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 시해자(King slayer)
억울한 마법사?
그게 누군데?
억울한 마법사는 이제 잊어라.
“운이 좋군.”
나는 운이 좋은 마법사로 다시 태어났다.
“네, 네놈...? 어, 어떻게 이곳에...?”
내가 철의 기사단을 알현실에 가두고 텔레포트로 탈출한 건 운이 아니다. 실내에서 그 마법을 쓰면 벼락이 건물 옥상으로 떨어질 거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건 내 사전 계획 중 일부였고, 클로이가 마법사를 암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왕성을 감싸는 결계가 사라진 시점부터 언제든 실현 가능해졌었다.
그런데 텔레포트한 장소에 알베르트가 있다?
이건 순도 100%짜리 운이다.
물론 이곳에서 알베르트를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철의 기사단이 갇혀있으니 큰 위협 요소 없이 그를 찾아다닐 수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찾는 수고를 덜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어, 어, 어떻게 위에서 내려온 거지...? 이, 이, 이곳은 왕성의 꼭대기인데...?”
알베르트는 나의 등장이 몹시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그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이렇게 볼품없이 말을 더듬을 게 아니라, 나를 보자마자 덤벼들었어야 했다. 마법사를 제압하기에는 기습만 한 게 없으니까. 근데 생각해보니 기습은 누구에게나 효과적이군.
아무튼 그는 딱 봐도 범상치 않은 황금빛 찬란한 갑주를 입고 있었는데, 한심하게 금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진 않았을 테고 아마 말로만 듣던 전설적인 금속 오리할콘으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
“갑옷 멋지네. 근데 기사만 내보내고 너는 이런 곳에 쥐새끼처럼 숨어있을 거면서 갑옷은 뭐하러 입은 거야? 무덤에 부장품으로 같이 묻어달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꽤나 널찍함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트 혼자 있었기에, 혹시 조금 전 알현실 옆에 기사단이 매복해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가 숨어있을까 봐서다.
‘......흐음, 진짜 혼자인 것 같네.’
딱히 수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결계가 사라져 수도로 진입한 반왕군이, 왕성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진격해오고 있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였다.
“저거 보여? 저 사람들 전부 네 목을 노리고 달려오는 거야. 물론 헛수고라고 할 수 있지. 저자들은 널 죽일 수 없을 테니까.”
“그, 그게 무슨... 서, 설마...?”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걸까.
알베르트의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나를 여기서 탈출시켜주겠다는 건가?”
“미친. 뭔 개소리야? 저들이 도착하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죽이겠다는 소리지.”
제멋대로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었던 알베르트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이익...! 네놈이 무슨 신묘한 술수를 사용해 지붕에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충직한 철의 기사단을 상대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철의 기사단?”
“그렇다! 날 지키기 위해 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지. 그러니 네놈의 그 비루한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도망치는 게 좋을 거다!”
그가 발악하듯 소리치며 전망대의 문을 가리켰다.
“헉! 저, 저 문밖에 왕국 최고의 정예 기사단이 대기하고 있다고?!”
나는 기겁하며 말했다. 그러자 알베르트는 자신의 허풍이 먹혀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비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크큭... 그렇다. 기사단장까지 있지.”
“헉! 저, 저 문밖에 왕국 최고의 검인 기사단장도 대기하고 있다고?!”
“크크, 그래. 내가 소리 지르면 당장이라도 네놈의 사지를 절단하러 뛰쳐 들어올 것이다!”
“그럼 소리 질러.”
“무, 뭣?”
“소리 질러서 부르라고. 철의 기사단.”
어이가 없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알베르트는 이미 날 본 순간부터 계속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점, 철의 기사단은 알현실에 갇혀있다는 점, 그리고 기사단의 절반을 궤멸시킨 장본인인 나한테 기사단의 이름을 들먹이면 내가 겁먹을 거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사실 마지막 부분은 맞긴 하지만 아무튼.
“뭐해? 왜 안 불러?”
“그, 그건...... 네, 네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
“기회?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내가 대신 불러줄게.”
나는 출입문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기사단!! 기사단!! 알베르트의 눈알이 뽑히기 직전이다!! 와아악!! 어서 들어와서 너희들의 왕을 지켜라, 기사단─!!! 은 오지 않을 거야. 아니, 올 수 없다고 하는 게 맞겠네.”
“......뭐? 서, 설마 네놈이 다 죽인 것이냐?”
“흐음, 그런 건 아닌데....”
[조건을 달성해 능력치가 오릅니다!]
“아, 방금 하나 죽였네.”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또 인페르노에 닿은 모양인지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쨌거나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내가 돌연 허공을 응시하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니, 알베르트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미, 미쳤어... 제, 제정신이 아니야... 너처럼 정신 나간 놈은 태어나서 처음 봐....”
“처음이지만 마지막이기도 할 거다!!”
─파사사삭!
눈 깜짝할 새에 바닥에서 수많은 얼음 가시들이 솟아나며 알베르트를 집어삼켰다.
[금일 사용 가능한 ‘아이스 스파이크’ - 1회]
아니, 집어삼킨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크윽...! 이 비겁한 새끼가!”
퍼서석! 굵직한 얼음 가시들이 부서지며 알베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큰 상처 없이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이걸 맞고 멀쩡하다고? 갑옷 때문인가?’
내게 관련 속성이 없다고는 해도 아이스 스파이크는 중급과 상급 사이의 마법이다. 알베르트도 웬만한 기사 수준은 된다고 들었으나, 그런 수준으로는 이 정도의 마법을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역시 저 오리할콘제 갑옷이 마법을 방어해준 거겠지.
“이야, 되게 좋은 거 입고 있네?”
나는 여유롭게 말했지만, 내심 살짝 당황했다. 저 갑옷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법을 몇 번 막아낼 수 있는지, 어느 등급의 마법까지 막아낼 수 있는지, 단순히 방어뿐 아니라 혹시 다른 능력은 없는지 등.
‘설마 라이트닝 블래스트까지 막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어쨌든 나의 필살기가 막혀버리면 난감해지므로, 일단은 갑옷의 수준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 갑옷 말이야. 어디까지 방어해주지?”
“......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내가 적에게 그걸 순순히 말해줄 거라고 생각한─”
“어어!! 저것 좀 봐! 위! 위! 천장!!”
─번쩍!
─꽈릉!
순간, 전망대의 천장이 우르르 무너지며 한줄기 벼락이 내리꽂혔다.
[금일 사용 가능한 ‘콜링 썬더’ - 5회]
그와 동시에 알베르트의 갑옷 표면에 어떤 마법진 같은 게 떠오르며 벼락을 흡수했다.
덕분에 녀석은 잠시 휘청거렸을 뿐, 이번에도 역시 심대한 타격을 받지는 않은 듯 보였다.
“큭, 이 개자식... 또 비겁하게 기습하다니! 죽여버리겠다!!”
뭐지? 이게 화낼 일인가? 우리가 마주친 순간부터 전투는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는데, 이게 왜 비겁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저런 마인드로 살면 굳이 내가 죽이지 않더라도 단명하기 딱 좋다.
아무튼 지금까지 겁에 질려 뒷걸음질만 쳤던 그는, 분노가 공포를 앞선 모양인지 드디어 나를 향해 쇄도하며 검을 휘둘렀다.
─화륵! 카앙!
나도 즉시 검을 뽑아 녀석의 검을 막아냈다.
‘......공격은 그저 그런 수준이군.’
철의 기사단원보다 확실히 아랫줄이었다. 퍽! 나는 녀석을 발로 차서 밀어내며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자, 조금 따끔해요!”
─즈즈즈즈!
내 머리 위에서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전기의 구체가 생성됐다. 그것은 주변에 자잘한 전기를 흩뿌리며 알베르트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금일 사용 가능한 ‘일렉트릭 오브’ - 3회]
“으그그극...!”
구체에 적중당한 알베르트가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콜링 썬더보다 위력 자체는 강한 마법이었기에 이전과는 다른 반응이었으나, 그럼에도 역시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다. 알베르트는 금세 몸을 수습하고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공방이 오고 갔다.
─채앵! 꽈릉! 캉! 화르르륵! 사사사삭!
나는 그를 향해 다양한 마법을 시전했으나, 녀석의 황금빛 갑주는 웬만한 마법은 깔끔하게 방어해냈다. 오직 전격 속성의 중급 마법만이 약간의 타격을 줄 수 있을 뿐.
‘대충 감이 오는군.’
몇 차례 마법을 날리며 탐색하다 보니 슬슬 견적이 나왔다. 알베르트의 갑옷은 내 속성 쉴드인 ‘라이트닝 아머’와 엇비슷한 수준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못 뚫을 것도 없다.
“크하하! 막상 붙어보니 네놈도 별것 없구나!”
어쨌거나 내 마법이 계속 갑옷에 막히자, 알베르트는 의외로 해볼 만하다는 판단이 섰는지 의기양양해져서 소리쳤다.
“뭐 하고 있는 것이냐? 내게 유의미한 타격을 전혀 입히지 못하고 있지 않으냐? 그동안 이딴 놈에게 움츠러들어 있던 나 자신이 한심해질 지경이군!”
“한심한 건 네 검이고.”
“허세 부리지 마라! 하압!”
─카앙!
솔직히 녀석의 공격은 하품이 나올 만한 수준이었다. 이런 평기사 정도의 실력자는 원래 나와 눈도 못 마주친다.
“실망이야... 차라리 메두사와 싸웠을 때가 더 쫄깃했던 것 같네.”
내가 ‘국왕 시해자’가 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던가. 심지어 이건 시스템이 주는 퀘스트 중에서 유일하게 내 의지로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약하다니?
아니, 내가 강해진 건가?
아무튼 현자 타임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뭐, 하긴.
국왕이 센 거냐. 휘하의 부하들이 센 거지.
나는 슬슬 이 퀘스트의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이제 끝내자.”
“헛소리! 네놈이 어찌 탈진을 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성문에서 고유 마법을 썼다는 건 알고 있다. 즉, 지금 네놈은 내 갑옷을 뚫을 수 있는 마법이 없다는 뜻이지!”
“와... 전부 틀린 말이라 어디서부터 설명해줘야 할지 감도 안 오네.”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쓰지도 않았고, 저 갑옷을 뚫을 수도 있다.
“아, 몰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나는 품에서 붉은빛 찬란한 무언가를 꺼내 머리 위로 높게 치켜들며 외쳤다.
“그 갑옷이 이것도 막아줄 수 있을까!”
“그, 그 붉은 빛은 설마...?! 허억!”
알베르트가 기겁하며 황급히 눈을 감았다.
근데 이건 그냥 루비다.
유사시에 기사단을 속일 용도로 준비해온 건데, 기껏 준비해온 걸 안 쓰면 아쉬우니 그냥 한번 꺼내 봤다.
어쨌든 나는 그가 눈을 감은 틈에 속박의 저주를 모조리 때려 박았다.
─츠츠츠....
─츠츠츠....
[금일 사용 가능한 ‘체크 메이트’ - 0회]
바닥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 황색 기운이 알베르트의 몸을 휘감았으나, 녀석은 눈을 감고 있어서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다는 사실도.
솔직히 말하자면 캄캄한 밤이었기에 먹구름이 몰려드는 모습은 내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는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마법을 캐스팅했으니까.
─쿠릉... 쿠르릉...
어두운 밤하늘이 간헐적으로 번쩍이며 우렛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일 사용 가능한 ‘일렉트리컬 익스플로전’ - 1회]
“......? 가, 갑자기 웬 천둥소리가...?”
알베르트는 불안한 듯 중얼거렸지만 눈은 여천히 감은 채였다.
그러나 하늘의 울음소리는 점점 거세졌다. 쿠르릉! 꽈릉! 방전으로 인한 번쩍거림 역시 더욱 강렬해지며 수도 전체를 깜빡이게 했다.
결국 알베르트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바닥부터 살폈고, 이윽고 내 손에 들려있는 보석으로 시선이 향했다.
“......루, 루비?! 이 개자식!! 또 나를 속였─”
─꽈르르르르르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그의 갑옷에 새겨진 마법진이 유례없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마법을 방어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알베르트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곧, 그의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으그그극... 루비....”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알베르트. 그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점점 더 밝아져만 갔다.
“루비... 그으윽... 루비였다니─”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리던 알베르트는,
폭발했다.
─번쩍! 파츠츠츠츠츠!
눈부신 섬광과 함께 그의 몸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수백, 수천 갈래의 전류 줄기가 일거에 뿜어져 나왔다.
루비 때문이 아니었지만, 알베르트는 그렇게 루비 타령을 하며 최후를 맞이했다.
갑옷 덕분인지 그의 몸통은 비교적 멀쩡했고 속박의 저주가 남아있는 탓에 바닥에 쓰러지지도 않았지만, 그는 확실히 죽었다.
왜냐하면 메시지가 잔뜩 떠올랐기 때문에.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국왕 시해자(King slayer)’를 달성했습니다!]
[조건을 달성하여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사용 가능한 마법 횟수가 증가합니다.]
[성장 보조 특성이 강화됩니다!]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반경이 대폭 증가─]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쿨타임이 완화─]
.......
.......
운이 약간 따라주기도 했고 조금은 허무하게 달성한 감도 있었으나, 어쨌거나 시스템은 열렬히 축하해주며 보상을 쏟아냈다.
메시지를 하나하나 자세히 읽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많아서 중요한 것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건 바로 최종 퀘스트에 관한 것.
[메인 퀘스트 ‘국왕 시해자’를 달성하여 최종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국왕 이상의 격을 지닌 존재를 시해하십시오.]
‘국왕 이상의 격을 지닌 존재? 그게 뭔데?’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추가 설명이 떠올랐다.
[국왕 이상의 격을 지닌 존재로는 황제, 드래곤, 대악마, 신이 있습니다. 상기 목록 중 무엇을 시해해도 퀘스트는 완료됩니다.]
“와... 시팔... 이건 진짜....”
목록을 확인한 나는 육성으로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같이 빡센 존재들이었지만,
그래도 딱 하나, 다른 것들에 비해 난이도가 월등히 낮아 보이는 게 딱 하나 섞여 있었다. 마치 이걸 고르라는 것처럼.
황제.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목록 중에서 황제를 노릴 것이다. 다른 존재에 비하면 이것은 식은 죽 먹기다.
이런 보너스 같은 훌륭한 선택지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내가 욕설을 내뱉은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장난해? 약 올려? 하, 시팔... 시스템 시해자는 없나? 진짜 죽여버리고 싶네.”
이 게임에는 제국이 없기 때문이다.
“......아오, 억울한 마법사 맞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