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아이일 백작 (1)
“......예?”
논공행상이 끝난 후 알현실에 남아 프란츠와 독대하던 나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서고가 공사 중이라고요?”
“하하, 기대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길어도 보름 내에는 공사가 완료될 터이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뭐 기다리는 거야 어렵지는 않은데... 근데 왜 공사 중이죠? 저는 서고는 안 건드렸는데.”
내가 일전에 클로이가 결계 마법사를 암살할 시간을 벌기 위해 왕성 곳곳을 파괴하며 어그로를 끌었다지만, 서고는 건드린 기억이 없다. 나는 애당초 그곳의 위치도 모른다.
“왕성에 손상된 곳이 워낙 많아서 수리하는 김에 서고도 함께 손보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재단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아, 그렇군요.”
겸사겸사 리모델링을 한다는 뜻이었다.
뭐, 내가 저지른 잘못도 좀 있으니 굳이 더 따지지 않기로 했다. 길어봤자 보름. 충분히 기다릴 만한 시간이다.
어차피 급한 것도 없다. 내가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라면 모르겠는데, 최종 퀘스트는 요원한 상태였으니까. 솔직히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아직 감도 안 잡힌다.
국왕 시해자가 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이번 기회에 조금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공사가 완료되는 즉시 엘 공의 저택으로 기별을 넣어드리겠습니다.”
“......저택이요? 무슨 저택... 아, 맞다. 나 저택 받았지 참.”
한평생 여관방을 전전하며 살았더니 적응이 잘 안 되는군. 케른헴에 허름한 내 집이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머문 건 며칠 안 된다. 그건 거의 앨리스를 숨기는 용도로나 썼었다.
아무튼 내가 그런 멍청한 말을 하며 머리를 긁적거리자, 프란츠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엘 공께서도 아직 적응이 안 되셨나 봅니다. 저도 분에 넘치는 이 왕좌에 앉아있을 때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게만 느껴지는데 말입니다.”
“아, 예.”
자신을 낮추고 친근하게 구는 건 좋은데, 왕으로서의 위엄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왕이라면 배짱도 좀 튕기고 카리스마도 있어야지.
어쨌거나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차차 익숙해지겠지요. 저도, 엘 공도. 공께서도 어서 가서 장원과 저택을 확인해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당장 생활하시는 데에 지장이 없게끔 준비했습니다만, 그래도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있을 겁니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요?”
귀찮은 건 딱 질색인데.
“필요하다면 기사나 사병도 고용하셔야 할 테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있습니다. 자세한 건 저택에 있는 집사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오.”
저택만 주는 게 아니라 집사도 주는 거였어?
그럼 얼른 저택으로 가보는 게 좋을 듯했다. 아무리 프란츠가 편하다고 해도, 왕을 붙잡고 이런 시시콜콜한 질문을 하기는 좀 그러니까.
“오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 아, 서고의 공사가 끝나면 기별을 넣어주신댔죠? 그거 잊지 마시고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명심하겠습니다.”
***
“정말? 정말 네가 귀족이 됐다구?”
함께 걷고 있던 앨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래, 무려 엘 아이일 백작님이시지.”
그녀는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내가 작위를 수여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우와... 백작? 부럽다아... 나는 아직도 모험가인데....”
“모험가가 뭐 어때서? 모험가가 됐다고 좋아서 날뛸 때는 언제고. 그리고 나도 아직 모험가야.”
“그래두 넌 귀족이고 난 평민이잖니.”
앨리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인간 사회의 물을 오래 먹어서 그런가? 원래 앨리스의 관심사는 맛있는 음식뿐이었는데, 이제는 신분에 대해서도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참고로 그녀는 전쟁에 대한 보상으로 금화를 받았다. 티안브리스의 얼굴을 하고 있는 탓에 동부 연합군과 함께 있을 수 없어서, 그마저도 내가 대신 받아다 줬다.
“에이, 얼굴 펴. 너도 이제 반쯤은 귀족이나 다름없잖아? 아이일 백작가의 마법사인데.”
“배, 백작가의 마법사? 그, 그게 그렇게 되는 거니?”
“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내가 고용하고 싶으면 고용하는 거지.”
“그렇구나... 나는 백작가 마법사다! 헤헤.”
그녀는 금세 기분이 풀어져서 싱글벙글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앨리스, 너 인페르노 학습은 어떻게 돼가?”
“으, 으응? 너무 어려워서 아직....”
역시 그런가.
하긴, 왕국 최고의 기사단을 꼼짝 못 하게 가둬버릴 만큼 강한 마법인데 당연히 쉽지 않겠지.
어쨌든 인페르노 마법서는 앨리스에게 좀 더 맡겨두는 게 좋을 듯했다. 이 마법은 오랜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거 꼭 배워. 진짜 좋은 마법이더라. 습득에 성공하면 백작가 마법사보다 더 높은 거 시켜줄게.”
“더, 더 높은 거? 그게 뭐니?”
“음... 백작가의 수석 마법사! 어때?”
“그,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아 보여... 열심히 배울게!”
앨리스가 의욕에 불타는 눈빛으로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사실 마법사라고는 앨리스 한명 뿐이라 어차피 그녀가 수석 마법사지만, 동기부여가 됐으니 뭐.
아무튼 그렇게 앨리스와 떠들며 걷다 보니, 곧 목표했던 거리(street)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거리를 걸으며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어디 보자... 여관, 음식점, 잡화점... 그리고 술집도 있고. 저건 뭐지? 찻집인가?”
“......뭐하니? 왜 여기에 있는 가게들을 그렇게 열심히 쳐다봐?”
“아, 여기 이제 내 소유거든.”
백작으로 서임 되면서 장원과 함께 이 거리도 양도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히 내 소유는 아니고, 이 거리에 있는 상점들은 왕실이 아닌 나한테 세금을 내게 된다. 수도에 기거하는 중앙 귀족은 이런 식으로 수입을 얻는다고 한다.
물론 세금을 나한테 내는 만큼, 이 거리의 치안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도 내 몫이다. 이미 내가 작위를 받은 순간부터 이 거리는 ‘아이일 거리’로 명명됐다.
“뭐어? 여기가 엘, 네 거라구?”
“비슷해. 아무튼... 생각보다 넓긴 한데 상가가 들어서지 않은 장소도 좀 있네.”
프란츠가 말했던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그의 말마따나 그냥 이대로 놔둬도 내가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그 이상의 수입을 원한다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를테면 상점을 유치한다거나 하는.
만약 모험가 길드 같은 걸 유치한다면 그야말로 떼돈을 벌게 될 것이다. 길드 자체에서 발생하는 돈도 있고, 주변에 잡화점이나 대장간 따위의 부수적인 가게까지 우후죽순으로 들어설 테니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연금 복권에 연속으로 당첨된 거나 다름없을 텐데 말이지....’
물론 그런 대형 길드를 유치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새로 건물을 짓고 이사하는 데에 드는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할 텐데,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는 길드가 그런 비용을 감당해가며 이쪽으로 오려고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뭔가 엄청난 유인책을 마련하거나 내가 이사비용을 전부 대준다면 모르겠지만, 나는 당장 그만한 돈은 없었다.
“흐음... 왕실 서고의 공사가 끝날 때까지 이런 거나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
이제 귀족도 됐겠다, 슬슬 미래에 대해서도 준비를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세계에 남게 되는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니까.
솔직히 현실보다 여기가 더 낫긴 하다. 내가 그동안 쌓아온 업적과 위신을 생각하면... 글쎄. 이런 걸 다 버리고 굳이 현실로 돌아가야 하나 싶기도 하다.
***
나는 내친김에 장원까지 살펴본 후에 저택으로 향했다.
장원은 수도 밖에 펼쳐져 있는 경작지 중 일부분이었는데, 왕가나 다른 귀족의 경작지와 다 똑같이 생겨서 어떤 게 내 땅인지 식별하기 어려워 좀 헤맸다.
어쨌든 꽤 넓었다. 잉여 농작물만 내다 팔아도 돈이 꽤 나올 만큼. 당연히 땅에 귀속된 농노도 딸려왔고, 그들은 수도 내에 있는 나의 저택 주변에 작은 촌락을 이루어 살아간다고 한다.
“내 소유의 땅까지 확인하니까 귀족이 됐다는 실감이 좀 나네. 흐흐흐... 오? 저긴가 보군.”
남쪽 성문을 통과해 부지런히 걷다 보니, 곧 저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려 4층짜리 대저택이었다.
건물 자체도 커다랬지만, 뜰 역시 무척이나 넓었다. 거의 종합운동장쯤은 될법한 범위에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울타리를 따라 잘 가꾸어진 듯 보이는 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와 씨, 아무리 수도의 외곽지역이라지만 이건 너무 큰데? 무슨 작은 성채라고 해도 되겠어.”
나는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고, 앨리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렇게 큰 집에 너 혼자 사는 거니?”
“그건 아닐걸? 집사도 있다고 하던데. 그리고 너도 같이 살 거고.”
“나, 나두? 그래도 돼?”
“뭔 당연한 걸 묻고 있어? 새삼스럽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앨리스와 같이 지내는 게 너무나도 당연해졌다. 나는 그렇게, 당연하게 앨리스를 이끌고 저택의 외부 정문으로 향했다.
철창처럼 만들어진 정문은 닫혀있었지만 잠겨있지는 않았다. 딱히 지키고 있는 이도 없었기에 바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뜰이 워낙 넓었기에 정문에서 저택의 현관까지 가는 데만 해도 한세월이었다. 아무튼 도착한 현관은 정문과는 달리 잠겨있었다. 나는 현관문 정중앙에 달려 있는 문고리를 흔들어서 노크했다.
─똑똑똑
그러자 안에서 무언가 부산스러운 듯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잠시 후 깔끔한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사내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의 기품마저 느껴지는 그는, 나를 바라보며 정중히 물었다.
“혹시 엘 아이일 백작님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안녕하십니까. 저는 앞으로 백작님을 보필하며 잡무를 처리해드릴, 집사 버클리라고 합니다. 킹메이커이자 킹슬레이어로 소문이 자자하신 백작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오오, 집사님이셨군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편하게 버클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일단 하인들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자, 안쪽으로 드시지요.”
멀끔한 중년의 사내라 그런지 신뢰감이 물씬 풍겨왔다.
그래, 집사는 역시 청년보다는 중년이지. 원래 중년에게서만 느껴지는 묘한 안정감 같은 게 있다. 산전수전 다 겪어봐서 든든할 것 같달까. 배트맨이 의지하는 집사도 거의 노년이지 않은가? 이게 국룰이다.
어쨌거나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니, 널찍한 홀에 열 명가량의 하녀와 하인들이 허리를 푹 숙인 채 대기하고 있었다. 저택은 집사와 하인이 포함된 풀 패키지였다.
“이들이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할 하인입니다.”
집사는 내게 그렇게 말한 뒤, 하인들을 향해서도 말을 이었다.
“이분은 엘 아이일 백작님이시다. 고개를 들고 너희들의 주인님께 인사드리도록.”
“안녕하십니까, 주인님.”
“안녕하십니까, 주인님.”
“안녕하십니까, 주인님.”
그들은 허리를 펴서 내 얼굴을 흘끔 바라보고는,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일제히 인사했다.
얼핏 보면 굉장히 예의 바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녀 몇 명이 겁에 질린 듯 몸을 덜덜 떠는 걸 보니 나에 대해 뭔 이상한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이 뭔지 알 것도 같았기에, 나는 헛기침하며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흠흠, 눈을 마주쳤다고 제가 여러분을 해칠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거 소문이 과장된 겁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알겠습니다, 주인님.”
“알겠습니다, 주인님.”
대답은 칼같이 했지만 몸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뭐, 이건 차츰 나아지겠지.
나는 그들을 해산시키고 집사 버클리에게 물었다.
“제가 평민 출신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전반적인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든가.”
“예, 백작님. 일단 현 상태만 유지하셔도 ‘아이일 거리’로부터 매달 오십 골드 이상의 수익이 발생할 것입니다.”
“오, 오십 골드요?”
50골드.
사실 대단히 큰 금액은 아니다. A급 모험가인 내가 한 달 내내 열심히 일하면 그 정도는 벌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불로소득이다. 집안에 누워서 콧구멍이나 후비고 있어도 꼬박꼬박 들어오는 금액이 50골드라면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습니다. 만약 백작님께서 다른 상가를 유치하신다면 수입은 더 늘어나겠지요.”
“아, 그건 저도 생각해보긴 했는데... 이사비용이라도 지원해주지 않는 이상은 쉽지 않을 것 같던데요.”
“규모가 큰 상가는 그렇겠습니다만, 작은 상점은 세액 감면이나 거리의 치안만 확실하게 신경 써주셔도 들어오고 싶어 할 겁니다.”
그렇군. 생각해보니 세금을 받는 사람이 나인데, 내가 비율을 조정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어쨌든 지금 상태로도 ‘아이일 거리’는 잘 돌아간다고 하니, 그쪽은 천천히 신경 써도 될 것 같았다.
“으음, 알겠습니다. 뭐, 다른 급한 거는 없습니까? 장원 쪽도 알아서 잘 굴러가나요?”
“병사를 좀 고용하셔야 합니다. 저택 경비나 거리의 치안 유지, 그리고 경작지에서 일하는 농노들을 몬스터로부터 보호해줄 병사 말입니다.”
집사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몬스터? 수도 근처에는 몬스터가 없지 않나요? 전부 몬스터 서식지로 몰아넣고 관리한다던데.”
“그렇습니다만, 간혹 서식지를 벗어나서 활개 치는 몬스터도 있습니다. 극히 드물긴 하지만, 만약 농노가 한 번이라도 공격받는다면 겁을 집어먹어서 일의 능률이 무척 떨어지게 되니 이 부분은 되도록 빨리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이건 나도 알고 있다. 모험가로 활동하던 시절, 농노가 모인 마을에서도 의뢰를 꽤 받아봤으니까.
몬스터에 의해 농노 한 명이 죽으면, 한 사람 치의 수확량만 줄어드는 게 아니다. 다른 농노들도 덩달아 위축돼서 생산량이 전체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급한 대로 모험가 길드에 의뢰를 넣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책임지고 관리 감독해줄 수 있는 백작님의 사병이 필요합니다.”
“흠....”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려 앨리스를 바라봤다.
‘......앨리스한테 시켜볼까? 아니, 그건 안 되겠군.’
앨리스라면 몬스터가 떼거리로 몰려와도 혼자서 정리하고도 남겠지만, 문제는 그녀가 불 속성 마법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거다.
몬스터와 싸우다가 경작지를 홀라당 다 태워 먹을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
있었다.
몬스터도 잘 잡고, 신뢰할 만하며, 성격이 드세서 불량배들로부터 치안 유지도 잘할 것 같은 사람이.
“아무래도 케른헴에 다녀와야겠군.”
도린 형제를 만나러 가야겠다.
“흐흐흐....”
그야말로 내 사병으로 고용하기에 안성맞춤인 녀석들이었지만 사실 만나서 백작위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