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에 대한 반역 (6)
우리는 평원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일주일간의 재정비 시간을 갖고 수도 엘디니아로 진격했다.
사실 재정비라고 해봐야 장비를 손질하고 부상병을 치료하는 것 정도였는데, 우리 쪽에는 세르시아 교단이 있기에 사제가 넘쳐흘러서 이틀 만에 어지간한 부상자는 다 치료해버릴 수 있었다.
‘메딕의 비율이 높다 이거지.’
그런데 왜 일주일이나 후에 진격을 시작했느냐? 그건 수도에 사는 주민들이 피난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전쟁터에 무고한 병사는 없다지만, 주민은 무고하다.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고, 우리는 양민을 학살하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찬탈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싸우는 것이었으므로, 주민은 손대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이건 김칫국을 마시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벌써 온종일 공성전을 벌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에 진입하기는커녕 성문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다시 한번 간다! 성문을 기준으로 좌측 성벽에 모든 투석기와 마법을 집중해라!”
공작이 우렁찬 목소리로 지시하자, 뒤로 물러나 있던 투석기와 마법사들이 조금 전진해서 성벽을 향해 화력을 쏟아부었다.
─후웅! 후웅! 사사사삭! 투콰콰콰!
큼지막한 돌덩어리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형형색색의 마법들이 각자의 위용을 뽐내며 쇄도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벽에 닿지 못했다.
─콰콰쾅! 콰쾅! 콰콰쾅!
성벽을 감싸고 있는 백색의 결계가 외부에서 가해지는 모든 공격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튼튼했지만, 진짜 무서운 점은 따로 있었다.
“적의 공격이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결계는 일방통행이었다는 점이다.
성벽 위에 있는 국왕군 마법사로부터 수많은 마법이 쏟아져 나왔다. 놀랍게도 결계는 외부의 공격은 전부 막아줬지만, 내부에서 쏘는 마법만은 통과시켜줬다.
─슈웅! 휘익! 화르륵!
공작의 지시에 따라 한차례 공격을 쏟아부었던 투석기와 마법사들은, 황급히 적의 공격 범위 바깥으로 물러났다.
쏘고 물러나고, 쏘고 물러나고.
공성전은 계속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결계의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와 씨, 저거 진짜 개사기네.”
수도로 진입만 하면 우리가 승리할 게 뻔한데, 저놈의 결계 때문에 도저히 진입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나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결계의 효용성에 대해 늘 의구심을 가져왔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상시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였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카트카를 둘러싼 불 속성의 결계. 그건 불 속성이라 따뜻해서 노숙자들의 핫 플레이스다.
남부 사막지대 근처에 있는 청색 마탑의 도시 도튼? 그곳의 결계는 물 속성이라 더위를 식혀주는 용도로 쓰이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막상 공성전이 벌어지니, 결계의 어마어마한 진가가 발휘됐다. 왜 영지전에서 상대의 도시까지 안 쳐들어가고 땅만 찔끔 먹고 빠지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결계를 너무 얕봤구나....”
외부의 공격은 막아주고, 내부의 공격은 보내주고. 얌체가 따로 없었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자, 옆에 있던 클로이가 끼어들었다.
“다른 도시의 결계는 저 정도까지는 아니야. 수도의 결계가 특별히 강한 거지. 엘도 들어봤을 거 아니야? 수도 엘디니아는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고.”
“소문은 들어봤죠.”
내전으로 무너질지언정, 외부의 공격에는 함락당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도시.
이게 수도 엘디니아의 수식어다.
“그래도 이건 소문 이상인데요? 수도로 진입을 해야 왕을 찾든 잡든 할 텐데... 차라리 저희가 나서서 고유 마법이라도 갈겨보는 게 어떨까요?”
“고유 마법? 그것도 소용없을 거야.”
“예? 에이, 설마. 그 정도까지 튼튼할 리─”
─콰콰쾅! 콰쾅! 콰콰쾅! 챙그랑!
클로이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군의 공성이 또 한차례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있었다.
......챙그랑?
클로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성벽을 바라보니, 공격받은 결계의 일부분이 깨져있었다.
“오오...! 깨트렸나...!”
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결계의 깨진 부위가 새하얗게 빛나더니 순식간에 재생성됐다.
“미, 미친. 자가 수복기능도 있었냐!”
이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고유 마법을 써도 소용없을 거라구. 결계를 깨트리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아. 수도의 결계도 가까이에서 중급 이상의 마법을 쓰면 깨질걸? 오러로도 가를 수 있을 테구. 문제는 금방 복구된다는 거지.”
“아, 그럼 가까이 붙어서 깨트려봤자 안으로는 몇 명밖에 못 들어가겠네요.”
들어가는 건 둘째치고, 단체로 결계에 접근하기조차도 어려울 것이다. 한둘이 은밀하게 움직인다면 모를까 여러 명이 들러붙으면 적에게 금세 들통날 테니까.
“흐음. 결계는 언제까지 유지되는 겁니까? 그래도 영원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뭔가 연료 같은 게 있다든가. 이렇게 공격받는 상황이라면 평상시와 달리 에너지 소모가 막심할 텐데.”
“마나석이 원료야. 수도에는 아마 수천 개도 넘게 있을걸? 거기서 마나를 끌어다가 결계 마법사가 자신의 속성으로 변환시킨 뒤 결계로 출력하는 거야.”
수천 개? 마르지 않는 우물이나 다름없군.
“마나석이 많아서 이렇게 잘 버티는 거였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수도의 결계를 담당하는 마법사의 속성이 좋아서 그래. 실력은 그저 그런데 바람 속성 쿼드러플이거든. 만약 트리플이 맡았으면 벌써 깨졌어.”
“아.”
쉽지 않군.
확실히 일국의 왕을 상대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평야에서 벌였던 전투 한 번을 이겼다고 해서 게임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고, 저 결계를 맡고 있는 마법사나 철의 기사단 등 빼어난 수하들도 많았다.
물론 그 기사단의 절반은 리얼한 석상으로 변한 뒤 내게 파쇄됐으나, 반대로 말하자면 아직 절반씩이나 남아있다는 소리다.
뭐,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는지, 반씩이나 남았는지는 관측자의 철학적인 견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는 ‘씩이나’라고 생각한다. 철의 기사단은 강하니까. 솔직히 마안이 없었으면 못 이겼다.
“기사단장도 남아있고, 결계도 건재하고... 이거, 왕에게 가는 길은 험난하구만.”
“그래도 엘, 네가 말한 것처럼 결계도 영원하지는 않으니까. 계속 공격하다 보면 언젠가는 마나석의 마나가 바닥나든, 결계 마법사가 지쳐 쓰러지든 하겠지.”
“흐음... 역시 그렇겠죠?”
***
역시 그렇지 않았다.
반왕군은 수도 근처에 주둔지를 설치하고, 무려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공성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나 이렇다 할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재미는커녕 가랑비에 옷 젖듯 야금야금 피해만 누적되는 상태였다.
아무리 거리를 조절하며 공성한다고 해도 모든 마법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 아군 마법사는 비교적 괜찮았으나, 움직임이 굼뜬 투석기는 적의 공격에 하나둘씩 파괴되어 이제는 거의 남지 않았다.
─타닥. 타닥.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투석기 한 대가 국왕군의 마법에 맞아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오! 더는 못 참겠다.”
바닥에 앉아서 열흘째 지속되는 이 지리멸렬한 공성전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봐도 이런 식으로 찔끔찔끔 공격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결계를 못 깬다. 작전 변경이 필요하다.
나는 곧장 지휘부 막사로 향했다.
***
알베르트 폰 하츠펠트는 기사단장의 보고를 받고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크크... 그래, 반역자 무리의 공격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고?”
“예, 전하. 그들은 장기간에 걸친 공성전에 의한 피해 누적으로 공성 병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씩이지만 사상자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어서, 놈들의 사기도 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번의 패배로 속이 쓰렸었는데...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군그래.”
알베르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원 전투에서의 참패는 뼈아팠다. 그 전투 한 번으로, 수적 우위에 있었던 국왕군은 수적 열세로 몰렸다. 게다가 웬 불사조가 집요하게 고급인력인 마법사만 노리는 바람에 질적인 손실도 컸다.
어디 그것뿐인가?
정예 중의 정예인 철의 기사단원 스무 명이, 그 중부의 메두사라 불리는 미치광이 성자 한 명에게 깡그리 몰살당했다. 그놈은 놀랍게도, 정말로 메두사처럼 석화시키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알베르트는 지금도 오금이 저렸다. 놈은 분명히 자신을 죽이고도 남을 만한 실력자였다.
“그... 그놈은 뭘 하고 있던가? 특이사항 없나?”
알베르트는 군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기 위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담담한 척 물었다.
“예, 멀찌감치 떨어져서 공성전을 지켜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다고 합니다. 아마 그자도 결계를 뚫을 만한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기사단장이 문제없다는 듯 말했지만, 알베르트는 여전히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 흠흠. 놈은 전격 계열의 고유 마법을 다룰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정도면 결계를 꽤 크게 부술지도 모르잖나? 깨진 부분이 크면 금방 복구되지도 않을 테고.”
“성자는 그 마법을 쓰면 탈진한다고 하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설령 결계가 깨진 틈으로 반란군이 들어온다 한들, 충직한 전하의 마법사들이 쏟아붓는 마법에 즉살 당할 것입니다.”
결계가 잠시 깨졌다고 해서 안쪽에 있는 수많은 국왕군이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깨진 부분을 경계할 것이고, 그곳으로 들어온 소수의 반왕군은 꼼짝없이 포위당하게 될 것이다.
“뭐, 그건 그렇겠군. 그래도 방심하지는 말라고. 그놈은 상식이라는 게 통하지 않으니까. 어쨌든... 지금도 동서남북의 모든 길목이 폐쇄된 상태인가?”
“그렇사옵니다.”
수성하는 측에 방어라는 강점이 있다면,
공성하는 측에는 보급로 차단이라는 강점이 있다.
반왕군이 그 점을 활용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수도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물자의 보급을 끊고 있었다.
그럼에도 알베르트는 코웃음 쳤다.
“흥, 우습단 말이지. 감히 우리를 말려 죽이겠다니.”
다른 곳이면 몰라도, 이곳은 무려 수도다.
거대한 규모답게 비축해둔 물자도 많았고, 심지어 상당수의 주민들이 피난을 떠난 상태. 이 정도라면 아무리 못해도 몇 개월은 너끈히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리가 말라 죽기 전에 본인들이 먼저 제풀에 지칠 텐데. 역시 반역자 무리답게 한심한 녀석들이 아닌가.”
“그들도 보급로 차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계속 동쪽 성문을 집중해서 공략하는 것이겠지요.”
“그마저도 실패하고 있지만 말이지... 크크.”
음흉하게 웃은 알베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동쪽을 바라봤다.
깊은 밤이었지만 결계에서 발생하는 빛으로 인해 성벽 주변은 희끄무레하게 빛나고 있었나.
“조용하군. 오늘의 공격은 끝난 모양이지?”
“예, 전하. 몇 시간 전에 멈췄습니다. 아마 해가 뜨면 다시 공격해올 것입니다.”
“쯧쯧... 백날 공격해보라고 하거라. 저 결계가 유지되는 한, 우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번쩍!
순간, 동쪽 성문 방향에서 강렬한 섬광이 번쩍였다.
“......?”
그리고 수 초 뒤, 아득한 천둥소리가 알베르트가 있는 왕성까지 울려 퍼졌다.
─꽈르릉....
알베르트는 털끝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서, 설마...?”
갑작스럽게 성문 쪽에서 점멸한 빛.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밤중에 들려오는 천둥소리. 이건 정황상 그놈이 전격 계열의 고유 마법을 쓴 게 분명했다.
“탈진한다면서 왜 저 마법을...? 대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알베르트는 불안한 듯 중얼거리며 성문을 응시했다.
그의 불안한 예감은 이윽고 현실이 됐다.
천둥소리를 시작으로, 온갖 마법들이 성문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밤하늘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일 정도로 이례적인 대규모 공격이었다.
“초, 총공세다! 놈들이 작정하고 총공세를 감행했단 말이다!!”
알베르트는 발작하듯 소리쳤다.
“대기 중인 병사들을 모조리 저곳으로 보내라! 당장!!”
***
수도의 서쪽 성벽 근처.
나는 클로이와 함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성벽 위에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보초병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기다리고 있으니, 머지않아 고요한 밤공기를 타고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꽈르릉....
‘......드디어 아스왈드가 라이트닝 블래스트를 사용했군.’
이제 곧 반왕군의 대대적인 총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물론 총공세를 가한다고 해도 결계를 뚫고 대군이 수도로 진입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열흘이나 끌 것 없이 진작 그랬겠지.
총공세는 단지 눈속임일 뿐이다.
모든 국왕군의 신경을 동쪽으로 집중시키려는.
“------!!”
이윽고 성벽 위에 있던 소수의 병사들이 동쪽을 바라보며 뭐라뭐라 소리쳤다. 그리고 서둘러서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지금이다.
“가죠, 클로이 씨.”
“응.”
나는 즉시 클로이와 함께 성벽을 보호하고 있는 결계로 접근했다.
화륵! 검에 마나를 불어넣고 결계에 꽂아 넣었다.
─끼기기긱....
내 검을 감싸고 있는 화염은 오러와 비슷한 성질을 띠고 있어서 그런지, 조금 뻑뻑하긴 해도 결계를 갈라내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는 갈라진 틈을 통해 재빨리 몸을 밀어 넣었다. 우리가 통과하는 것과 동시에, 결계는 다시 재생성됐다.
‘와, 진짜 빨리 재생되네. 이러니까 열흘째 못 뚫고 고전하지.’
하지만 괜찮다.
결계를 완전히 부술 수 없다면, 결계 마법사를 부수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는 암살을 위해 은밀히 잠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