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마법을 훔치는 마법사-164화 (164/200)

엘 아이일 백작 (2)

다달이 50골드.

수도에 있는 ‘아이일 거리’에서 내게 들어오는, 썩 대단치는 않은 금액이다.

물론 이건 경작지인 장원에서 나오는 수익은 제외한 금액이다. 그쪽에서도 별도의 수입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쪽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내 노력 여하보다는, 그해에 풍년이 들었냐 흉년이 들었냐가 더 관건이므로 크게 신경 쓸 것 없이 현상 유지만 해주면 된다.

그러나 ‘아이일 거리’는 다르다.

그곳은 내가 얼마만큼 발로 뛰냐에 따라 내 수입도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물론 발로 뛴다는 게 내가 직접 장사를 하거나 순찰을 한다는 것은 아니고, 좋은 가게를 유치하는 걸 의미한다.

그런고로,

도린 형제에게 백작위를 자랑하러, 아니 사병으로 영입을 제안하러 가기 전에 나는 잠시 누군가를 만나러 왔다.

─똑똑똑

수도에서조차 내로라하는 고급 여관으로 들어와 어느 방문을 노크하니, 곧 하늘색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가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앗, 엘! 어쩐 일이야?”

“아, 제가 보름 정도 케른헴에 다녀와야 해서요. 클로이 씨도 머지않아 영지로 떠나시잖습니까? 제가 수도로 돌아왔을 때 클로이 씨가 떠나고 안 계실까 봐 그 전에 얼굴이나 보러왔죠.”

클로이의 영지인 메이필드 후작령도 중부 지방에 있지만, 그녀는 옛 가신들을 찾아 모은다며 아직까지는 수도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일이 꽤 순조롭게 진행되는 모양인지, 조만간 영지로 내려간다고 한다.

“정말? 엘이 그렇게까지나 나를 생각해줄 줄은 몰랐네. 조금 감동인걸? 들어와.”

클로이는 활짝 웃으며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대로 호화로운 방 안으로 들어가 접객용 테이블에 앉으니, 그녀가 찬장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한잔할래?”

“좋죠.”

사실 별로 안 좋았다. 해가 쨍쨍하게 떠 있는데 술을 마시면 죄책감이 몰려올 것 같았으나, 나는 클로이에게 영업을 하러 온 것이었으므로 순순히 좋다고 했다.

뭐, 술 한두 잔은 비즈니스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

─쪼르륵

그녀가 잔에 술을 따르며 내게 권했다. 나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음, 좋은 술이네요.”

“그치?”

“네, 풍미가 남다르네.”

그냥 예의상 해본 소리다.

주로 모험가 길드에서 파는 싸구려 맥주나 먹으며 살아왔던 나로서는, 이게 독주라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가신들은 많이 찾으셨습니까?”

“응, 그럭저럭. 수도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만나본 것 같아. 이제 조금만 더 찾아보다가 영지로 가려구.”

“다행이네요.”

후련한 듯한 얼굴로 말하는 클로이를 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았다.

“......근데 그럼 청색 마탑 수도 지부를 건설하는 건 못 보고 가시겠네요?”

“못 보지. 마법사와 연금술사를 동원해서 최대한 빨리 건설해도 몇 주는 걸릴 텐데.”

“아뇨, 완공 말고 착공이요. 청색 마탑이 낳은 불세출의 마법사 클로이 메이필드 씨가 착공식에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줘야 하는데, 아쉽네요.”

“뭐어? 갑자기 웬 아부야...? 닭살 돋게.”

라고 말했지만 몸은 솔직한 모양인지 클로이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갑자기가 아니라 전 늘 클로이 씨가 대단한 마법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클로이라는 사람이 청색 마탑의 후광을 받는 게 아니라, 청색 마탑이 클로이의 후광을 받는달까? 그래서 아쉽다는 겁니다. 착공식에 클로이 씨가 참석하지 못한다는 게. 근데 그건 그렇고 부지 선정은 끝냈답니까?”

청색 마탑 지부가 들어설 부지 선정.

이게 내가 클로이를 찾아온 가장 큰 목적이었다. 아직 어디에 건설할지 정하지 않았다면, 나의 ‘아이일 거리’로 유치해보려고.

클로이는 청색 마탑주인 니콜스의 애제자다.

단순히 사제 관계를 넘어서 부녀관계라고 봐도 좋을 만큼 사이가 좋으니, 클로이를 꼬시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푸훗, 뭐야. 칭찬이 너무 과해. 부지 선정은... 나도 잘 모르겠네. 스승님이 며칠째 알아보시는 것 같긴 하던데. 근데 그건 왜?”

“아, 그냥 뭐. 궁금해서요.”

“그럼 내가 물어봐 줄까? 스승님도 이 여관에 묵고 계시거든. 바로 내 옆방이야.”

“오오, 옆방이요?”

최종 결정권자가 바로 옆에 있다니?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럼 아예 니콜스 님도 여기로 모시죠? 오랜만에 저희 셋이 술자리를 가져도 좋을 것 같은데. 청색 마탑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내가 그리 말하자, 클로이가 눈을 쌜쭉하게 떴다.

“......그때처럼 또 전쟁 얘기 하려구?”

“어허, 세상에는 대화의 주제로 삼을만한 게 넘쳐나는데 뭐하러 그런 지루한 전쟁 얘기를 합니까? 안 합니다.”

“......정말?”

“네. 우리 셋 다 같은 전쟁에 참여해서 서로 다 아는 얘기를 왜 하겠습니까? 걱정 마시죠.”

솔직히 전쟁에서 있었던 자신의 활약상을 자랑하는 것만큼 맛깔나는 술안주도 없으나, 클로이가 싫어하니 전쟁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알겠어, 그럼. 잠깐만 기다려.”

클로이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니콜스와 함께 돌아왔다.

“허... 나를 초대해준 것은 고맙지만, 이거 늙은이가 괜히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 미안하군.”

그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물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영업용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맞이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현인과 술자리를 함께 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죠. 자, 어서 앉으시죠. 제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허허, 고맙네. 아이일 백작.”

“딱딱하게 왜 그러십니까. 평소처럼 편하게 불러주세요. 자자, 일단 시원하게 한 잔 쭈욱 들이켜시죠.”

나는 잔이 넘칠 정도로 술을 가득 따라서 니콜스에게 권했다.

이 사람은 술이 공략 포인트다. 술을 잔뜩 먹이면 의외로 허술해지는 면모를 보인다. 예전에 블리자드를 얻어낼 때도 이 방법이 주효했다.

내가 건네준 잔을 원샷한 니콜스가 입가를 닦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으, 좋구먼.”

“좋다고 하시니 한 잔 더 드리겠습니다.”

클로이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거푸 몇 잔을 더 권하고 나서야 본론을 꺼냈다.

“요즘 마탑 지부 건설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다죠? 이리저리 땅을 보러 다니신다고 하던데.”

“그렇다네. 하도 돌아다녔더니 삭신이 다 쑤시는군. 그래도 후보지 선정은 거의 끝냈지.”

“......후보지요? 그게 어딥니까?”

“모험가 길드 근처가 가장 괜찮을 것 같더군. 번화가에 위치해 있고, 모험가들로부터 마법 연구 재료를 수급하기도 수월하니 말이야.”

“아....”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탑을 내 쪽으로 유치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소득이 발생할 테니까. 일단 마탑이 들어서면, 각종 재료를 취급하는 상점이나 마법 공방 같은 것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탄탄한 수익 기반이 다져지면, 당연히 최종 퀘스트에 전념하기도 편해진다.

“아... 이거 조금 실망이네요.”

“음? 왜 그러나?”

“아니, 청색 마탑이 왜 모험가 길드 근처로 갑니까?”

“그게 무슨...? 내 방금 설명하지 않았나. 수도 중앙 부근에 있고, 재료 수급도 수월하다고 말일세.”

니콜스가 의아해하며 말했으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죠, 그게 아니죠. 청색 마탑이 가는 게 아니라, 모험가 길드가 마탑이 있는 곳으로 와야죠.”

“허허, 누가 가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중요하죠. 마법사의 성지인 마탑과 몬스터 도살자들이 모인 모험가 길드가 같은 급입니까? 비교도 안 되죠. 저도 모험가이지만 마탑이 훨씬 높다고 생각합니다.”

현직 모험가피셜이다.

“그런 마탑이, 고작 재료 때문에 훨씬 급이 낮은 모험가 길드 옆으로 홀랑 가버리면 위신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꼭 청색 마탑이 아쉬운 것처럼 보이잖아요.”

“됐네, 이 사람아. 고작 그걸로 위신이 떨어지기 까지야....”

그는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으나, 나는 계속해서 궤변을 늘어놓았다.

“명품이 잘 안 팔린다고 가격을 낮춰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단기적으로는 좀 잘 팔려도 장기적으로는 결국 그 가치가 훼손되기 마련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가격을 낮출 텐데, 누가 그걸 사려고 하겠습니까?”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네만... 그게 우리 마탑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청색 마탑도 명품이니까 그렇죠. 당장 재료 수급이 아쉽다고 수급처 근처로 가버리면, 누가 좋은 재료를 구했을 때 마탑으로 찾아오려고 하겠습니까? 가만히 있어도 마탑이 알아서 찾아와줄 텐데, 누가 굳이 힘들여 방문판매를 하겠냐는 말입니다.”

솔직히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제 결론은 이겁니다. 청색 마탑의 수도 지부는, 번화가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고고하고 도도하게 자리해있어야 비로소 그 가치가 제고된다. 그래야 사람들이 더욱 찾고 싶어 한다.”

“흠... 쉬이 가질 수 없는 물건일수록 더 갖고 싶어진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로군?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네만... 혹시 추천하는 장소라도 있나?”

거의 개소리였지만, 우리의 마탑주께서는 그 개소리 속에서도 나름의 논리를 찾아내어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기염을 토해냈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예, 괜찮은 장소가 있긴 하죠. 남쪽 성문 근처에 있는 ‘아이일 거리’라고, 청색 마탑이 들어서기에는 아주 제격인 장소로써 세액 감면의 혜택까지 누릴 수 있는.......”

***

케른헴으로 향하는 마차 안.

─달그락달그락

“이제 슬슬 도착하겠군. 그나저나 진짜 편하네, 이 마차.”

“그러게, 의자가 푹신푹신해서 너무 좋다.”

앨리스와 함께 수도를 떠나 출발한 지 벌써 일주일이나 흘러 도착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마차를 오래 타면 발생하는 부작용인 요통이 거의 없었다.

“앞으로 자주 애용해야겠어. 흐흐흐.”

이건 내 전용 마차다.

저택 풀 패키지에 포함된 기본 옵션이었는데, 기본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고급이었다. 그래도 백작이 사용하기엔 격이 좀 떨어진다고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다. 충분히 좋은데 굳이 다른 걸 사야 하나 싶다.

어쨌든 마차도 좋고, 마부도 내 하인이고.

여러모로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마음 편한 여정이었다.

“백작위를 받고 내 인생이 달라졌다~.”

“무, 뭐니? 그 이상한 노래는.”

영지가 없는 중앙 귀족.

이게 참 간편하고 좋았다.

물론 영지가 없다는 점에서 수입은 몰락한 귀족과 비견될 정도로 적었으나, 그들과는 달리 작위가 있어서 감히 비교가 불가했다.

게다가 영지가 없으니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별로 없고, 수도에 기거하며 왕성에 자주 드나들어 정치에 밀접하게 개입할 수 있다는 특성 때문에 권력이 막강했다.

케른헴으로 가는 도중 숙식을 위해 어느 도시를 가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중앙과 연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영주는 직접 뛰쳐나와서 맞이해주기도 했다.

그냥 메두사 마크만 보여주면 만사형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메두사는 내 가문의 문양이다. 아직 깃발까지 만들지는 못했는데, 나와 앨리스를 포함한 ‘아이일 백작가’ 사람들의 신분패에는 벌써 새겨 넣었다.

“뭐, 이제 도린 형제 영입까지만 끝내면 그런대로 급한 불은 다 끄겠네.”

또 다른 급한 불이었던 청색 마탑 유치 건은 잘 마무리됐다.

솔직히 내가 좀 노골적으로 속 보이는 제안을 하긴 했지만, 내 속셈을 눈치챈 클로이가 나서서 열심히 지원사격을 해준 덕분에 니콜스를 설득할 수 있었다.

사실 청색 마탑 입장에서도 딱히 손해 보는 건 없다. 어차피 건설에 드는 비용은 전부 왕실에서 부담하니까.

나의 ‘아이일 거리’에 마탑이 지부를 건설하기로 했으니, 이제 그쪽은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상권이 성장할 것이다. 병원이 들어서면 약국이 따라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이제 도린 형제를 고용해서 잡다한 일들을 떠넘기면, 나는 다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생활할 수 있다.

“수도로 돌아갈 때쯤이면 왕실 서고 공사도 끝날 테고. 모든 게 딱딱 들어맞는단 말이지. 흐흐흐.”

“왜 자꾸 혼잣말하면서 웃는 거니? 바보처럼.”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앨리스에게, 나는 짐짓 위엄있어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쭈? 네 이놈! 주군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정녕 뜨거운 맛을 보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으이구... 내가 못 살아 정말....”

아무튼 그렇게 앨리스와 노닥거리며 가다 보니, 곧 케른헴의 영토에 진입했다.

슬슬 의뢰를 수행 중인 모험가들도 보이기 시작했기에, 나는 마부에게 마차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마부님, 잠시만 멈춰주세요. 저 사람들한테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아이고... 말씀을 낮추시지요, 주인님.”

마부는 황송해하며 마차를 멈춰 세웠다.

근데 나는 딱히 반말할 생각이 없었다. 나도 평민의 설움을 잘 알고 있고, 꼭 고압적인 말투를 사용해야만 위엄이 사는 건 아니니까. 나는 찰흙 같은 사람이라서, 상대가 나를 예의 있게 만들면 예의 있어진다.

어쨌거나 나는 마차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모험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 어, 엘 씨 아니신가요?”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는 나를 아는 듯했다. 원래 케른헴의 모험가라면 웬만해서는 나를 알고 있다.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근데 혹시 도린 형제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아, 그들이라면 의뢰인과 함께 남쪽 숲 지대 인근에서 사냥 중일 겁니다.”

“의뢰인과 함께...? 음,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물론 도린 형제 역시 캐릭터가 독특하기 때문에 많은 모험가들이 알고 있었다.

아무튼 남쪽 숲 지대 근처에 있다고 하니, 마부에게 그쪽으로 가달라고 요청했다.

─달그락달그락

그렇게 남쪽 숲 지대로 이동해 한동안 돌아다니니 곧 도린 형제 파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이 있는 사람들은... 모험가가 아닌 것 같은데?”

도린 형제를 제외하고 두 명이 더 있었다.

한 명은 고급스러운 갑옷을 차려입은 앳된 청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고급지진 않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갑옷을 갖춰 입은 병사로 보였다.

“아, 의뢰인과 함께 사냥 중이라고 했지? 저 청년이 의뢰인인 모양이군. 옆에 있는 건 그의 호위고.”

아주 가끔 저런 의뢰가 들어오기도 한다.

취미 삼아 사냥하러 나온 귀족을 보조하는.

길 안내를 해주거나 몬스터를 반쯤 처치해서 넘기면, 귀족이 손맛만 보는 그런 형태의 의뢰다.

당연히 권세 있는 귀족이라면 사병이 많으니 굳이 모험가를 찾을 필요가 없으므로, 보통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몰락 귀족이 저런 의뢰를 해온다.

나한테도 저런 의뢰를 수행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는 귀족과 엮이고 싶지 않아서 전부 거절했었다.

“의뢰 수행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 일단 가서 인사나 하고 약속만 잡아야겠네. 앨리스 너도 같이 갈래? 인사하러.”

“당연하지!”

앨리스가 담당 찐따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사악하게 눈을 빛내며 대답했는데, 사실 담당 찐따가 맞다. 도린 형제는 앨리스한테 한 번 두들겨 맞은 뒤, 물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이력이 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마차에서 내려 도린 형제를 향해 다가가며 소리쳤다.

“어이! 형제들!”

“어이! 내 심부름꾼들!”

앨리스도 똑같이 나를 따라 손을 흔들며 소리쳤는데, 나는 황급히 그녀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아니, 그렇게 부르지 마.”

“아야, 왜? 심부름꾼 맞잖니?”

“그렇긴 한데, 내가 고용한 다음에 그렇게 불러. 너 때문에 괜히 지레 겁먹고 내 밑으로 안 들어오겠다고 하면 어떡해? 소중한 심부름꾼을 놓치고 싶어?”

“그, 그건 그렇네... 알겠어.”

내가 그렇게 앨리스에게 주의시키는 사이에 도린 형제가 우리에게 성큼 달려왔다.

“억울한 마법사!!!”

“돌아온 것인가? 반갑군!!”

“애, 앨리스 양도 반갑소....”

앨리스한테만 존댓말을 쓰는 걸 보니, 역시나 그들은 아직까지 앨리스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한창 일하고 있는데 방해해서 미안하다. 의뢰 언제 끝나? 할 얘기가 좀 있는데.”

“그게 무엇인가? 지금 하면 되지 않나!”

역시 성미가 급한 녀석들이었다.

“하다 보면 좀 길어질 수도 있는 얘기라서.”

“길어질 수도 있는 것은 우리의 의뢰다! 저 귀족 나리께서 여간 깐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재수 없으면 밤늦게까지 하게 될지도 모르겠─”

“─지금 뭐 하는 거냐!!”

어느새 다가온 의뢰인이 테도린의 말을 끊고 호통쳤다.

“일하다 말고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지?”

“오랜만에 동료를 만나서 잠시....”

“오랜만에 동료를 만나면 의뢰 따위는 내팽개쳐도 되는 건가? 돈 받기 싫어?”

“그, 그런 것은 아니오만....”

테도린이 방금 말한 대로 굉장히 깐깐한 녀석이었다. 고작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굉장히 갈궈댔다.

도린 형제가 주눅 들어서 머뭇거리고 있자, 청년 귀족의 화살은 내게로 향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너도 모험가 같은데, 감히 귀족의 사냥을 방해해도 된다고 생각했나?”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인사만 하고 돌아갈 참이었습니다. 사냥을 방해한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어쨌거나 내가 방해한 건 사실이었기에 사과부터 했다.

“흥, 하여튼 평민이란 족속들은 예의를 모른... 오! 네 뒤에 서 있는 여인은 누구지? 네 동료인가?”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말하던 그는, 내 뒤에 있는 앨리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 아, 네.”

“한낱 모험가와 어울리기엔 아쉬운 여인인데. 어이, 여자. 이런 놈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나와 함께 사냥을 즐겨보는 게 어떻겠나?”

감히 누구한테 치근덕거려?

나는 앨리스를 완전히 내 뒤로 숨기며 입을 열었다.

“동행인인 저를 면전에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몇 시간이면 된다.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너는 가서 술이라도 마시고 있어라.”

그는 거만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돈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섭섭지 않게 챙겨 준다니까? 네놈이 하루에 버는 돈의 다섯 배를 주지.”

“거절하겠습니다.”

“하!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평민은 귀족이 말하면 그냥 알았다고 하는 거다!”

“알았다.”

너는 가만히 놔두면 안 되는 놈이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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