
괘씸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적당히 밟힌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토에는 앨리스가 새긴 발자국들이 선명했다.
나는 내친김에 스스로 목에 포승줄을 걸고, 줄의 반대쪽 끝을 앨리스에게 건넸다.
“자, 이제 나를 개처럼 질질 끌고 문으로 가.”
“너를 개처럼 끌고 가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니.”
“......라고 말하면서 입꼬리는 왜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건데?”
“으응? 그, 그건... 용족의 자신감을 나타내려고 일부러 웃는 거야. 티안브리스는 항상 거만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했잖니? 그, 그래서 그런 거야.”
아니, 이거 믿어도 되는 건가?
순수했던 애가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은근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앨리스가 나를 배신할까 하는 걱정이 아니라, 도시에 들어가면 일을 빙자해서 나를 마구 갈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너, 내가 지켜보겠어.”
“으응....”
나는 눈에서 레이저를 쏘듯 그녀를 한번 쳐다보며 누가 보스인지 상기시켜줬다.
어쨌거나 앨리스가 앞장서서 도시의 성문을 향해 걸어갔고,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성문에는 두 명의 사내가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한 명은 팔 한쪽이, 다른 한 명은 다리 한쪽이 비늘로 뒤덮여 있어서 척 보아도 용족임을 알 수 있었다.
웬만한 용족은 저렇게 인간과는 다른 신체 부위가 하나쯤은 존재한다고 한다. 드래곤과 가까운 세대일수록 그 특징이 더 뚜렷하다고 하는데, 그래서 괴물처럼 생길수록 더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어이, 여자. 멈춰라.”
우리가 성문에 가까워지자, 용족이 앨리스의 앞을 막아섰다.
“인간처럼 보이는데 인간이 스스로 여길 찾아올 리는 없고... 너도 우리와 동족인가?”
“흥, 그렇다. 그러니 길 막지 말고 저리 꺼져.”
와. 이 박력 뭔데?
거만하게 행동하라고 내가 시키긴 했지만, 이 정도로 할 줄은 몰랐다.
“건방지군. 드래곤 부위가 없는 걸 보면 인간이나 다름없는 아랫세대 같은데 말이지.”
용족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자, 앨리스는 더욱 찌푸리며 오만하게 소리쳤다.
“......뭐? 위대한 레드 드래곤의 후예이신 이 티안브리스 님이 인간과 다름없다고? 죽고 싶은 것이냐?”
화륵! 앨리스의 팔이 화염에 휩싸였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꼬리를 드러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티, 티안브리스? 네가 그 개차반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티안브리스였나?”
“이 화염과 꼬리가 안 보여?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당장 비켜라. 진짜로 죽여버리기 전에.”
“무, 물론 너는 통과다. 하지만 네 뒤에 서 있는 인간 노예는 등록 절차가 필요해.”
그가 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최근에 도시의 방침이 바뀌었다. 모든 용족은 소유하고 있는 노예를 하나씩 차출해서 등록하고 공동 노역에 내보내야 한다. 너는 노예가 하나뿐이니 저놈을 보내야겠지.”
“꼭 그래야 하나? 이놈은 내가 아끼는 노예인데?”
“족장 회의를 통해 결정된 사안이라 어쩔 수 없다. 저놈을 계속 곁에 두고 싶으면 다른 노예를 하나 더 구해라. 물론 그때까지는 저놈을 노역에 보내야겠지만.”
족장 회의?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사 결정 기구 같은 것인 모양이다.
강짜를 부리던 앨리스도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미 결정된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등록은 어떻게 하는 거지? 노역은 언제, 어디로 보내면 되는 거고?”
“해가 뜨자마자 중앙 광장으로 보내면 된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계속 노역을 해야 하니까.”
이런 젠장.
엘디니아 왕국에서는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메두사 백작인 내가 노역 따위나 해야 한다니!
물론 다른 노예들과 어울리다 보면 뭔가 정보를 얻기가 수월할 테지만, 어쨌거나 노역은 매우 귀찮은 일이므로 앨리스더러 하루빨리 다른 노예를 하나 더 구하라고 독촉해야겠다.
“노예 등록은 이 자리에서 지금 바로 해주지.”
용족은 가까이 다가와 나를 무슨 상품 쳐다보듯 훑어보며, 품에서 꺼낸 종이에 내 생김새와 특징을 기록했다.
“이름이 뭐지, 인간?”
“엘입니다.”
“직업은 뭐였지?”
“모험가였습니다.”
“아, 인간만큼이나 하등한 오크 따위의 몬스터나 잡는 한심한 직업 말인가? 그럼 별다른 기술도 없겠군. 막노동이 어울리겠어.”
이놈이?
나한테는 너도 몬스터야 이 자식아.
확 죽여버릴까 보다.
“자, 이걸 목에 착용해라. 네가 아무리 티안브리스의 총애를 받는 노예라고는 하나,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공동 노역을 해야 하니 본분을 망각하지 말도록.”
그는 내게 붉은색 목띠를 하나 건넸다.
처음에는 마나 속박 고리 같은 건가 싶었는데, 그냥 단순히 내 이름과 주인의 이름이 쓰여 있는 인식표 비슷한 거였다.
‘......이렇게 허술하다고? 노예한테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건가?’
역시 오만한 종족이군.
뭐, 나야 좋지만.
내가 인식표를 착용하자, 앨리스가 용족을 향해 물었다.
“다 끝났나? 이제 들어가 봐도 되겠지?”
“그렇다. 고향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동족이여.”
“동족? 흥, 난 나보다 약한 녀석들은 동족으로 여기지 않아.”
앨리스는 끝까지 연기에 충실하며 나를 이끌고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왜 이 도시가 의외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일은 노예들이 도맡아 하기 때문이었다.
드워프를 주축으로 한 노예들이 각종 공사를 하고 있었고, 엘프는 조경을 가꾸고 있었으며 인간은 청소를 하거나 다른 업무의 잡역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도 널려있는 노예를 제외하면 인간의 도시랑 비슷하네.”
용족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인간형이라서 그런 모양인지, 생활 양상도 비슷한 것 같았다. 여관, 상점, 식당 등 각종 편의 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멀끔해 보이는 식당을 가리키며 앨리스에게 말했다.
“오래 걸어와서 배고픈데 일단 밥부터 먹자...가 아니라 먹죠, 주인님? 저기가 괜찮아 보이는데.”
“응? 주, 주인님?! 아아, 그렇지. 나는 주인님이었지 참.”
앨리스는 처음으로 듣는 주인님 소리에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식당에 갈 수는 없겠는데.”
“......왜? 요?”
“왜긴. 아까 입구에서 못 들었니? 노예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노역을 해야 한다는 거. 지금 함께 식당에 가면 굉장히 수상해 보일 거야... 그치?”
“음, 그럴 수도 있겠네.”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 하지만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어서 광장으로 가서 노역이나 하렴, 이 노예야. 밥은 해가 진 후에 먹여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