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로 (2)
수도를 떠난 지 일주일.
─달그락달그락
우리가 탄 마차는 엘디니아 왕국 서부 국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우, 너 의외로 잘 살았었구나?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네? 제가 어떻게 보이셨길래....”
“아니, 그냥. 딱히 신분을 앞세운 적도 없고 항상 겸손하길래 하위 귀족 출신인 줄 알았지.”
조금 전, 서부를 통과하는 김에 피들스턴의 본가에도 잠시 들렀었는데, 이 녀석은 놀랍게도 후작가의 막내아들이었다.
“알고 계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전에 실전 격투 강의에서 피들스턴이라는 제 성을 들으시고는 명문가라고 칭찬하셨었잖습니까.”
“아.”
이놈 이거 눈치 없네?
그건 그냥 예의상 한번 해봤던 소리지.
“과거는 잊어라. 아무튼... 네 아버지께서 후작이셨을 줄이야. 백작인 나는 이름도 못 내밀겠군.”
그때, 앨리스가 코웃음 치며 끼어들었다.
“흥! 후작가? 그래봤자 인간의 신분일 뿐, 위대한 용족 앞에서는 다 똑같은 인간이지.”
“아니, 미친. 아주 명배우 납셨네. 우리끼리 있을 땐 안 그래도 된다니까?”
“으응... 미안....”
도플갱어의 본능이라 그런가? 앨리스는 티안브리스 흉내에 극도로 심취해 있었다.
수도를 떠나기 전에 머리카락도 다시 붉은색으로 염색했는데, 그 상태로 오만하게 피들스턴을 갈궈대니 내가 지금 진짜 티안브리스와 함께 마차를 타고 있는 건가 싶어 소름이 돋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뭐, 미안할 것 까진 없고.”
나는 가볍게 손사래 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피들스턴한테만 오만하게 굴 뿐 나한테는 평소와 똑같이 대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내가 앨리스에게 관대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인페르노.
이 녀석은 기특하게도 기어코 인페르노 습득에 성공했다. 물론 티안브리스보다 훨씬 오랜 기간이 소요됐지만, 기간이야 어찌 됐든 배웠으면 그만이다. 이건 내가 다 뿌듯했다.
아무튼 그렇게 한동안 가고 있을 때였다.
창밖을 내다본 피들스턴이 옆좌석에 내려놓았던 마법사 모자를 머리에 쓰며 입을 열었다.
“이제 곧 국경에 도달하겠군요.”
“오, 그래?”
“예. 르메이 왕국 측에서 검문을 하겠지만, 백작님과 앨리스 님은 그냥 마차에 타고 계셔도 무방합니다. 검문은 저 혼자 내려서 받으면 되니 말입니다.”
과연. 귀족 출신의 기사를 데려오길 잘했다.
이런 잡무를 알아서 척척 도맡아주니.
“역시! 나의 수석 기사다워! 근데 그 마법사 모자는 왜 쓰는 건데?”
“예? 이건 강사님께서... 아니, 백작님께서 가르쳐주신 전략이잖습니까?”
“아니, 너는 너무 고지식해. 그건 싸움이 빈번한 장소에서나 써먹는 방법이고. 검문을 받는데 그렇게 입고 나갈 거라고? 풀 플레이트 아머에 마법사 모자를 쓰고?”
누가 봐도 심히 수상해 보일 것이다.
아니면 패션 테러리스트로 체포되거나.
“아,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죄송합니다. 백작님의 체면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냥 검문 절차가 번거로워질까 봐 그런 거지. 내 체면은 신경 쓸 거 없다.”
나는 어차피 악명이 어마어마한 사람이라서 굳이 체면을 따질 필요가 없다.
내 휘하 기사인 피들스턴이 암만 젠틀하게 행동해봤자, 그의 주인인 내가 눈을 마주친 상대는 반드시 죽여버리는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소문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머지않아 두 개 왕국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지대에 도착했다.
“오... 생각했던 것보다도 병사가 더 많은데? 수도의 성문에 있는 경비병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네.”
물론 국경에 병사가 많이 배치된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어봤다. 도시나 성채의 성문에서는 유사시에 문제가 발생해도 안쪽에서 금세 추가 병력을 불러올 수 있지만, 국경 지대는 원군을 요청하려면 오래 걸리니 아예 처음부터 많이 배치해둔다고 들었다.
교역을 위해 잘 닦여있는 널찍한 길에서는 수십 명의 병사가 검문을 진행하고 있었고, 근처에 세워진 막사에는 그보다 몇 배는 되는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2교대인가? 3교대? 아무튼 신기하네.”
나의 고향 케른헴도 동부 끝자락에 위치해 있기에 조금만 더 동쪽으로 가면 국경이 나오지만, 그곳에는 맞닿아 있는 다른 왕국이 없어서 이렇게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달그락달그락
아무튼 우리 쪽 국경은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은 채 빠르게 통과했다. 원래 출국은 검문이 그리 빡빡하지 않은 편인데다가 병사들이 내 마차에 새겨져 있는 메두사의 문양을 알아보고 자동문처럼 길을 터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메이 왕국의 검문소에서는 우릴 멈춰 세웠다.
“정지! 정지! 실례합니다만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혀주시겠습니까.”
그래도 마차가 고급스럽고 문양까지 새겨져 인지, 르메이 왕국 병사의 말투는 꽤나 정중했다.
피들스턴이 빠릿하게 내려서 검문에 응했다.
“마차에 계신 분은 엘디니아 왕국 소속의 엘 아이일 백작님이십니다. 저는 그분의 기사 오우 피들스턴이고요. 저희는 레이븐 산맥으로 가기 위해 르메이 왕국을 가로지를 생각입니다.”
“아이일 백작?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헉!”
피들스턴이 내민 신분패를 받아든 채 중얼거리던 병사는 돌연 헛숨을 들이켰다.
“신분패와 마차에 그려져 있는 이 메두사의 문양... 그, 그렇다면 설마 저분이 메두사 백작이라 불리는 그...?”
“언행에 주의하시오! 감히 백작님을 그렇게 부르다니.”
“시, 실례했습니다. 신분 확인이 끝났으니 바로 통과시켜 드리겠습니다.”
병사는 즉시 사과하며 말을 이었다.
“모쪼록 즐거운 여정이 되시길 바랍니다만... 본 왕국과 귀국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아 관례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 더러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피들스턴이 마차에 올라타자, 르메이 왕국의 병사들이 길을 터줬다.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피들스턴을 향해 물었다.
“너 일 잘하네. 근데 방금 그건 무슨 소리야? 관례? 무슨 관례?”
“아, 신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래 르메이 왕국은 공식적으로는 저희 왕국에서의 신분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아예 무시한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본국에서처럼 백작님을 완전히 백작으로 대해주지는 않습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두 왕국은 엄연히 다른 나라니까.
“다만 저희 엘디니아 왕국이 르메이 왕국에 비해 훨씬 강대국이다 보니, 비공식적으로는 어느 정도 대우를 해주는 게 그동안의 관례였습니다.”
“음... 그런데 이제는 그 관례를 따르는 자들이 적어졌다 이건가?”
“예. 아무래도 왕이 교체되면서 저희 엘디니아 왕국도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이 도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소한 국경 분쟁도 잦아진 거겠지요.”
“그렇군.”
이건 일전에 왕실 서고에 가기 위해 국왕 프란츠를 만났을 때도 들어본 이야기였다. 왕국이 약화된 틈을 타 주변국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뭐, 그래도 대놓고 나를 공격하는 멍청이들은 없을 거 아니야?”
“예? 아,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본국이 약해졌다 해도 르메이 왕국보다는 강한데, 누가 감히 엘디니아의 실세인 백작님을 해하려 들겠습니까?”
“그럼 됐지 뭐. 내가 무슨 융숭한 대접을 받으려고 여기에 온 것도 아니니까. 그냥 지나가는 길일 뿐이지.”
***
르메이 왕국에 진입하고 머지않아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흐음, 슬슬 오늘 밤을 보낼 장소를 찾아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이 근처에 도시 없나?”
내가 피들스턴에게 묻자, 그는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펩톤이라는 도시가 있긴 합니다만... 별로 추천해드릴 만한 곳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반나절쯤 더 가다 보면 괜찮은 도시가 하나 나오는데, 차라리 그리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반나절? 그건 너무 오래 걸리잖아. 새벽에나 도착할 텐데. 펩톤이라는 도시는 뭐 어떻길래? 그래도 괜찮은 여관 하나쯤은 있을 거 아니야.”
“저도 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범죄자들의 도피처 같은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영주가 없는 변방의 도시라서 법을 집행하고 치안을 유지할 사람이 없다더군요.”
“오?”
매우 친숙한 설명이었다.
왕국 변방에 있는 영주 없는 도시.
“......그거 완전 케른헴 같은데?”
“케른헴이라면... 동부에 있는 버려진 도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곳도 굉장한 무법 지대라고 들었는데... 그럼 아마 비슷하겠군요.”
“무법 지대이긴 한데, 거기도 다 사람이 사는 곳이야. 괜찮으니까 그 펩톤이라는 도시로 가자.”
무법 지대는 힘없는 자에게는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지만, 반대로 힘 있는 자에게는 편리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길 가다가 마음에 안 드는 놈을 발견한다?
그냥 다짜고짜 두들겨 패도 된다.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으니까. 그리고 당연히 나는 힘 있는 자에 속한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두들겨 팰 생각은 없지만, 어쨌거나 피들스턴 정도만 돼도 그 도시에서 최강자 축에 속할 것이다.
게다가 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는 만큼 최소한의 자정 수단이 있어서 살인이 난무하는 장소는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자경단이나 소속 집단 같은 것들. 나는 케른헴에서 모험가 길드 소속이었기에, 외부인이 나를 건드리면 케른헴의 모든 모험가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무법 지대라도 다들 이런 식으로 방위 수단을 만들어서 잘만 살아간다.
그곳도 케른헴과 비슷하다면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피들스턴은 자신의 주군을 모시고 위험한 지역으로 간다는 사실이 영 내키지 않는 듯 보였으나, 내가 결정을 내리니 군말 없이 수긍했다.
그는 마부에게 방향을 자세히 안내했고,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쯤 펩튼이라는 도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조악한 돌담장.
입구에서 횃불을 들고 자기들끼리 노닥거리며 당당하게 직무유기 하고 있는 자경단원들.
그리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삶에 찌들어 희망 없는 눈빛으로 그 도시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험가와 용병들.
“와, 이거 고향에 온 기분이구만?”
내겐 너무도 익숙하고 정겨운 광경이었다.
“네...? 저한테는 그저 암울해 보입니다만.”
“그러니까 고향 같다는 거야. 내가 케른헴 출신이거든. 진짜 비슷하네. 저기 상처 입고 비틀거리는 모험가 보이지? 이제 저 사람은 파산하는 거야. 하급 모험가는 모아둔 돈이 없어서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렵거든.”
나는 어떤 모험가 파티와 함께 걷고 있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보이는 모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그런. 동료들이 치료비를 분담해주지 않는 겁니까?”
“분담? 역시 귀족가 자제답게 형편 좋은 소리나 하고 있군? 쓰러졌을 때 장비나 벗겨가지 않으면 다행이지.”
저런 삶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안다.
나도 한때는 저들 중 하나였으니까.
던전에서 다른 모험가의 시체를 발견하면 그걸 수습해주기보다는,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장비들 중 돈이 될만한 것들을 챙길 정도로 악착같이 살아왔던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럼 제가 적선이라도 좀 할까요?”
“네 돈이니 적선하는 거야 네 마음이겠지만... 글쎄. 이런 도시에서 불쌍해 보이는 사람마다 한푼 두푼 주다 보면 너도 금세 가난해질 걸?”
“그, 그렇군요.”
어설프게 동정해봤자 한도 끝도 없다.
만약 저 모험가에게 치료비를 제공해주면 금방 소문이 날 테고, 다른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우리에게 몰려들어서 구걸할 것이다. 회복 마법을 써줘도 마찬가지다.
이런 곳에서는 그냥 남 일에 신경 끄고 자기 할 일이나 하는 것이 이롭다.
아무튼 우리가 탄 마차가 성문을 통과하려 할 때였다.
“뭐야? 못 보던 마차인데?”
자리에 주저앉아서 노닥거리고 있던 자경단원 하나가 일어나 마차 앞을 막아섰다.
“히야, 때깔 봐라. 형님, 이것 좀 보십쇼. 엄청 고급스러운데요? 킁킁, 돈 냄새도 좀 나는 것 같고.”
그가 건들거리며 말하자, 피들스턴이 마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자경단원이십니까? 저희는 이 도시에서 하룻밤 묵으려고 합니다.”
“자경단은 아닌데, 뭐 비슷한 거지. 이쪽 입구는 우리 구역이거든.”
우리 구역? 뭐 깡패 비슷한 건가?
“당신은 기사처럼 보이는데... 어디에서 오셨소? 그리고 마차에 탄 두 사람은 누구고?”
“저희는 엘디니아에서 왔습니다. 마차에 계신 분은 아이일 백작님과 그분을 모시는 마법사고요.”
피들스턴이 정중하게 대답했으나, 그는 못 미덥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백작? 무슨 백작이 고작 기사와 마법사 한 명씩만 데리고 다니는 거지? 이웃 나라에서 왔다고 그냥 아무 말이나 하는 거 같은데.”
“저분은 정말 엘디니아의 백작이십니다!”
“하하, 그렇다는데요 형님?”
그는 피식 웃으며 형님이라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뭐지? 좀 치는 놈들인가?’
기사인 피들스턴을 앞에 두고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아하니, 저쪽에도 기사에 준하는 실력자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게 아마 저 형님이라는 사람일 테고.
“뭐, 당신들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지. 어쨌든 이 문을 통해 펩톤으로 들어가려면 우리에게 통행료를 내야 하오.”
“그게 무슨...! 다른 사람들은 그냥 통과하고 있지 않습니까!”
피들스턴이 자유롭게 도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놈들은 평소에 우리에게 성실하게 상납하니까 그런 거고... 댁들은 아니잖소? 그러니 한 사람당 3골드씩 10골드를 내시오. 내가 너그럽게 마부에게는 1골드만 받지.”
“10골드?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액수를...! 이 도시에서 집을 살 수도 있을 만한 금액인데, 너무 억지 아닙니까?”
“뭐? 억지? 하!”
건들거리는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나? 타지에서 온 부유한 여행자에게 고작 10골드밖에 받지 않겠다는데?”
그러자 도시로 들어가던 사람들이 한껏 주눅 든 목소리로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합당한 금액이지요.”
“그, 그렇습니다. 돈이 많으면 돈을 많이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죠....”
아무래도 이 사내가 속한 집단이 동네를 꽉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동조하자 피들스턴은 위축됐고, 건들거리는 사내는 기세등등해졌다.
“하하! 보셨소? 다들 합당하다고 하는 거?”
“.......”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게 돌을 던져라!”
─휘이익! 퍼억!
“커헉!”
그래서 내가 던졌다.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