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에 대한 반역 (4)
나는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휘이이잉
─까드득!
과연 니콜스의 블리자드는 격이 달랐다.
물론 그는 이 마법의 원조이며 관련 속성도 갖추고 있으니 내가 사용하는 것보다 위력이 강한 것은 당연하겠으나, 전에 꿈속에서 맞아봤던 젊은 니콜스의 블리자드보다 지금 쓰고 있는 게 훨씬 더 강력해 보였다.
‘와 씨, 이 양반은 에이징 커브도 안 오나?’
검사는 나이를 먹으면 육체도 노화되기에 기량 저하가 눈에 확 띄지만, 마법사는 딱히 그런 게 없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는 니콜스의 블리자드는, 어느새 천 명쯤 되어 보이는 국왕군을 얼려버렸다.
하지만 적은 어림잡아도 만 명이 넘는 훌쩍 규모.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래서인지 니콜스는 마법을 중단하지 않고 억지로 눈보라의 범위를 변경하려 하고 있었으나, 그건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눈보라는 느릿느릿 옆으로 움직였고, 그걸 추가적으로 맞아주는 적은 거의 없었다.
‘......이젠 효율이 안 나오는데 무리하시는군.’
나는 눈보라의 범위를 피해 새까맣게 몰려오는 국왕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앨리스를 바라봤다.
“앨리스, 너 마나량도 좀 늘어났댔지?”
“응, 그랬지.”
로브를 푹 뒤집어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면 이전처럼 불사조를 소환했다고 해서 곧장 탈진하지는 않겠네?”
“으음... 아마두?”
“좋아, 그럼 지금 바로 소환해버려.”
동부 연합군 쪽에서 불사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버, 벌써? 그래도 되는 거니?”
“그래, 보여주는 거다! 불의 여왕님의 실력을!”
내가 기합을 불어넣자, 앨리스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알겠어! 보여줄게!”
화르륵! 그녀의 머리 위에 거대한 불덩어리가 생성되며 주변을 환히 밝혔다.
나도 즉시 그녀의 옆에 서서 같은 마법을 캐스팅했다.
‘실전에서 처음 써보는군.’
일순간 내게도 부담될 정도의 마나가 훅 빠져나감과 동시에, 내 머리 위에도 거대한 불덩어리가 생성되었다.
[금일 사용 가능한 ‘서먼 피닉스’ - 0회]
그렇게 생성된 두 개의 불덩어리는, 점성 높은 용암처럼 꿀렁거리며 서서히 새의 형태를 갖춰나갔다.
“무, 뭐야? 너도 이걸 쓸 줄 알았니?”
급격한 마나 소모로 인해 조금 창백해진 앨리스의 얼굴은, 똑같은 마법을 사용하는 나를 보고 더욱 창백해졌다.
“지금 그게 중요해? 누구 불사조가 더 빠른지 시합이나 하자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윽고 완성된 불사조를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화르르르르륵!
“머, 먼저 출발하다니, 치사해! 에잇!”
심통 난 듯한 앨리스도 따라 날려 보냈다.
─화르르르르륵!
두 마리의 불사조가 창공으로 비상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갈 기세로 고도를 높인 불사조들은, 이내 날개를 활짝 펼치고 지면을 향해 활공하기 시작했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비행하는 불사조가 지나간 자리는, 여지없이 화염에 휩싸였다.
불사조들이 피워내는 불길은 광역으로 뒤덮는 블리자드에 비하면 턱없이 좁은 범위였지만, 이것들은 마법인 주제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장점이 있었다.
날렵하게 비행하는 두 마리의 새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전장을 누비며 적재적소에 불길을 일으켰다.
─화르르르르륵!
“저게 무슨...?”
“피, 피해라!”
“흐아아아악!!”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열심히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뚜벅이 보병들은 화마를 피하랴 눈보라를 피하랴 혼비백산했다. 자기들끼리 부딪혀서 넘어지고, 넘어진 놈은 동료에게 밟히고.
심지어는 불사조에 의해 몸에 불이 붙어서, 스스로 블리자드의 권역으로 뛰어드는 놀라운 녀석도 있었다. 하긴, 내 경험상 불타 죽는 것보다는 얼어 죽는 게 훨씬 덜 아프긴 하다.
[조건을 달성해 능력치가 오릅니다!]
[조건을 달성해 능력치가 오릅니다!]
[조건을 달성해 능력치가 오릅니다!]
.......
.......
병사들이 죽으며 시스템 메시지가 미친 듯이 떠올랐다.
“아오, 어지러워. 어쨌든... 이거 진짜 효율 장난 아니네.”
내가 소환한 불사조였지만, 내가 봐도 훌륭했다. 게다가 앨리스의 그것과 합쳐서 쌍으로 돌아다니니, 원조 격인 티안브리스의 불사조보다도 더 위력적이었다.
블리자드처럼 단숨에 많은 적을 해치우지는 못했으나, 이대로 계속 불사조가 활개 치면 그 이상으로 성과를 올릴 것은 불 보듯 뻔해 보였는데 생각해보니 저건 불이 맞았다.
“자, 자네. 어떻게 그런 마법을...?”
“성자님...?”
근처에 있던 니콜스와 성녀가 얼빠진 듯한 얼굴로 물었지만, 나는 손가락으로 저편을 가리키며 경고했다.
“그걸 설명해드릴 때가 아닙니다. 저걸 보세요!”
적들도 그저 오합지졸은 아니었다.
물론 상당수의 보병은 아작나고 있었지만, 선두에서 말을 타고 돌격해오던 국왕군 기병들은 어느새 우리 진영의 지척까지 도달해있었고, 적진에 있는 마법사 역시 불사조를 향해 마법을 퍼부어댔다.
“청색 마탑! 적 기병을 향해 마법을 날려라!”
─슈우웅! 사사사삭! 까드드득!
─휘오오오! 투콰콰콰! 화르르륵!
양쪽 진영에서 무수한 마법이 쏟아져나왔다.
무려 마탑과 왕실의 마법사들이 쏘아대는 마법이었기에, 소규모 영지전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중급 마법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가히 어마어마한 화력.
특히 국왕군 마법사의 대다수는 불사조를 공격하기 위해 하늘로 마법을 쏘아 보냈는데, 그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무슨 방공포대라도 가동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방공포는 수백, 수천 발을 쏴야 간신히 한 발을 맞추는 법. 그들의 마법 역시 대부분 공중을 누비는 불사조를 맞히지 못하고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결국 그들은 작전을 변경하기로 했는지, 마법사와 궁수들도 전진해오기 시작했다.
‘......마법의 사거리가 닿는 곳까지 다가와서 우리에게 직접 마법을 날리겠다는 거군.’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 측 보병들도 돌진하는 게 좋다. 여기에 다 같이 뭉쳐있으면 마법을 맞을 확률만 높아지니까.
나는 성녀를 향해 말했다.
“성녀님. 적 마법사들이 다가오고 있으니, 이제 저희 쪽도 전진하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어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곧 큰소리로 외쳤다.
“교단의 용사들이여! 희망의 여신을 모욕한 이단자들을 심판하세요!”
그러자 성기사를 포함한 수많은 세르시아 교인들이 광기 가득한 함성을 내지르며 용맹하게 달려 나갔다.
“와아아!!”
“심판하자! 정화하자!”
“세르시아 님의 이름으로!”
“이단자에게는 오직 죽음뿐!”
“수급을 자르고 불에 태워 정화해야 한다!”
그야말로 광신도들이 따로 없었지만, 신을 위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사기만큼은 압도적이었다.
교단군이 기세 좋게 돌진하니 밀러 백작을 위시한 다른 영주들도 각자의 병사를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고, 곧 본격적인 백병전이 시작됐다.
나는 어딜 공격할지 정하기 위해 잠시 전황을 살폈다.
‘역시 알베르트는 꼼짝도 안 하는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알베르트는 저 멀리 까마득한 최후방에서 기사단과 근위 기사, 궁정 마법사에게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며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사조를 보내볼까?’
아니,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너무 멀기도 하고, 저 정도 호위면 오히려 불사조가 소멸할 공산이 컸다. 소중한 불사조를 그렇게 소모할 순 없지.
나는 일단 우리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기 위해 거리를 좁히고 있는 적 마법사들을 노리기로 했다. 마법사만 줄여놔도 전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앨리스, 불사조를 저놈들한테 보내.”
“달려오는 마법사들한테 말이니...?”
마나를 많이 소모해서 그런지, 앨리스는 상당히 지친 듯 보였다. 불사조는 소환하는 순간에 많은 마나가 빠져나가지만, 소환하고 나서도 지속적으로 조금씩 소모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적들이 죽을 때마다 능력치가 오르고 있었기에, 마나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맞아, 기왕이면 구불구불하게 날려 보내. 그리고 너는 이번 공격까지만 하고 쉬는 게 좋겠다.”
“으응... 알았어....”
앨리스는 힘겹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불사조는 주인의 마나를 악착같이 빨아먹은 덕에 아직 쌩쌩했다.
두 마리의 불사조가 다시 한번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그것들은 추진력을 충분히 얻을 만큼 높이 올라간 뒤, 적 마법사를 향해 쏜살처럼 날아들었다.
─화르르르르륵!
─화르르르르륵!
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나선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두 마리의 불사조는, 그들에게 빈틈없는 난방을 제공했다.
“----!!”
“--------!”
그들은 뭐라뭐라 소리를 질러댔는데,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따뜻해서 좋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렇게 국왕군 마법사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물론 쉴드를 사용해 버티는 녀석들도 있었고, 회피에 성공해 반격에 나선 녀석들도 있었다.
─후웅! 후웅! 후웅! 후웅!
“과, 광역 마법이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저것을 최우선으로 막아내라!”
우리 측에 광역 마법이 가능한 자가 있듯이,
당연히 적 측에도 가능한 자가 있었다.
여러 대의 투석기를 동시에 발사시킨 것처럼,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이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저것은 돌덩어리라는 실체가 뚜렷한 마법이었기에, 니콜스의 지휘를 받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응수해 요격하거나 얼음장벽을 생성해내 방어해냈다.
─콰드드득! 콰앙! 콰앙!
‘역시 청색 마탑이야. 든든하지.’
슬슬 마법사 전력은 우열이 판가름 나기 시작했다. 애당초 우리 쪽이 질은 더 높았고 숫자는 적이 더 많았는데, 두 마리의 불사조가 깽판을 쳐준 덕에 이제는 숫자도 비슷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우리 쪽 전선에 국한된 이야기다.
저 멀리서 싸우고 있는 동부 연합군은 어떤 상황인지 이곳에서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화르르르르....
이윽고 앨리스의 불사조가 산화했다. 내 불사조는 아직 살아있었지만, 여러 차례 공격을 받은 탓에 처음보다는 그 크기가 작아진 상태였다.
‘......그럼 나도 전장으로 뛰어들어야겠군.’
앨리스의 마법은 소멸했으니 더는 이곳에서 그녀와 합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적 마법사도 많이 줄어든 상황.
나는 즉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달려 들어갔다.
전장에 진입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오러가 실린 검으로 아군을 썰어대고 있는 적 기사였다.
바로 암살.
─번쩍!
─꽈릉!
“커헉!”
[금일 사용 가능한 ‘콜링 썬더’ - 5회]
한 방에 전투 불능에 빠진 기사에게 다가가 검으로 마무리했다. 푹!
[조건을 달성해 능력치가 오릅니다!]
뭘 죽이든 능력치가 오르는 미친 전장.
노다지도 이런 노다지가 따로 없었다.
나는 전장을 분주히 뛰어다니며, 기사를 찾아내서 암살하고 다녔다. 일반 보병보다는 밸런스 파괴자인 그들을 잡아야 아군에게도 더욱 도움이 되고, 능력치도 많이 주니까.
─번쩍! 번쩍!
─꽈릉! 꽈릉!
그렇게 신나게 스펙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
돌연 저편에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접근해왔다.
길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 무참히 베어 넘기는 그들은, 한눈에 보아도 평범한 자들은 아니었다.
아군 중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처, 철의 기사단이다!!”
‘......저놈들이 그 철의 기사단? 그래서 갑옷이 짙은 회색이었군.’
알베르트의 최정예 부대 철의 기사단.
그들은 기사단의 상징인 철을 나타내기 위해 갑옷에 회색 염료를 칠한다고 하는데, 갑옷은 어차피 철인데 왜 그딴 쓸모없는 짓을 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강수를 두셨군.’
주력 중의 주력답게 개개인의 무력이 일반적인 기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전해지는 철의 기사단은 총 4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절반인 20명이 이 자리에 왔다.
나를 잡기 위해서.
***
최후방에서 전장을 지켜보고 있던 국왕 알베르트는 격분하여 소리쳤다.
“저 불타는 새는 도대체 누가 소환했다는 말이냐! 나의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 않느냐!”
가히 치명적인 마법이었다.
개전 초기에 일어났었던 눈보라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라웠었으나, 그건 청색 마탑이 개입했으니 그렇다고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불사조는 누가 봐도 불 속성이다. 청색 마탑 출신의 마법사는 저런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 자명한데, 그럼 대체 누가 사용했다는 말인가. 성자? 그 역시 전격 마법사다.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알베르트의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지금은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전하, 세르시아 교단 쪽 전선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른 전선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것이옵니다.”
“나도 알고 있다! 나라고 그게 안 보이는 줄 아느냐?”
눈보라와 불사조에 의해 제대로 된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너무 큰 타격을 입었다. 눈보라는 그쳤고 불사조 한 마리는 소멸했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아직까지도 살아남아 끈질기게 아군을 불태우고 있었다.
저걸 소환한 놈은 마나가 무한하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어쨌거나 이대로라면 저쪽 전선은 참패하게 될 것이다. 알베르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철의 기사단장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철의 기사단을 투입해야겠다. 나를 보호해야 하니 단장은 이곳에 남아있고 기사단의 절반을 내보내라.”
“옛, 전하. 그들에게 어떤 임무를 내리시겠습니까?”
“불사조로부터 마법사를 지키라 전하도─”
─번쩍!
순간, 세르시아 교단 쪽 전장에 한줄기 벼락이 내리꽂혔다. 그것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급히 명령을 변경했다.
“저놈! 저놈의 머리를 잘라서 내게 가져오라고 해라! 감히 나를 죽이겠다고 호언한 미치광이 성자를 말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부단장을 포함한 스무 명의 기사단이 즉시 전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제서야 알베르트는 웃음을 되찾았다.
철의 기사단원 다섯이면 이 왕국에서 당해내지 못할 자가 없다. 그런데 스무 명이나 보냈으니, 성자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다.
“크크... 제까짓 게 아무리 난다긴다해도 나의 기사단을 상대해낼 수는 없지. 놈의 대가리를 가져오면 깃발에 꽂아버려야겠군. 반역자들의 사기를 꺾을 겸 해서 말이야.”
국왕의 명령을 받은 기사단은 무서운 기세로 돌진했다.
─탓탓탓! 서걱!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두 베어가며 달린 그들은, 이윽고 엘이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그들은 지체없이 엘을 포위하듯 에워쌌고, 부단장이 대표로 나서서 물었다.
“네놈이 반역을 일으킨 주범, 엘인가?”
“반역을 일으킨 주범? 그건 알베르트겠지.”
화륵! 엘이 검에 화염을 일으키며 대답하자, 부단장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흥, 설마 우리와 싸울 생각인가? 너 혼자서 철의 기사단원 스무 명을 상대로?”
“뭔 개소리야? 어차피 너희들도 싸우려고 이곳에 온 거잖아?”
“무의미한 저항은 집어치우고 투항하라. 네놈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네겐 승산이 없다. 기사단장님조차도 우리 다섯을 상대할 순 없으니. 순순히 투항한다면 깔끔하게 목만 베어주지.”
웬만한 적은 철의 기사단을 만나면 전의를 상실하고 투항부터 해왔다. 그것에 익숙해진 부단장은 이번에도 투항을 권고했다.
“......진짜? 항복하면 깔끔하게 죽여준다고?”
“하하! 그렇다. 우리는 네놈의 목만 가져가면─ 컥!”
─번쩍!
─꽈릉!
엘의 주특기인 말 걸어놓고 기습하기는 이번에도 주효했다. 별안간 내리친 벼락에 맞은 부단장은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를 향해 엘은 망설임 없이 불붙은 검을 휘둘렀다.
─화륵! 채앵!
그러나 엘은 부단장을 베는 데에 실패했다. 어느새 쏜살같이 달려온 기사단원들이 그의 검을 막아내며 반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놈! 반역자다운 비열함이구나!”
“미, 미친. 스무 명이 다굴치는 주제에 누구보고 비열하다는 건데?”
엘은 쏟아지는 검을 정신없이 막아냈다.
스무 명이 동시에 공격할 순 없었기에 실질적으로 동시에 날아드는 검격은 대여섯 개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하나같이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채앵! 카앙! 파직! 파직!
사실 말이 좋아 막는다는 거지, 대부분은 라이트닝 아머가 버텨주고 있었다. 일반적인 기사보다 월등한 기사단의 검은, 엘의 검으로 쉽사리 받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촤르륵! 결국 오러가 실린 기사단의 검 한 자루가 쉴드를 뚫고 엘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크윽...!”
그의 복부가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엘의 몸에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나자, 콜링 썬더를 맞고 주저앉았던 부단장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이죽거렸다.
“그러길래 내가 투항하라고 했잖나? 괜한 만용을 부렸다가 고통만 당하는군.”
“.......”
엘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텔레포트.
그래서 알베르트의 주력인 철의 기사단을 조금이라도 처치해 그에게 타격을 입힌 뒤 텔레포트로 도주할 생각이었으나, 이래서는 기사단원 한 놈을 처치하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죽게 생겼다.
‘......아쉽지만 그냥 지금 도망쳐야 하나.’
엘이 처음과는 달리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부단장은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이거이거, 눈을 마주친 상대는 반드시 잔혹하게 살해한다는 중부의 메두사라는 칭호는 허명이었군? 안 그런가? 하하하!”
순간, 엘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아, 너 말 잘했다. 그거 진짜야. 나는 눈을 마주친 놈은 살려두지 않아. 흐흐흐.”
“허풍은... 나는 멀쩡히 살아있지 않은가?”
“내 눈을 바라봐.”
“......? 보고 있다만?”
그때, 엘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다들 똑똑히 봐라!! 내가 왜 중부의 메두사라고 불리는지를!!”
─화아악!
엘의 손에 들려있는 마안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를 에워싸고 있던 기사단원들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