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로 (1)
[꿈속에서 마법 ‘하늘의 분노’에 맞아 사망하여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습득하시겠습니까? 훔치시겠습니까?]
‘......마법 이름이 진짜 하늘의 분노였어?’
멋진데?
이 마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전에 천둥의 신이 악마 군단장을 향해 비웃으며 ‘하늘의 분노를 받아라’라고 말했었지만, 그냥 폼 잡느라고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마법의 이름이 이거였다.
아무튼, 신의 마법을 얻어내다니.
‘솔직히 이 정도면 최종 퀘스트급 난이도 아닌가?’
세르시아의 덕을 크게 보긴 했지만, 어쨌거나 다른 차원에 갇혀서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신의, 그것도 전성기 시절에나 사용하던 마법을 얻어낸 것은 최종 컨텐츠에 비견될 만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뭐, 내가 이 마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천둥의 신이 전성기에 보여줬던 것만큼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순 없겠지만, 나도 나름대로 전격 계열의 성골인 펜투플이니 어느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전격 마법을 꿈속에서 얻어낸 건 이번이 처음이네?’
그동안 전격 마법은 마법서를 통해서만 배우고 타인의 꿈속에서는 다른 속성의 마법만 얻어냈었다. 그래서 내가 꿈에서 얻은 마법은 모두 내 속성과는 관련이 없었기에, 늘 꿈의 주인이 사용하던 것보다 약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속성의 마법을 얻었다.
물론 이 마법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무려 신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내가 사용하는 버전이 좀 더 약하겠지만. 일단 딱 봐도 마나 소모량이 장난이 아닐 것이다. 블리자드처럼 지속적으로 소모하는 타입일 것 같은데, 아무래도 오래 사용하기에는 조금 어렵지 싶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이쯤에서 재미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습득할지, 훔칠지.
사실 이건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면 고민할 것도 없이 습득이 좋은 선택일 것이다. 천둥의 신이 싸가지 없긴 하지만 인간을 학살하는 자도 아니고, 다른 차원에 갇혀 있어서 그럴 능력도 없다. 훔친다고 해서 내게 발생하는 이득도 없고.
‘......근데 훔치면 개꿀잼일 것 같은데?’
인성질 한번 보여줘?
인간의 위대함 보여줘?
누가 머릴 조아려야 하는지 보여주냐고!
라고 잠시 고민해봤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천둥의 신의 비전 절기를 훔친 뒤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야 그렇게 하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그는 ‘하늘의 분노’ 외에도 강력한 마법들을 많이 다루며, 무엇보다 내가 그를 꿈이 아닌 현실에서 만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훔쳐봤자 죽이지도 못하는데 괜히 훔쳤다가 천둥의 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세르시아에게 꼬리를 밟힐 가능성도 매우 크다.
이 세계의 신이 진짜 전지전능한 존재라면 솔직하게 내 능력을 밝히고 조언이나 도움을 요청해봄 직하겠으나, 별로 그렇지도 않다. 그냥 신비한 능력과 힘이 있는 타종족에 가깝다.
아쉽지만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내 밑천이 드러날 위험성이 있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현명할 것이다. 내 능력을 완전히 들키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역시 습득하는 게 낫겠지. 습득한다.’
[마법 ‘하늘의 분노’를 습득했습니다!]
[금일 사용 가능한 ‘하늘의 분노’ - 1회]
[동일한 대상에게서는 더 이상 마법을 습득하거나 훔칠 수 없습니다.]
“......!”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힘이... 몸속에서 힘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볼일은 다 봤으니, 굳이 세르시아교 본단에서 아침이 될 때까지 머무를 필요가 없어서 일어난 것이다. 어차피 신의 마법을 얻었다는 기쁨에 설레어서 잠도 안 오고.
“뭐, 그래도 강해진 건 맞지. 이제 슬슬 최종 퀘스트의 단서를 찾으러 용족의 도시로 가봐도 되겠는데.”
이번 꿈속 여정에서 확실하게 느낀 게 있다.
신과 대악마를 잡는 건 나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
원래부터 이 둘이야 선택지에서 내가 자체적으로 제외했었지만, 꿈속에서 직접 겪어보니 피부에 확 와닿았다.
신은 과거에 비해 약해졌으나 차원이 닫혀있어 본체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고, 대악마는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당연히 군단장보다는 강할 테니 감당이 안 된다.
결국 원래 계획대로 드래곤의 단서를 찾으러 용족의 도시로 가보는 것이 내가 당장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옵션이다.
“오랜만에 멀리 떠나겠군. 근데 왕국을 벗어나는 건 처음인데....”
내가 나름대로 빨빨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건 모두 이 엘디니아 왕국 내부에서 움직인 거였다. 그런데 난생처음 왕국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뭐,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방을 빠져나가려 할 때, 방문이 열리며 성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성녀님? 왜 벌써 일어나신 겁니까? 아직 한밤중인데.”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스해 보이는 그녀는 머리에 꽂혀 있는 물망초를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 녀석.”
“예, 예???”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나는 헌신의 대명사인 성녀에게조차 미친놈 소릴 들을 정도로 정말 미친 녀석인 걸까.
“─이라고 세르시아 님께서 전해달라 말씀하셨어요.”
“아.”
역시 뒤끝 있단 말이지. 굳이 멀쩡히 잘 자고 있는 성녀를 깨워서 나한테 이런 말까지 전하게 시키다니.
“그리고 빨리 제 꿈속으로 다시 들어와서 약속을 지키라고도 하셨어요.”
“아, 그게 제가 무제한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며칠 뒤에 다시 들어가서 질문에 답해드리겠다고 전해주세요.”
용족의 도시로 떠날 채비를 하려면 며칠은 걸릴 테니, 이것저것 준비하다가 3일 후에 잠깐 들르면 되겠지.
***
팔짱을 낀 앨리스가 얼굴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등한 인간 주제에 지금 위대한 용족에게 대드는 거니?”
앨리스가 미쳐버린 걸까?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시킨 거다.
“아니, 그게 아니지. ‘뭐뭐 했니?’라는 말투 쓰지 말라니까. 더 싸가지 없고 거만하게 말하란 말이야.”
나는 지난 며칠간 앨리스의 말투와 태도를 교정해주고 있었다.
“버러지 같은 인간이 감히 내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것이냐?”
“오, 방금 건 완전히 티안브리스 같았어.”
용족의 도시는 용족을 제외한 모든 종족이 노예로 부려지는 곳이라고 한다. 그 사실만 들어봐도 용족이라는 녀석들의 성격이 어떨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극도로 높은 자존감에, 인간을 깔보겠지.
그래서 앨리스도 티안브리스처럼 굴 필요가 있었다. 혹시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는 용족이 있을 수도 있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다정한 용족은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을 테니.
“헤헤, 나 잘했니?”
“그래, 이번 건 잘했어.”
사실 앨리스는 도플갱어이므로 남을 흉내 내는 것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권위자다. 그래서 곧잘 티안브리스를 흉내 내다가도, 이상하게 나를 대할 때면 다시 본래의 말투로 돌아오는 경향이 있어서 교육에 애를 먹고 있었다.
다른 모험가나 도린 형제한테는 하지 말라고 해도 여포처럼 굴면서 말이지.
“용족의 도시에 가면 꼭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인간이 너한테 뭔가 실수를 하면 버럭 화내란 말이야. 음... 티안브리스는 진짜배기 성격 파탄자니까 냅다 뺨부터 후려치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
─짜악!
돌연 앨리스가 내 뺨을 후려갈겼다.
“악! 왜 때려?”
“미, 미안. 나는 네가 지금 때리라는 줄 알구....”
“뭐? 미안? 인간한테 사과하지 말라고! 노예한테 사과하는 노예 주인 본 적 있어? 더 뻔뻔해지란 말이야!”
“알았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앨리스가 재차 내 뺨을 후려쳤다.
─짜악!
“아악! 또 왜 때리는 건데?”
“용족이 인간을 때리는 데에 이유가 필요한가? 내 마음이니 건방지게 토 달지 말거라.”
“오, 훌륭해! 아주 뻔뻔하군! 근데...... 혼날래? 여기가 용족의 도시야? 왜 자꾸 때려?”
“미, 미안. 몰입하다 보니까....”
“또! 또! 인간한테 사과하지 말랬지!!!”
나는 그렇게 앨리스가 고장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철저히 교육했다.
앨리스의 눈에 독기가 서리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백작님, 저 피들스턴입니다.
“오우! 들어와라!”
내가 허락하자, 오우 피들스턴이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서부로 떠날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오, 그래? 빠릿빠릿해서 좋군.”
“예. 지금 바로 출발하시겠습니까?”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지.
“그래야지. 가자고.”
세르시아는 어제 성녀의 꿈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만났다. 원래는 내가 살던 세계에 대해 말해주러 들어간 거였는데, 그녀는 그것보다는 대체 왜 내가 자살했는지에 대해 더 관심이 많은 듯했다.
솔직히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어도 그게 무척 궁금하긴 했을 것이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고통은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그 번개 폭풍 속으로 뛰어들다니. 누가 봐도 굉장히 미심쩍은 일이다.
하지만 미심쩍으면 어쩔 텐가?
내가 시스템을 통해 마법을 얻어냈다는 사실 까지는 죽어도 모를 텐데. 아무리 수상해도 나만 입 다물면 들킬 염려는 없기에, 그냥 내 주특기인 헛소리나 주절대다가 슬그머니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인간은 충동적인 생물이다 이거야.”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저택의 계단을 내려가며 중얼거리듯 말하니, 함께 내려가던 피들스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그렇고... 미지의 땅으로 떠난다니 이거 설레는구만. 목적지까지 3주 정도 걸린댔지?”
“그렇습니다. 저희 왕국의 서부 끝단까지 가는 데에 일주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르메이 왕국을 횡단하는 데에 일주일, 그리고 거기서부터 레이븐 산맥까지 가는 데에도 일주일은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용족의 도시는 대륙 서부에 있는 레이븐 산맥이라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 왕국 내에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그곳까지 가려면 이웃 왕국의 땅도 지나가야 한다. 굉장히 본격적이고 장기적인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와 씨, 가는 데에만 3주라니. 이것도 무난하게 이동하는 걸 가정해서 그런 거지, 뭔가 애로사항이 발생하거나 하면 훨씬 더 걸릴 거 아니야?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허리가 아작나는 느낌이군.”
“걱정 마십시오, 백작님. 제가 불편함 없이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여정에는 나와 앨리스뿐만 아니라 피들스턴도 함께 한다.
피들스턴은 우리 왕국의 서부 지방 출신이기에 이웃 나라인 르메이 왕국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또 직접 가본 경험도 있다고 해서 동행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백작이라는 고위 귀족인데, 기사 하나 없이 초라하게 먼 길을 가긴 좀 그렇지 않은가?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시키기에도 좋고, 체면도 지키려면 기사 한 명쯤은 데려가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피들스턴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래그래, 열심히 하라고. 우리 아이일 백작가의 수석 기사이자 내가 가장 총애하는 기사가 바로 너니까. 너에게 거는 기대가 무척 커.”
물론 내 휘하에 기사라고는 피들스턴뿐이다.
아무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던 신출내기 기사를 용족이 득실거리는 곳까지 데려가진 않을 거고, 근처에 있는 인간의 도시에서 기다리라고 할 생각이다.
어쨌거나 피들스턴은 나의 칭찬에 감동한 모양인지 의욕을 불태우며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옛!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 백작님을 모시겠습니다! 앨리스 님도 잘 부탁드립니─”
─짜악!
돌연 앨리스가 뺨을 때리자, 피들스턴이 볼을 어루만지며 어안이 벙벙한 듯 물었다.
“애, 앨리스 님...? 제 뺨은 왜...?”
“흥! 감히 나에게 말 걸지 말아라, 인간.”
아, 좋군.
아무래도 나는 교육자 타입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