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66화 (166/200)

엘 아이일 백작 (4)

성문에서 벌어졌던 소소한 소동은 머지않아 마무리됐다.

도린 형제의 언행이 좀 난폭하긴 했어도, 딱히 잘못됐다거나 위법한 구석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비병이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내게 말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이일 백작님. 즉시 통과시켜 드리겠습니다.”

“아하하, 저야말로 실례했습니다. 제 호위병들이 조금 유난스러운 면이 있어서... 야, 너희들. 그렇게 난폭하게 굴면 어떡해? 사람 곤란하게 말이야. 얼른 마차에 올라타!”

라고 도린 형제를 질책하듯 말했지만, 생각해보니 이게 또 은근히 나쁘지 않았다.

원래 진짜배기 말년 병장은 웬만해서는 신병을 갈구지 않는다. 신병이 뭔가 잘못한 게 있어도, 괜찮다고 껄껄 웃으며 여유롭게 넘어간다.

그래놓고 뒤에서 상병을 쥐잡듯 잡는다.

신병 관리 안 하냐고.

자기는 좋은 이미지만 챙길 테니, 욕받이는 네가 하라는 거다.

이것은 나와 도린 형제의 관계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말년 병장이고, 도린 형제가 상병이다.

도린 형제가 과할 정도로 나대면서 내게 이득이 될 만한 일을 해주면, 나는 그저 껄껄 웃으며 ‘에헤이, 그러지들 마라’라고 점잔빼면서 말리는 척이나 하면 되는 거다.

‘......역시 고용하길 잘했군. 흐흐흐.’

나는 실속과 좋은 이미지만 챙기고, 도린 형제는 내 이름으로 호가호위하며 자기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갑질을 해대고.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정말로 도가 지나치다거나 내 얼굴에 먹칠할 정도로 행동한다면 제지할 생각이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

“너희 일 잘하네. 좀 과하긴 하지만.”

나는 마차에 올라탄 도린 형제를 향해 말했다. 녀석들은 방금의 일로 인해 문책당할 줄 알고 상당히 주눅 들어 있는 상태였다.

“무, 무슨...? 저, 정말인가?”

“그래,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고. 적정선만 지키면 되니까.”

문책 대신 열심히 하라는 말이 돌아오자, 도린 형제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 주눅 든 모습을 지워버리고 의욕을 불태웠다.

“크흐흐... 맡겨만 둬라!”

“신분패! 어서 우리 형제에게도 메두사의 문양이 박힌 백작가의 신분패를 만들어다오!”

“앞으로 엘 아이일 백작님이 가시는 길에 방해물이 있다면, 우리 형제가 모조리 치워줄 것이다!”

***

체스터 백작성의 지하 감옥.

티안브리스한테서 인페르노를 얻어내기 위해 줄기차게 들렀던 곳이라 이제는 친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장소였지만,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방문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웬만해서는 동부지방에 올 일이 거의 없을 테니까.

아무튼 지하 3층의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늘 있던 수다스러운 기사는 없고 처음 보는 기사 한 명이 티안브리스의 감방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헛, 아이일 백작님 아니십니까?”

“......? 아, 예.”

그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나를 알아보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전쟁 종결자로 위명이 자자하신 백작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도 찬탈자 폐위 전쟁에 참전했었습니다.”

“오, 그러셨군요.”

“저는 다른 전선에 있어서 직접 목격하진 못했습니다만... 백작님께서 철의 기사단을 궤멸시키셨다지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어찌나 자괴감이 몰려오던지....”

“예? 적군이었던 철의 기사단이 궤멸당했는데 왜 경께서 자괴감을...?”

첩자였나?

“괜히 기사가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하하. 마법사가 이렇게나 강한 줄 알았더라면 저도 그쪽으로 길을 택했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마법사라고 다 백작님처럼 강해질 수 있는 건 아니겠습니다만....”

그런 뜻이었나.

그거야 뭐 마안 빨이었지만 어쨌거나 마법사가 역상성인 기사를, 그것도 기사단을 잡아버렸으니 기사 입장에서는 씁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 이런. 제가 높으신 분을 앞에 두고 주제넘게 주절거렸군요. 죄송합니다. 용족에게 용무가 있으셔서 찾아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자물쇠를 풀어드리겠습니다.”

기사는 아차 싶었는지 고개 숙여 사과한 뒤 그리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는 바로 잠금을 해제했다.

나는 육중한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야, 앨리스...가 아니라 티안브리스!”

티안브리스는 책상에 앉아서 독서하고 있었는데, 나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똑같이 생긴 앨리스와 함께 있다 왔기에 잠시 헷갈려서 이름이 헛나왔다.

“......앨리스? 그게 누구지?”

“있어, 내 친구.”

“하! 감히 위대한 용족의 이름을 하찮은 인간 따위와 혼동하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그녀는 언짢은 기색을 표정에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야, 그 성격은 여전하구나? 이름 하나 틀린 거 가지고 되게 뭐라고 하네. 나는 이름만 틀렸지만 너는 다 틀렸어. 인간은 하찮지도 않고, 앨리스는 인간도 아니고, 나는 무례하지도 않거든.”

“흥, 너도 여전하구나. 뱀 같은 혀를 놀리며 말장난을 해대는 것이.”

“그래그래, 나도 반가워.”

“하아....”

나는 정말로 티안브리스가 반갑기도 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야, 그 반응은? 반갑다니까 왜 한숨을 쉬어?”

“빙빙 돌리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라. 왜 또 나를 찾아온 것이냐? 지난번처럼 헛소리를 해대며 날 놀리려고 온 건 아니겠지?”

“......헛소리? 내가 무슨 헛소리를 했다고?”

나는 언제나 옳은 말만 하는데?

“마법을 두 배로 빨리 배우려면 두 배로 노력해야 한다든지, 내가 분명히 습득한 마법인 인페르노를 못 쓴다든지 하며 헛소리를 해대지 않았더냐? 하여튼 인간의 기억력이란....”

“아.”

거봐. 다 옳은 말이었잖아.

마법을 더 빨리 배우려면 당연히 더 노력해야 하고, 티안브리스의 인페르노는 내가 훔쳤기에 그녀는 사용할 수 없다.

어쨌거나 나는 그녀에게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었으므로 구태여 따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오히려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이다.

“네 불사조 쩔더라.”

“......뭐?”

“네가 쓰는 용족 고유 마법 말이야. 웬만한 광역 마법보다 훨씬 좋은 것 같더라고.”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국왕 시해자를 달성하고 백작위를 얻기까지는 의외로 티안브리스의 공로도 제법 있었다.

내가 앨리스와 함께 무수한 적들을 불태워버린 불사조는 티안브리스의 고유 마법이었고, 철의 기사단을 가둬버린 지옥의 업화 인페르노 역시 그녀가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니까.

이 정도면 숨은 조력자라고 할 수 있겠다.

“흥, 새삼스럽게 용족의 위대함을 깨달은 것이냐?”

“오, 그래. 용족이 대단하긴 해. 확실히 드래곤의 후손은 다른가 봐.”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 불리는 존재다. 그런 존재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당연히남다를 수밖에 없지.”

날개가 달려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래곤이 어째서 ‘지상’ 최강의 생명체냐고 꼬투리 잡고 싶었으나, 용족을 띄워주니 살짝 상기된 얼굴로 열심히 설명하는 그녀에게 굳이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나는 정보를 얻으러 온 거지, 시비 걸기 위해 온 게 아니었으니까.

“이야, 부럽다 부러워. 나도 그 대단한 드래곤의 피 맛이라는 것 좀 보고 싶네.”

“그것은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너는 이미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냐? 그래도 인간치고는 제법 뛰어난 실력을 가졌으니, 그쯤에서 만족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했던가.

내가 계속 듣기 좋은 말을 해주자, 그녀 역시 한층 나긋나긋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려 내 칭찬까지 섞어서.

“뭐, 그렇긴 하지. 내가 더 노력한다고 드래곤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그 굉장한 존재를 실물로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넌지시 물었다.

“너는 혹시 실제로 본 적 있어? 네 축복받은 혈통의 기원인 레드 드래곤 말이야. 그래도 명색이 후손인데, 뭔가 접점 같은 거 없나?”

“......드래곤은 보통 자신 이외의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심지어 동족에게조차 무관심하지. 그들은 우리를 후손으로 여기기보다는 실패작쯤으로 여긴다만.......”

아니, 뭐야.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고 인간들한테 그렇게 유세 부리더니, 정작 자기는 조상인 드래곤한테 실패작 취급이나 당하고 있었던 거야?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그쪽에서 갑질 당한 걸 이쪽에서 푸는 개차반 같은 인성에 실망한 것은 아니고, 티안브리스도 드래곤을 못 만나본 듯해서다.

“아오, 장난해? 그렇게 드래곤 드래곤 노래를 불러대더니만 정작 너도 별거 없─”

“그래도 블루 드래곤을 만나본 적은 있다.”

“─지 않군! 역시, 티안브리스! 위대한 용족의 후예다워! 네가 겪은 그 놀라운 경험에 대해 좀 들려줄 수 있을까?”

“......?”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를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하아... 네놈의 그 들쭉날쭉한 분위기는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구나. 뭐, 좋다.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워린레이크라는 이름의 드래곤이었다.”

“워린레이크?”

“블루 드래곤 헤든레이크와 엘린레이크 사이에서 태어난 헤츨링이지.”

“미, 미친. 이름이 왜 그 모양이야? 헷갈리잖아.”

뭔 CPU 코드명도 아니고, 이름의 절반 이상을 ‘레이크’라는 단어가 차지하고 있어서 몹시 헷갈렸다.

“헷갈릴 것도 없다.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오직 워린레이크뿐이니. 그의 부모는 각자의 레어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되는 거야? 헤츨링이라며? 새끼만 밖에 돌아다니게 두면 다칠까 봐 걱정도 안 되나.”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티안브리스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하며 조소를 흘렸다.

“드래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최강의 생명체다. 누가 감히 드래곤을 해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 워린레이크는 300살이 넘었다. 드래곤의 시선에서나 새끼일 뿐,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지는 않다는 소리지.”

“흐음... 그래? 나는 성체가 될 때까지는 부모에게 보호받으며 이것저것 배우는 줄 알았는데. 이를테면 삶의 지혜나 마법 같은 거 말이야.”

이게 국룰 아닌가.

“보통은 그렇게 한다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 워린레이크는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그 어떤 드래곤보다 즐긴다. 늘 자신을 뽐내고 싶어 하며, 자신보다 약한 생명체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는 광오한 자다.”

광오하다고?

나는 ‘그거 완전히 네 얘기 아니냐?’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억눌렀다.

“약한 생명체라면... 인간을 말하는 건가?”

“물론 인간도 포함된다. 그 외에도 엘프나 드워프 등 다양한 종족이 포함되긴 하지만, 그는 용족 위에 군림하고 있다.”

“......용족 위에? 그 말은 꼭 너 말고도 용족이 많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드래곤의 역사가 얼마인데,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대륙 서쪽에 용족들이 모여 만든 도시가 있다. 나도 그곳 출신이고. 워린레이크 역시 이따금씩 그 도시에 모습을 드러내곤 하지.”

호오. 용족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있고, 그곳에 가끔 드래곤이 출현한다라.

“오, 그럼 그 도시에 가면 드래곤을 만날 수 있겠네?”

내가 기대감을 드러내며 묻자, 티안브리스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서라. 네가 그곳에 들어가면 무사히 돌아올 수는 없을 터이니.”

“왜? 다른 용족도 너처럼 인간에게 적대적인가?”

“인간뿐만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용족을 제외한 모든 종족이 노예로 부려진다. 네가 인간치고는 강하다고 하나, 수많은 용족을 제압하고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주인 없는 인간을 보면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거다. 자신의 노예로 삼기 위해서 말이지.”

아무래도 티안브리스의 오만한 성격은 종특이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용족의 도시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흐음. 다른 용족도 너처럼 강한가?”

“하, 너는 나와 싸워보기까지 했으면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나는 강하다! 대부분의 용족은 나보다 약하고.”

“아니, 그럼 그렇다고 말하면 되지 왜 화를 내고 그래?”

대부분 티안브리스보다 약하다는 건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나는 ‘국왕 시해자’를 달성했기 때문에, 일전에 그녀와 싸웠을 때보다 강해졌으니 아마 다른 용족도 웬만하면 나보다 약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용족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가기 어려운 건 변함이 없지만.

“근데 용족이 그렇게 많은데 고작 300살짜리 헤츨링 하나를 못 당해내서 지배당한다고? 헤츨링이 그렇게나 강한가?”

“말했잖느냐? 드래곤은 태어날 때부터 최강의 생명체라고. 그들은 상식 밖의 존재다.”

“아니, 대부분의 용족이 너보다 약하다고는 해도 너와 비슷하거나 더 강한 자도 좀 있을 텐데. 그 헤츨링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느라 부모한테 마법도 제대로 못 배웠을 거 아니야? 근데도 못 비비나?”

내 의문은 이거였다.

도시를 이룰 정도로 용족이 많이 있으면 거의 어지간한 왕국에 필적할 만한 전력이 나올 텐데, 성체도 아니고 고작 헤츨링 하나를 못 당해낸다는 게 쉽사리 이해되질 않았다.

“마법이 드래곤의 전부인 줄 아느냐? 아무리 헤츨링이라도 본체로 현신하면 웬만한 마법에는 끄떡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드래곤의 진정한 강함은......”

“진정한 강함은?”

“......브레스다. 이것이 수많은 용족이 어린 헤츨링에게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다. 마법의 최종 형태이자 드래곤의 권능인 브레스 앞에서 숫자는 얼마가 됐든 무의미하지.”

과연. 역시 브레스인가.

그렇다면 내가 국왕을 설득해서 왕국군을 모조리 끌고 쳐들어가도 쉽지 않겠군.

잠입도 어렵고, 정면 대결도 어렵다니.

최종 퀘스트는 그냥 황제를 만들어서 시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려나.

“흐음... 뭐, 그렇군. 어쨌든... 그 용족의 도시라는 건 정확히 어디에 자리 잡고 있지?”

“대륙 서쪽의 레이븐 산맥에 있다만... 설마 그곳에 방문할 생각이냐? 아무리 너라고 해도 노예로 전락해버릴 게 뻔한데?”

“그건 네가 알 바 아니니까 신경 꺼.”

“.......”

내가 단호히 일축하자, 티안브리스는 입을 꾹 다문 채 내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한동안 조용히 눈알만 굴리던 그녀는, 이윽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내, 내가 데려다줄 수도 있다.”

“......? 뭐?”

“용족의 도시 말이다. 내가 동행한다면 다른 용족들은 네가 내 노예일 거라 여겨서 함부로 손대지 못할 것이다.”

“오, 그래?”

내가 흥미를 보이는 듯하자, 그녀는 눈을 빛내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 그렇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그곳에서도 강자에 속한다고. 나와 함께라면 큰 제약 없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을 거다.”

“오, 그건 그렇겠네.”

“그, 그래! 날 여기서 풀어주기만 한다면 내가 성심성의껏 도와주지!”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진짜? 풀어주자마자 날 공격하려는 건 아니지?”

“아, 아니다! 우리가 비록 악연으로 시작됐다고는 하나 제법 인연이 깊은 사이가 아니더냐? 나는 너를 해칠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다.”

“그래, 그럼. 뒤로 돌아서 앉아봐. 네 목을 구속하고 있는 고리부터 풀어줄 테니까.”

“자, 잘 생각했다! 내가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마!”

티안브리스는 화색을 띠며 뒤로 돌아서 의자에 앉았다.

드르륵... 나는 그런 그녀를 그대로 두고 감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응, 안 속아.”

똑같이 생긴 앨리스가 있는데 내가 왜 너를 풀어줘?

파업

나는 내 뒤통수를 치려던 티안브리스를 뒤로 하고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애당초 그녀는 체스터 백작가의 죄수라서 내 마음대로 풀어주기도 어렵고, 인페르노를 훔칠 때 꿈속에서 본 바에 의하면 갱생도 전혀 안 됐다.

어쨌거나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차로 향하니, 앨리스와 도린 형제가 떠날 채비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너희 짐이 그게 다야?”

“그렇다!”

도린 형제는 조촐하게 각자 보따리 하나씩만 챙겨온 상태였다.

“아니, 이 동네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짐이 그것밖에 없다고? 너희 지금 이사 가는 거야. 어디 1박2일짜리 고블린 토벌 의뢰를 나가는 게 아니고.”

“알고 있다. 크흐흐... 자고로 야수와 같은 사내에게는 어딜 가든 검 한 자루와 옷 한 벌이면 충분한 법 아니겠나? 아무 문제 없다.”

라고 앨리스가 두려워 함부로 눈도 못 마주치고 있는 테도린이 말했다.

“야수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뭐, 그래. 너희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그럼 수도로 출발하자고.”

“알았다. 이보시오!! 마부!! 백작님께서 출발하라고 명하셨소!!”

자칭 내 오른팔인 테도린이 마부에게 우렁차게 전언하자, 마차는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그락달그락

나는 바로 좌석의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렇게 또 일주일간 지루한 여정을 떠나야 하는구나.”

장거리 여행을 할 때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진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마차 안에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니 지루한 건 둘째치고, 몹시 비생산적이다.

그나마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온갖 고찰과 사색을 해보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 내내 그러는 것도 고역이다.

“지루하다니? 우리 이야기보따리 삼 형제를 앞에 두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원한다면 밤새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 그게 뭔데?”

“우리 형제가 한 여자를 두고 누가 결혼할지 다퉜던 이야기는 어떤가.”

“뭐? 너희들이 그런 적이 있었다고?”

삼각관계를 넘어서 사각관계라니?

도린 형제의 연애사 따위야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지만, 사각관계라는 것은 상당히 자극적인 소재였다.

“크흐흐, 그렇다. 화전민의 딸이었는데, 우리보다 덩치가 좋더군. 놓치기 아까운 여자였지... 모험가 부부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너희끼리 다퉜다고? 근데 왜 아무도 결혼한 사람이 없는 건데? 어쨌거나 너희 셋 중 하나는 다툼에서 이겼을 거 아니야.”

“물론 내가 승리했다! 그래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구애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테도린이 어울리지 않게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실연의 아픔을 토로했다.

“거절당했다고? 왜?”

“그녀가 말하길, 처음 보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는 없다고 하더군. 뭐, 듣고 보니 이해할 만한 거절 사유─”

“......? 야이, 미친놈들아! 그 여자는 너희들의 존재도 모르는 상태에서, 니들끼리 누가 결혼할 건지 정한 거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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