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공행상 (2)
내전 종료 후 일주일.
반왕군과 국왕군이 벌였던 싸움의 여파는 빠르게 수습됐다.
결계가 사라지고 수도에 진입했던 반왕군이 주민이나 인프라를 건드리지 않은 채 싸웠고, 그마저도 알베르트가 빠르게 암살당함으로써 국왕군이 금세 항복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 웬만한 건 다 수습이 됐다. 왕성은 내가 너무 뒤집어놔서 아직도 수리가 진행 중이지만.
“흐음....”
어쨌거나 나는 지금 수도의 동쪽 성문 앞에 있었다.
클로이와 프란츠를 비롯한 반왕군의 주역들과 함께.
“......이거 꼭 해야 하나? 귀찮은데.”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클로이가 샐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말 위에 올라타서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귀찮다는 거야?”
“토 달지 말아주시겠습니까? 가끔은 숨 쉬는 것도 귀찮을 때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개선 행진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거 별로 의미도 없는 짓 같고요. 우리가 무슨 원정을 떠났다가 돌아온 것도 아닌데, 뭔 개선 행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개선 행진은 쓸데없는 행동 같았다. 내전에서 우리가 승리했다는 사실은 왕국민 모두가 다 안다. 아, 멀리 떨어진 지방은 아직 모르려나? 아무튼 수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게다가 프란츠는 이미 국왕이 되어서 왕성에서 생활 중인데, 굳이 이렇게 다시 성문 밖으로 나와서 왕성까지 느릿느릿 행진해야 할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
“의미가 왜 없어? 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거야.”
“어허, 그런 추상적인 표현으로 저를 현혹하려 들지 마세요.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데 개선 행진이라니. 이건 자기 이름을 지어준 부모한테 자기 이름을 소개하는 것만큼 비생산적인 짓입니다.”
전투에서 명예 따위는 생각지 않고 늘 선빵과 기습을 날리는 초 실리주의자인 나에게는, 귀족들의 이런 겉치레와 명예 타령이 좀 답답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하여튼 귀족들은 체면을 너무 중시한다니까. 쯧.”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너두 잠시 후면 귀족이 될 테니까. 안 그래? 엘 아이일 백.작.님?”
“......예? 아이, 참. 아직 서임받은 것도 아닌데 벌써 그렇게 부르시면 어떡합니까? 클로이 메이필드 후.작.님. 흐흐흐.”
작위 서임은 개선 행진을 통해 왕성으로 들어간 뒤에 이루어진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클로이를 포함한, 전쟁에서 굵직한 활약을 한 사람들의 논공행상도 그때 함께한다.
근데 말이 좋아 논공행상이지, 이미 누가 어떤 보상을 받을지는 사전에 조율해서 대충 거의 정해진 상태였다.
클로이는 내가 프란츠에게 요구했던 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생전에 가졌던 작위인 후작위와 영지를 받는다.
사실 이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인데, 원래 여성은 작위를 승계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이 없는 영주는 양아들을 두거나, 딸의 남편인 사위에게 작위를 물려준다. 좀 차별적으로 보이긴 해도, 중세 베이스의 봉건제라는 게 보통은 그렇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 형에게 죽을 위기에 처해있던 2왕자를 왕으로 만들어줬으니, 그런 관례쯤은 무시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여러모로 내가 후작이 된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
“저도 백작이 된다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아무튼 서임 받을 때 표정 관리 잘하세요. 지난번처럼 뚱한 표정으로 입 꾹 닫고 노려보지 마시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그는 이제 국왕이니까요.”
비록 스스로 쟁취해낸 게 아니라 할지라도 어쨌거나 왕은 왕이다. 게다가 프란츠는 알베르트와는 달리 약자를 배려하고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니 존중해줄 만한 가치가 있다.
“나, 나도 알거든?”
쏘아붙이듯 대답한 클로이는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저기... 엘.”
“......?”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도 못 했네. 고마워. 복수를 도와줘서.”
“뭡니까? 도와드린 게 아니라 목적이 같았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 같은 거 하지 마세요. 그럴 거면 돈으로 주든가.”
나는 진심 어린 감사 인사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장난치듯 대꾸했다. 왠지 온몸이 간지러워진달까.
“응. 앞으로 영지가 활성화되면 돈이 들어올 테니까 그때─”
진짜 주게?
“아니, 왜 이렇게 진지하시지? 농담입니다. 제가 이번 일로 클로이 씨한테 돈을 받으면 살인 청부업자밖에 더 되겠어요? 저를 나쁜 놈으로 만들지 마시죠.”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클로이는 정말로 돈을 줄 것 같은 기세였기에, 나는 손사래 치며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채 의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두... 이렇게나 큰 도움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어? 은혜 갚아야지.”
“필요 없다니까 그러시네. 그럼 돈은 됐고, 몸으로 갚으세요.”
“모, 몸??”
클로이는 반사적으로 옷매무새를 매만졌고,
나는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저한테 곤란한 일이 발생하면 발로 뛰어서 도와달라는 뜻입니다. 제가 클로이 씨를 도와드린 것처럼요. 거참.”
“아, 그, 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도와줄게.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녀는 고개를 위아래로 연신 흔들어댔다.
그렇게 클로이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윽고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열렸다.
─철컥! 끼이이익....
“개선 행진을 시작하겠소!”
내 앞쪽에 있던 동부의 시즈모어 공작이 큰소리로 외치자, 맨 앞줄부터 천천히 성문을 통과해 수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지휘관급 인사만 말을 타고 나머지 일반 병사들은 걸어서 들어갔는데, 적어도 내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기에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러나 말발굽 소리는 곧 수많은 군중들의 함성에 의해 묻혀버렸다.
─와아아아!!
─새로운 국왕 전하 만세!
─프란츠 폰 하츠펠트 만세!
가장 선두에 있는 것은 당연히 새롭게 왕좌에 오른 프란츠였다.
새하얀 백마를 탄 그는, 자신을 향해 열렬히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교단의 성녀와 동부의 시즈모어 공작이었다.
반왕군의 주축 세력은 세르시아 교단과 동부 연합군이었기 때문에, 두 집단의 지도자인 그들이 2열에 배정됐다.
─우오오오!
─성녀님이다! 나 성녀님 처음 봐!
─동부의 검은 불의를 보면 용서하지 않지!
성녀와 공작 역시 무수한 환호를 받으며 행진했다.
그 뒤는 나와 클로이. 이번 전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우리 둘은 3열에 배치됐다.
─히이이이이익!!
히이익? 우리가 성문을 통과하자, 앞선 것과는 다른 종류의 함성이 들려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었고, 그들은 나에 대해 수군거렸다.
─주, 중부의 메두사다!!
─혼자서 철의 기사단을 몰살시켰다는 그...?
─세, 세상에... 그게 가능한 일이야?
─그것뿐이 아니야! 왕성으로 몰래 잠입해 찬탈자를 시해한 킹슬레이어라고!
‘......철의 기사단을 몰살시키진 않았는데?’
알현실에 갇혔던 단원들 중 인페르노를 건드리지 않은 상당수는 살아남았고, 알베르트가 죽은 후 투항했다.
역시 소문이라는 게 늘 그렇듯 조금 과장된 면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딱히 나쁜 얘기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화답을 해줘야겠지.
나는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띤 채, 군중들을 스윽 둘러보며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저, 저 싸늘한 미소와 손짓은...?
─우와아악!! 저건 작별 인사다! 눈을 마주쳤으니 너희들은 이제 이승을 하직하게 될 거라는 작별 인사라고!
─에, 에이... 설마....
─설마는 무슨! 평원 전투에서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로 아군까지 석화시켰다는 소리 못 들어봤어? 모두 살고 싶으면 눈깔아!!
─히익...!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돌연 길가 양쪽으로 빼곡히 늘어서 있던 군중들이 무릎 꿇고 고개를 푹 숙여 바닥을 내려다봤다.
“아니, 미친.”
왕이 지나갈 때도 안 꿇었던 무릎을 나한테 꿇으면 어떡하냐고. 그림 이상해지게 말이야.
“여러분, 저는 그런 사람이─”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적막 속에서 해명하려던 나는, 이게 별다른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메두사 컨셉은 지워지지 않은 채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고, 이들은 계속 나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즐기자.
“─이지만, 무릎을 꿇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눈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무사할 것입니다. 흐... 흐흐흐....”
이젠 나도 모르겠다.
***
왕성 내에 있는 알현실.
내가 인페르노로 불태워버려 아직도 수리가 덜 끝난 이곳에서는 논공행상이 한창이었다.
“.......했던 찬탈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큰 용단을 내려주신 세르시아 교단에 뜻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이며.......”
뭐, 논공행상이라고 해봐야 특별할 건 없었다.
프란츠에게 호명 당한 사람은 앞으로 나가서 무릎을 꿇고 자신이 세운 공적에 대해 치하받은 뒤, 보상을 받는 형식이었다. 물론 성녀는 국왕의 신하가 아니므로 무릎을 꿇진 않았지만, 나머지는 예외 없이 그런 절차를 통해 보상을 받아 갔다.
물론 나름대로 공적을 세운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이 지루한 요식행위는 한참이나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억누르며 내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참고로 내 차례는 마지막이다.
“......왕국 최고의 마법사들이 모여있는 청색 마탑은 그 위상에 걸맞게끔 이곳 수도 엘디니아에 지부를 설립하고, 건설에 발생하는 비용은 왕실에서 전액 부담할.......”
‘청색 마탑은 저런 보상을 요구했구나.’
이게 다 사전에 말을 맞춘 거다.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내지 못한 왕위였기에 프란츠는 입지가 낮았고, 교단이나 동부 연합군, 청색 마탑 등의 굵직한 세력은 입지가 높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보상을 직접 선택해서 요구할 수 있었다.
힘없는 왕이라 여기저기에서 뜯기는 느낌도 좀 있지만, 그래도 몰상식한 보상을 요구하는 자는 없었다.
동부 연합은 향후 20년간 동부 지방에 대한 세금 감면을 요구했다. 당연히 동부에서 줄어든 세금은 알베르트에게 가담했던 세력인 북부에서 더 걷을 예정이라고 한다.
세르시아 교단은 세르시아교를 국교로 지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얼마나 소소한 요구란 말인가?
‘이건 뭐, 보상을 안 받는 거나 다름없지.’
국교로 지정되면 왕국 내에서 세르시아교 외에는 이단으로 규정되는데, 국교로 지정되기 전에도 이미 세르시아교 독주 체제였다. 즉, 실효성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아무튼 드디어 클로이가 호명됐다.
“클로이 메이필드.”
클로이가 앞으로 나가서 한쪽 무릎을 꿇자, 프란츠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행상에 앞서, 저의 부친인 만프레트 폰 하츠펠트 전대 국왕이 메이필드 가문에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 깊은 사죄의 말씀을 전합니다.”
클로이의 어깨가 잠시 움찔했다.
혹시 분노조절장애를 일으키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채 행상이 진행됐다.
“......하여 결계를 제거한 공을 높이 사는바, 본디 메이필드 가문이 소유했던 영지와 작위를 그대에게 수여합니다.”
수배자를 잡으며 복수의 칼날을 갈던 클로이는 사라지고, 고귀한 메이필드 후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짝! 짝! 짝!
그러자 감격한 듯한 얼굴의 니콜스도 손이 부서져라 박수를 쳐댔고, 곧 청색 마탑원과 다른 참석자들에게도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짝짝짝짝짝짝짝짝!!
알현실을 가득 메운 박수는, 반쯤은 울상이 되어버린 클로이가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멈췄다.
“마지막으로... 엘!”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곧장 앞으로 나가서 프란츠 앞에 무릎 꿇었다.
“아, 엘 공! 대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대가 없었다면 저는 지금쯤 왕좌에 있는 게 아니라 관속에 있었겠지요.”
그럴 가능성이 컸겠지.
“겁이 많아 음지에 숨어있던 저에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그대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며, 앞으로 부끄럽지 않은 왕이 되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굳이 그런 약속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왕이 된 이후로도 아랫사람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걸 보니 어진 왕이 될 것 같긴 했다.
“......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공적을 세운 그대에게 약소하게나마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아이일이라는 성과 백작위를 수여합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또 한차례 우레와도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고개를 드세요, 엘 아이일 백작.”
엘 아이일 백작.
당뇨병에 걸릴 것만 같은, 달콤한 울림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프란츠의 지시대로 고개를 들었다.
“혹시 더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엘 아이일 백작? 백작위와 함께 장원과 저택도 수여해드릴 것입니다만, 역시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감을 지울 수가 없군요.”
사전에 약속한 것은 다 받았는데, 더 준다고? 그렇다면 마다할 수 없지.
물론 예의상 한 번은 거절해야 할 것 같아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가며 대답했다.
“이미... 추, 충분... 합니다... 전하....”
“하하, 그러지 마시고 편히 말씀해보세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역시 기본이 되어있는 사내였다.
예의상 한번 튕긴 것뿐인데, 거기서 알았다고 입 싹 닫아버렸으면 나도 모르게 전기를 주입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편하게 말하라고 하니, 나는 무엇이 좋을까 잠시 고민한 후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냈다.
“아,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럼 저도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전에 찬탈자 알베르트가 자신을 지지해준다면 제게 왕실에 있는 마법서들을 열람할 수 있게 해준다고 제안했던 적이 있는데, 혹시 전하께서도 같은 기회를 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새, 생각해둔 것이 있으셨군요? 지, 진작 말씀하시지. 알겠습니다. 그대에게 왕실 서고의 출입을 허락해드리겠습니다.”
아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