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칫국의 제왕이었다.
편의점 알바가 계산할 때 자기한테 웃어줬다고, 그녀와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자녀계획까지 짜버리는 과대망상환자와 비슷하달까.
“어이가 없네, 진짜.”
“왜 그러는 것인가? 이 이야기가 별로 재미없었나? 그렇다면 다른 이야기를 해줄─”
“아니아니, 됐어. 그냥 조용히 가자. 안 그래도 생각할 게 좀 있었으니까.”
내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테도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쳇, 알았다. 예전에 우리와 함께 모험가 활동을 하던 시절엔 제법 유쾌했던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재미없는 귀족 나리가 다 되셨군?”
“야, 앨리스. 얘 한 번만 더 입 열면 뜨거운 맛을 보여줘.”
“응.”
화륵! 들어 올린 앨리스의 주먹에 불이 붙고 나서야 비로소 마차 안은 고요해졌다.
덕분에 나는 느긋하게 향후 계획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티안브리스가 말해준 용족의 도시라는 곳을 가봐야 하려나?’
이것은 상당히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드래곤 중에서 그나마 만만한 헤츨링이 그곳에 출몰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고무적이나, 그 부분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문제였다.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싶어 안달 난 용족이 득실거리는 도시라는 것부터가 문제지만, 이건 티안브리스의 외모를 지닌 앨리스를 데려가서 어느 정도는 회피한다고 치자.
그다음 문제는 도시에서 워린레이크라는 이름의 헤츨링을 찾는 거다. 심지어 그 헤츨링은 도시에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가끔씩 나타나서 꼬장이나 피울 뿐.
결국 내가 도시에 방문하는 타이밍과 녀석이 방문하는 타이밍이 맞물리는, 아주 희박한 확률이 실현되었을 때 녀석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은 애교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문제에 비하면.
‘드래곤을 만나면 뭐 해? 죽일 수가 없는데.’
죽이긴커녕 내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나도 나름대로 강해졌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 기준에서다.
그 도시에 있는 모든 용족들과 합심해서 덤벼들어도 헤츨링의 브레스 한 방에 다 같이 사이좋게 신의 곁으로 가버릴 텐데, 심지어 그 용족들마저 내 편이 아니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용족의 도시에 가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는 것이다.
‘흐음... 급한 것도 아닌데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일단 후보로만 올려두고 상황을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
지금 당장 행동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으니, 여유를 갖고 신중하게 생각해보는 게 좋을 듯했다. 내 스펙업도 하고 말이지.
일단 수도에 도착하면 왕실 서고에 들러서 쓸만한 마법이 있으면 배워야겠다. 드래곤이나 악마 등 최종 퀘스트의 후보들에 대한 정보도 조사해보고.
괜찮은 인재가 있다면 고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 같은 게 있으면, 그건 곧 나의 강함으로 직결되니까.
‘하아,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많군. 수도에 돌아가면 또 바빠지겠어. 괜히 어려운 중간 퀘스트를 골라가지고... 고생스럽지만 어쩔 수 없.......’
아니, 잠깐.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
수도의 남쪽 구역에 있는 대저택.
왕국의 실세로 단숨에 급부상한 신성, 엘 아이일 백작의 저택이다. 그 저택의 복도를 거닐고 있는 앨리스의 발걸음은 한없이 경쾌했다.
수도에서 새롭게 시작된, 백작가의 일원으로 사는 삶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앨리스 님.”
“응, 안녕하세요. 하인 아저씨.”
이곳에서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고, 모두가 친절하고 공손하며, 생활에는 조금의 불편함도 없었다.
물론 이전에도 제법 괜찮게 지내왔었다.
엘을 따라다니면 딱히 부족함이 없었고, 모험가 생활을 할 때도 다른 모험가들이 굽실거렸다. 하지만 그 모험가들은 자신과 함께 의뢰를 나가고 싶어서 살갑게 군 것이지만, 아이일 백작가의 사람들은 조건 없이 자신을 극진히 대해줬다.
게다가 얼마 전에 엘이 요리사를 고용했는데, 요리 솜씨가 어찌나 좋던지 하루에 다섯 끼를 먹고 싶어질 정도였다.
정말 모든 게 풍족했다.
“아 참, 하인 아저씨. 시끄러운 삼형제 어디에 있어?”
“도린 형제분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뒷마당에서 체력 단련 중이십니다.”
심지어 괴롭히는 맛이 좋은 도린 형제마저 있어서 심심할 일말의 틈조차 없었다.
“응, 알겠어. 고마워.”
괴롭히러 가야지.
앨리스는 룰루랄라 하며 저택의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니 도린 형제가 땀을 뻘뻘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앨리스는 그런 그들을 향해 일단 소리쳤다.
“야, 너희들! 일 처리 그런 식으로 할 거니?”
“헙! 애, 앨리스 양? 갑자기 그게 무슨...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거요...?
“으음... 그건....”
그건 앨리스도 모른다.
그냥 괴롭히기 위해 일단 소리쳐본 것뿐.
화륵! 앨리스는 주먹에 불을 일으켰다.
이럴 땐 엘처럼 행동하면 된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니? 너희들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 뜨거운 맛 좀 볼 거야?”
“허억...! 자, 장원에 몬스터가 없어서 그랬소. 그래서 아주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이오. 정말이오...!”
테도린이 기겁하며 술술 자백했다.
역시. 그랬단 말이지.
감히 근무 중에 낮잠을 자?
백작가의 기강을 위해 근무 태만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한 앨리스는 팔짱을 끼고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주먹에는 여전히 불이 붙어있는 상태였기에, 마치 팔뚝 전체가 타오르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됐다.
앨리스는 그 모습에 압도당한 도린 형제에게 질책하듯 말했다.
“일 똑바로 안 할 거야? 엘이 백작이지 너희가 백작은 아니잖니? 응? 낮잠이나 자라고 너희를 고용한 줄 알아?”
“하, 하지만 앨리스 양도 딱히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은─”
“말대꾸!”
용기 내어 반박하려던 테도린은 앨리스의 일갈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말대꾸. 이것도 앨리스가 평소 엘한테 자주 듣던 말이었다.
“근무 중에 낮잠이나 잔 주제에 어디서 말대꾸니? 응? 나는 엘과 함께 전쟁을 치렀잖니. 조금은 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러니?”
“드, 듣고 보니 쉴 자격이 충분하신 것 같군? 그럼 우, 우리 형제는 이만 일 하러 가볼 테니 앨리스 양은 마저 쉬시오.”
“뭐야? 벌써 간다구?”
“바, 바빠서 그렇소. 이번에는 농땡이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할 테니 걱정 마시오. 그, 그럼 이만.”
테도린은 나머지 형제들과 함께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났다.
에이. 조금 살살할 걸 그랬나.
앨리스는 도린 형제가 너무 빨리 떠나버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다시 저택으로 들어갔다. 괴롭힐 사람이 사라져버렸으니 간식이나 먹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천하 태평한 앨리스였지만, 그녀에게도 작은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앗, 엘!”
“어, 앨리스냐.”
엘이 요즘 들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 간식 먹으러 갈 건데, 너두 같이 갈래?”
“아니, 난 됐어. 방금 식사했거든.”
손을 내저으며 사양하는 엘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는 것처럼 흐리멍덩했고, 그마저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무슨 일 있나?’
엘이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카트카를 떠나 수도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엘은 자신이 아는 그 엘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이리저리 바삐 돌아다니며 장원을 관리하고, 청색 마탑의 공사 진척 상황을 체크하고.
그렇게 활발했던 엘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비활동적으로 변하더니, 수도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거의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때때로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맞다, 엘.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왕실 서고 공사가 드디어 끝났대!”
“그래? 조만간 가봐야겠네.”
“당장 가는 게 아니구? 엄청 기다렸잖니?”
역시 이상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다리더니.
“아, 당장은 곤란해서. 그것보다 나 좀 방으로 데려다줄래? 내가 지금 앞이 잘 안 보여서.”
“뭐어? 앞이 안 보인다구? 왜???”
“글쎄... 싸우는 중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부축이나 해줘.”
“......?”
엘이 딱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얘기했기에, 앨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부축했다.
***
나는 일주일 전 수도로 돌아오는 마차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퀘스트를 꼭 수행해야 하나?’
이미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만큼 강해졌고, 먹고 사는 데에 지장이 없을 만한 귀족의 신분도 얻었다.
지금 이 상태로도 충분히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퀘스트를 수행해야 할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것이다.
솔직히 게임 속으로 끌려온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퀘스트마저 시키는 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건 더 억울했다.
‘그냥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도 되잖아?’
그렇게 안분지족의 삶을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었다.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마치 경고하듯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목숨 걸고 그래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기에,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가볍게 무시했다.
‘......싫은데?’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그 시점부터 나는 파업을 선언했고, 시스템은 내가 최종 퀘스트 수행을 거부할 때마다 메시지를 띄워댔다.
그리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지금.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
......
‘아니, 미친. 그만 좀 해!’
김미영 팀장보다 악독한 스팸 메시지에 이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시야만 방해받을 뿐 실질적으로 내게 가해지는 위해는 없었기에, 나는 이를 악물고 방구석에서 버티며 시스템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계속 띄워봐.’
물론 밥은 먹고 살아야 했기에 가끔씩은 방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손으로 주변을 더듬거리며 어렵사리 방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엘!”
“어, 앨리스냐.”
“나 간식 먹으러 갈 건데, 너두 같이 갈래?”
“아니, 난 됐어. 방금 식사했거든.”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일부러 나를 방해하려는 듯 지독하게 떠오르는 메시지에, 나는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대충 바라보며 대답했다.
“맞다, 엘.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왕실 서고 공사가 드디어 끝났대!”
“그래? 조만간 가봐야겠네.”
“당장 가는 게 아니구? 엄청 기다렸잖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지금의 나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내다보기 힘든 상황. 당연히 책을 읽을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아, 당장은 곤란해서. 그것보다 나 좀 방으로 데려다줄래? 내가 지금 앞이 잘 안 보여서.”
나는 앨리스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돌아온 뒤, 다시 외로운 파업을 이어나갔다.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싫어.”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응, 안 해.”
그렇게 한없이 철벽을 쳐댔지만, 내심 반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를까 싶기도 했다.
앞이 안 보이는 건 그만큼 답답했고, 사람을 빠른 속도로 지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만 답답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동일한 메시지만 스팸처럼 반복해서 띄우던 시스템은, 메시지의 내용에 변화를 주며 나를 유혹했다.
[☆경고☆]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퀘스트 달성 시§ 100% 보상 지급$$$]
[@@당신의 한계▼를 돌파▲할 기회♪]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
근데 이게 더 스팸 같았다.
어쨌거나 시스템에도 변화가 생겼으니,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제안했다.
“그 보상이라는 걸 미리 좀 땡겨주면 안 되나? 그러면 퀘스트를 수행할 마음이 들 것 같기도 한데.”
[§퀘스트 달성 시§ 100% 보상 지급$$$]
“아니, 그건 알겠는데. 선수금 형식으로─”
[퀘스트 →달성 시← 100% 보상 지급$$$]
퀘스트 ‘달성 시’를 강조하는 것이, 묘하게 열받아서 더욱 오기가 생겼다.
“아, 몰라! 안 해!!”
나는 그대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물론 메시지는 눈을 감아도 보이지만.
[.......]
[성장 보조 특성이 강화됩니다!]
[이제부터 꿈속에서 다른 존재의 모습으로 변장할 수 있습니다.]
[꿈의 주인이 같은 마법을 3회 사용하는 걸 목격할 시에도 습득하거나 훔칠 수 있습니다.]
“오?”
[최종 퀘스트를 진행하십시오!]
[장기간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을 시, 모든 능력치와 마법이 회수될 수 있습니다.]
“흐흐흐... 그래. 파업은 여기까지만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